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2](Hinduism)는 인도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인도, 네팔, 발리 섬의 유력종교이다. 2020년 기준으로 1,160,000,000명 (세계 인구의 15%) 이상이 믿으며 신자 수로는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이어 3위다.[3]
2. 지역[편집]
힌두교는 인도의 다수 종교이자 민족종교[5][6]이다. 인도 이외에 네팔에서도 다수 종교이다. 네팔은 2008년까지 힌두교를 국교로 삼았다. 2008년 왕정폐지 이후 국교가 더 이상 아니며, 2015년 제정된 헌법에서는 네팔을 세속국가로 규정하였다.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에도[7] 힌두교 인구가 상당하다. 발리 섬에서도 힌두교도가 많은데, 남아시아 밖에서 인도 계통의 이민자들이 아닌 원주민들이 힌두교를 믿는 유일한 사례다. 동남아시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힌두교는 앞으로도 인도 문명권의 종교로서 오랫동안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단지 해외 선교가 쉽지 않은 교리상[8] 인도와 네팔외 해외 전도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과거에는 인도 문화와 함께 동남아시아로 활발하게 전파되어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참파(베트남 남부). 필리핀 일대에서 힌두교가 상당한 세를 가졌다. 태국 국왕의 라마라는 칭호도 힌두교의 신 라마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역시 해외 전도에 부적합했는지 그 이후로 동남아시아에서는 발리 섬과 인도인 밀집지역을 제외하면 불교와 이슬람에 완전히 밀렸다. 그래도 교류 자체는 계속 이어진지라 어떠한 형태로든 힌두교 문화의 흔적 자체는 남아있기는 하다.
그 밖에도 스리랑카에도 제법 힌두교인이 많이 있으며, 피지, 가이아나, 남아공, 모리셔스[9], 수리남같이 인도인이 많이 사는 나라들도 힌두교세가 크다. 총집계는 10억 명이 넘으리라 보는데 전세계 인구의 13~14% 정도에 해당한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도 힌두교인들이 700만 명이 사는데, 이들의 신앙은 인도의 힌두교와 다른 현지화된 힌두교로 발리 힌두라 부른다. 발리 힌두의 가장 큰 특징은 카스트 제도가 없다는 점이다.[10] 이슬람 및 토속신앙에 맞춰져서 계급제도가 사라진 경우라, 인도와 네팔의 힌두교인들은 인도네시아의 힌두교를 이슬람교에서 수피교나 이바디파를 다른 종교로 보듯이 다른 종교로 여긴다.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답게 '철학적'인 면이 강한 종교 중 하나로 꼽힌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유럽과는 다른 패러다임에서 깊은 철학적 사유들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힌두교가 가장 철학적인 종교라는 의미는 아니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주류 종교 중 적지 않은 수가 철학적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는 아카데미아학파, 소요학파, 스토아학파, 근현대철학 등과 교류하며 교부 사상, 스콜라 사상, 신스콜라 사상 등으로 승화시켰고, 신약 필리피서에서 이미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를 그리스 철학의 형상(Morphē, 라틴어로는 Forma)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유대교도 지혜서에서 사추덕(현명, 정의, 절제, 용기)을 서술하여 아카데미아 학파와의 교류가 확인된다. 또한 도교는 노장 사상의 영향이 있고, 이슬람교도 철학논쟁이 대단히 활발히 진행되었다. 물론 이러한 철학적 교류는 해당 종교의 첫세대가 아닌 후대인들의 철학적 기여도 많지만, 힌두교 역시도 첫세대가 아닌 후대인들의 철학적 기여가 적지 않다. 결국 서양 지성인들이 힌두교 혹은 인도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서양 의사들이 한의학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양의학이 나름의 자극을 준다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의학은 아니듯이. 물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철학 중 하나'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시크교가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 불교와도 공통분모가 꽤 많은데, 불교가 힌두교의 신들을 호법신, 천인으로 낮추어잡는 반면, 힌두교는 부처를 비슈누의 화신 수준으로 취급하는 등 서로간에 은근히 알력이 있다. 이런 와중에도 서로의 세계관을 끌어들이려는 흔적이 역력한 것은, 두 종교 모두 서로의 위상을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 중엔 힌두교와 불교를 아예 '친족지간'으로 보는 견해도 보인다. 다만 불교는 교조 석가모니가 사마나[11] 출신인 데다가 교리의 내용 면에서도 크게 다른 점이 몇 군데 있다. 아마도 굳이 비교하자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을 것이다.[12]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아트만'에 관한 것으로, 즉, '고정불변하여 영속하는 자리가 있는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쉽게 풀어 '나의 실체가 존재하는가' 정도의 논쟁으로 받아들이면 얼추 맞다. 힌두교는 '아트만(Atman)'을 인정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반면, 불교는 '안아트만(Anatman)' 혹은 '아나타(Anatta)'라고 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안아트만(Anatman)'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그 유명한 '무아(無我)'라는 용어이며, 반대로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을 한역할 때는 '진아(眞我)'라고 함이 보통이다.
이외에도 불교는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점이라든가, 수행의 목적이나 방법[13][14], 중도사상 등에서 힌두교의 주류와 의견을 달리한다.
3. 역사[편집]
중세 시기 힌두교 전파 지도
힌두교는 불교, 이슬람, 그리스도교 세력의 지배를 모두 수백 년에 걸쳐 경험하고도 밀려나긴커녕 오히려 더더욱 교리가 체계화된 종교이자 고대부터 현대까지 몰락이나 큰 침체 없이 번성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다신교신앙이다.
덤으로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부터 쿠샨 왕조까지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이슬람은 군대를 이끌고 북서쪽에서 쳐들어와서 델리 술탄 왕조 시절부터 무굴 제국까지 사실상 북인도를 지배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대영제국에 의해 인도 제국이 세워져 전 인도 반도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 세 종교의 영향을 받고도 토착종교가 온전한 나라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힌두(Hindū)'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거대한 물'을 가리키는 단어인 '신두(Sindhu)'에서 유래했다. '거대한 물'이란 '바다'나 '큰 강'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신두'가 가리키는 '큰 강'은 바로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인더스 강이다.[15] '힌두'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바로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기록인데 이들은 '신두'라는 단어를 페르시아어 단어인 '힌두'라고 불렀다.[16] 기원전 515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샤한샤 다리우스 1세는 인더스 강 유역 일대를 정복하여 그 일대를 '힌두'라고 칭했고 그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 대에 '힌두'라는 단어는 기존의 범위인 인더스 강 유역을 넘어 동쪽으로 갠지스 강 유역 일대까지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즉 '힌두'는 곧 데칸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놓인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 일대, 나아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힌두교란 '힌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신봉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힌두교의 원형은 브라만교로 아리아 민족의 다신교가 발전한 형태였다. 참고로 고대 인도의 천공신 드야우스는 그리스의 제우스, 라틴어의 데우스, 북유럽의 초기 주신인 티르[17]와 그 어원이 같은 점에서 그 오래된 뿌리를 엿볼 수 있다.
브라만교가 발전 및 정립된 게 힌두교이다. 즉, 브라만교는 그대로 남은 게 아니라 힌두교로 진화한 것이며 또한 브라만교는 인도의 생활방식, 사회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브라만교-힌두교의 관계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의 관계와 비슷하다.
원래는 캅카스 근처에서 살며 훗날 수많은 파생언어를 남긴 고대 언어를 쓰던 유목민족이 유라시아의 서부와 동부로 진출하였는데 이들 중 인더스 강 유역에 정착한 인도아리아인의 종교가 브라만교였고, 그 경전이 베다였다. 베다에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여기에 살고 있던 적을 패배시켰다는 이야기가 자주 묘사되는데, 바로 이것들은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들이 본 인더스 문명과 그 정복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인도아리아인의 종교였던 브라만교는 이후 멸망시킨 인더스 문명의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발전을 계속하였다. 힌두교의 유력한 신격인 시바도 실제로는 인더스 문명의 토착 신이라는 학계 가설도 존재하며[18], 비슈누의 가장 중요한 화신인 크리슈나 역시 인도 토착민의 신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두 신 모두 피부가 검거나 푸르게 묘사되는 점에서 백인종인 아리아인과 전혀 다른 인종적 특징을 보인다. 카스트 제도와 같은 것은 정복민인 아리아인들이 피지배 민족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후 불교나 자이나교와 같은 종교의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4-6세기 굽타 왕조 때 교리가 확정된 이후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발전하여 현대에 이른다.[19]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전환된 것은 8세기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이 나왔을 때로 여긴다.[20] 샹카라는 대승불교의 사상을 일부 받아들여 범아일여 사상을 주창하였다. 고대 인도의 불교와 자이나교는 도회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브라만교는 농촌 사회를 중심으로 유지되었는데 불교를 지원하던 쿠샨 왕조의 멸망과 로마 제국과의 무역 쇠퇴로 도회지 상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불교는 큰 타격을 받고 브라만교 사제들은 불교, 자이나교의 영향력을 서서히 흡수하여 교리를 정비한다. 인도에서 불교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영향으로 점차 소멸했다. 형이상학적인 베단타 철학 때문에 다소 사변적으로 흐르던 힌두교는 11세기 라마누자가 나타나 신에 대한 대중신앙을 부활시켜 현재와 같은 종교로 발전했다.
7세기 이후 다신교와 상극인 유일신교 이슬람이 서쪽으로부터 전파되었고, 이들은 무력을 앞세워 인도를 장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힌두교 신앙을 유지하는 인도내 소왕국들과 종교전쟁이 빈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위로 무굴 제국과 같은 이슬람 왕조들이 인도를 지배하기도 했으나, 힌두교는 워낙 인도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동과는 달리 이슬람이 다수가 되지는 않았다. 전근대 인도 사회는 쟈티를 기반으로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였는데, 힌두교 사회구조를 해체할 경우 무슬림 정복자들 입장에서도 세금 수입이 감소할뿐더러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힘들었다.[21] 이슬람은 힌두교에 이어 인도의 제2의 종교로 남았다.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종교갈등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분리된 파키스탄으로 이주했고 반대로 파키스탄 일대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은 인도로 이주했다. 이 영향으로 인도내 이슬람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힌두교는 인도인의 절대 다수가 믿는 종교가 되었다.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아주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양쪽에 의한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 인도에서 다수가 된 힌두교는 이슬람 왕조 치하에서 당했던 것을 갚으려고 하고, 파키스탄 이슬람교인의 경우에는 힌두교가 우상숭배를 하는 데다가 아예 종교 때문에 나라가 갈라지기까지 했으니 인도에 적대적인 만큼 힌두교에도 적대적이다. 물론 영토와 종교권이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서 파키스탄 내에도 적지 않은 힌두교도가 있으며, 이에 따라 힌두교도들은 혹독하게 탄압당하고 있다. 힌두교 성직자를 살해하고 신전을 공격하는 테러가 계속되어 왔으며, 그나마 버틸만한 카라치, 라호르 등 대도시권에나 건재한 상황이다. 제도적으로도 심한 차별을 가하여 힌두교도는 혼인신고조차 받아주지 않았었다고. (2017년에 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힌두교임을 숨기고 무슬림으로 행세하며 신앙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런 혹독한 환경 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인도로 이주하는 파키스탄 힌두교도가 꾸준히 늘고 있다. 그 중에는 자식들을 인도로 유학 보내서 터를 닦게 해서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1% 정도지만, 힌두교도의 주장으로는 5%라고 한다. 다만 파키스탄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대립이나 카슈미르를 둘러싼 영토 갈등도 그렇고 인접국가인 인도와는 핵개발과 군비경쟁까지 각오할 정도로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데 비해 인도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도가 절대 다수인 다른 남아시아 국가인 네팔과는 외교적으로 사이가 나쁘진 않다. 네팔은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지 않은 먼 나라이기 때문이다.
3.1. 베다에서 푸라나로[편집]
이상에 서술한 것처럼 힌두교는 고대 또는 상고 시대의 브라만교에 기반하였지만, 특히 굽타 제국 시대 이래 작성된 수많은 문헌에 기반하여 고대 후기 내지 중세에 새로이 성립한 것이다.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차이는 거칠게 말해 '베다에서 푸라나(Purana)로'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베다 성전의 의미를 명료화하거나 쉽게 설명하기 위해[22] 브라만들이 서사와 비유를 곁들여 작성한 푸라나 문헌들이 굽타 시대와 그 이후에는 오히려 사실상 베다를 밀어내고 교리의 중심이 되었다. 베다 중심의 원-힌두교(브라만교)와 푸라나 중심의 힌두교 간 차이는 매우 크며, 간단히 정리하면 이하와 같다.[23]
베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아그니, 인드라, 소마, 미트라, 바루나 등의 신은 푸라나 시대에 오면 위상이 크게 추락하고, 베다에 언급되지 않았거나 중요하지 않았던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3대 신이[24] 새로운 3대 주신으로 등장했고 가네샤 등[25] 여러 새로운 중요 신격이 힌두 만신전에 추가되었다. 인드라는 여전히 신들의 왕이었지만 이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권위가 크게 낮아졌고, 인드라의 실질적인 권력은 사실상 모두 비슈누에게 넘어갔다.
가부장적 면모가 강한 원 베다에서는 여신들(우샤Usha, 프리트위Prithvi 등)이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게 취급되었지만, 푸라나 시대의 여러 새로운 여신들―두르가, 락슈미, 칼리, 라다(Radha) 등―은 우주적 힘과 에너지를 갖춘 존재로 신들의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주요 숭배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푸라나가 인도 내의 여러 지역 전통을 베다에 맞추어 힌두교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강력한 토착 여신들도 새로이 받아들인 것 같다.
베다가 교리의 중심이던 시대에 신은 어느 정도 추상적인 존재였지만, 푸라나의 시대에는 신의 형상이 인간과 흡사하게, 때로 인간보다 매우 강력해 보이는 모습으로 매우 다양하고 자유롭게 묘사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신의 형상을 직접 묘사하는 신상 제작이 활발해졌고, 신상은 사원과 집의 특별한 장소에 위치하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푸라나의 시대 이전에도 테라코타 등으로 만든 작은 신상은 존재했지만, '신상을 안치하기 위한 사원 건립'은 굽타 시대 이후에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신상이 대거 만들어지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 베다의 근엄한 제의와 희생제, 베다 만트라 암송 등은 비교적 생명력을 잃었고, 신상과 신상 주위를 장식하고 신상 주변에 각종 공물을 바치는 행위가 널리 퍼졌으며 각 지역의 성지로 순례를 떠나는 행위가 유행하는 등 의례의 실천 방식도 크게 변화했다. 성지 순례는 바르나에 무관하게 (불가촉천민 등 바르나 외의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고, 성지 순례 동안에는 접촉에 의한 오염이라는 전통적 금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신을 숭배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베다가 중심인 시절, 숭배자가 모든 의례를 문헌의 절차에 맞게 준수하면 신은 숭배자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믿었으으로 둘의 관계는 다소 기계적이었다. 그러나 푸라나의 시대에 숭배자는 단순히 절차를 준수하는 존재가 아니며, 적극적이고 개인적인 헌신으로 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때 숭배자는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례를 통해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게 되며, 다소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신의 후견인'과도 같은 위치에 선다. 푸라나의 시대에 숭배자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아끼고 사랑할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개인적인 선호나 가문의 결정 등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