양심이 하는 소리를 들으란다. 양심은 뭘 말하고 있더라? 착한 사람도 못되고, 그렇다고 악한 사람도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좀더 극악스러웠다면 사는게 좀더 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도 아닌가. 정답이 없다는 말도 애매모호하다. 선과 악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얘기도 그렇다. 어저는 옳았고 오늘은 아니라고도 한다. 이런 말장난 같은 표현들이 예전에는 없었다. 아니, 있었더라도 공공연히 터 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언어의 자유인지 표현의 자유인지 어떤 얘기던지 잘들 말하고 있다. 말의 홍수다. 당연히 혼탁한 세상을 표현하고 대변하는 것 같다. 또 일리도 있어보인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뭐 비슷한 말을 처음 들었을때는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나가다 보니까 아닌말은 아닌것 같았고, 조금후에는 그럴듯 했고, 지금은 맞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했다. 아주 예전에는 진리처럼 여겼던 것들이 이제와서는 전혀 아닌게 되어버린 일들이 얼마든지 있어서다. 나는 지금도 아들 선호 사상을 갖고있다. 허지만 실제로는 딸이 더 요긴하고 내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걸 어떻게 해명할까? 어머니 시대만해도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아들을 세웠다. 남편이 있는 경우는 첩을 들여서라도 아들을 낳았다. 요즈음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딸 로도 족하고, 무자식도 상관없게 되었다. 재산은 꼭 아들이 물려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틀린게 되어버렸다. 참으로 빠르게 변환된 사상이다. 이 급류는 그야말로 세상을 뒤엎기에도 충분하지 않는가. 내가 아직 아이일때 이런 세상의 흐름이 있었다면 지금의 나를 바꿀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덜 힘드셨을까. 내가 어머니의 기둥 노릇을 할수 있었을까.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나 일테니까. 내 깜량이 변하지 않는 한 내 찌질함이, 무능함이 어디 가겠는가. 아무리 여성 상위가 도래한들 내게 무슨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닐게다. 시대 탓만은 아니다. 아주 오랜 전시대에도 대단한 사람은 있어왔으니까. 이젠 탓할게 없어서 시대탓까지 할셈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냥 스처가는 생각일뿐이다. 어제는 웃층에서 오랜만에 전화 연락이 있었다. 날씨 풀리면 공사 하겠다고, 아무 염려말란다. 그말에 조금 안심했다. 나는 감정이 죽끓는다. 걱정 근심에 꿈자리마저 평온하지가 않다. 스트레스도 심하다. 어찌 말로 다할수 있겠는가. 쫒아가 포악을 떨고 싶은 순간도 왜 없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잠잠히 있을수 있는 것은 순전히 가식이고 위선이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데, 너그러워서 참는게 아니다. 휴! 어쩔수가 없어서 참는것이다. 참고 싶어서 참는게 아니다. 어쩌겠는가. 내가 포악을 떨 깜량도 안되는것을. 슴기는 더 번지고 있다. 이쪽 방 장판도 곰팡이가 피고 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기도하라 하신다. 내가 할수있는 일은 없다. 애초부터 그랫다. 그럼에도 기도하지 않는것은, 기도하기전에 미리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서가 아닌가. 다 아시는 분께서 다 해결해주시리라는 믿음? 내 믿음은 그리 좋은편도 아니다. 아니, 정말 믿음이 있기는 한것일까. 주일인데, 춥다는 핑개로 온라닌 예배를 드렸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그냥 의지할 뿐이다. 다른 의뢰자를 몰라서, 내가 알고있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 한분뿐이어서. 훌륭한분, 대단한 분들이 참 많다. 굳이 비교할 필요됴 없다. 깜량대로 살면 그분이 알아서 하실테니까. 감나무 밑에서 누워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단다. 네가 나무에 올라가서 따 먹으라고. 감나무에 감이 열리고 자라고 익게 하신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걸 따서 먹는것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