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울여 들어주고 마음 헤아려줄 단 한 사람의 사랑 -<길버트 그레이프>
오경옥
1. 가족이라는 슬픈 운명의 공동체
일요일 오후, 교회를 다녀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장을 보고 집에 와서 물건들을 정리한 후 TV《일요시네마》를 보는 것이 꽤 오래 된 습관이다.
이번 주 영화는 가족이 무엇이며,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지를 말해주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길버트 그레이프>(1993)라는 영화로 미국 중서부 아이오아주의 ‘엔도라’라는 시골 마을의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잡무나 배달 일을 하는 길버트(조니 뎁)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 가족, 그런 가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길버트는 가장이 아닌데도 자살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그런 가족들의 돌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과 청년으로서의 아름다운 사랑과 꿈을 이루고 싶은 소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다 한 소녀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것들에 대한 새로운 삶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퀴리부인은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길버트에게 가족들은 그를 중심축으로 삶을 의지하며 희망의 가지를 뻗고 있어 이 영화의 원제인 ‘What’s Eating Gilbert Grape’를 늘 상기하게 할 정도 안타깝고 안쓰러운 존재이다. 젊었을 적에는 미모의 여인으로 마을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살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칠 년 동안 집밖을 나가본 적 없어 붙박이장처럼 소파에 앉아 아이들이 해준 밥과 간식을 먹거나 TV만 보곤 해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고래처럼 거구가 되어버렸고, 이제 열여덟 살이 된 남동생 어니는 지적장애아로 틈만 나면 나무나 가스탱크처럼 높고 위험한 곳을 올라가려는 버릇이 있어서 늘 데리고 다니며 돌봐야만 한다. 이렇게 가족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서인지 성격은 밝고 명랑하며 늘 웃음을 잃지 않아 미워할 수 없는 존재이다. 서른네 살 큰누나인 에이미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지만 어머니의 손길처럼 야무지지 못해 집안 곳곳에는 먼지가 앉아있고 욕실에는 빨래들이 나뒹굴고 곰팡이가 피었다. 막내여동생인 열여섯 살 엘렌은 트럼펫을 잘 불지만 사춘기여서인지 외모에만 관심이 있고 불만이 많아 길버트를 도와주지 않아 힘들게 하곤 한다.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이’라고 허버트 조지 웰스는 말했는데 길버트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에 집을 떠날 수도 없고 도시로 나가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할 수도 없어 마을의 울타리 안에서 집과 가게만을 오가며 고달픈 인생을 살아간다.
그 지루한 일상과 유약한 마음을 비집고 동네에서 보험대리점을 운영하는 캔 카버 부인이 물리치지 힘든 유혹으로 다가와 불륜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만큼 길버트가 마음을 풀어놓고 의지할 곳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위로와 편안함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그들의 적절치 못한 관계를 캔 카버가 눈치 챈 듯 길버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듯 불안하게 옥죄어오곤 한다. 그때, 할머니와 캠핑을 다니다가 캠핑카가 고장이 나서 그 마을에 머물게 된 베키가 길버트가 일하는 식료품 가게에 물건을 구입하러 오게 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 찰나 캔 카버가 익사를 하게 되고 길버트와 베키가 가까워진 것을 안 카버 부인은 그 마을을 떠나게 되어 그들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일하는 곳까지 다 큰 남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힘겹게 일하는 길버트를 따뜻한 눈빛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주고 그 심정을 헤아려주는 베키, 그래서 여자친구는 아니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힘을 주는 존재인가 보다. 물을 무서워하는 어니에게 물이 결코 무섭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도 하고 항상 가족만을 챙겨야 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에 익숙한 길버트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뭐야?”하고 물어봐주며 길버트 가슴 안 깊숙한 곳에 밀어 넣어둔 가족들로 인해 생긴 내면의 상처와 젊은 청춘으로서 하고 싶은 내적 열망들을 밖으로 표출하도록 도와주며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여준다. 그리하여 길버트는 ‘가족들이 새집에서 살았으면 좋겠고, 어니에게 새로운 머리를 줬으면 좋겠고, 그런 어니를 위해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슴 안에 쌓아두기만 했던 축적된 감정과 이야기들을 베키에게 다 풀어놓음으로써 길버트는 짐 같기만 한 어니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긍정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몸이 코끼리만 해서 항상 부끄럽게 생각한 엄마를 이젠 용기를 내어 베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사실 그런 베키도 겉은 밝고 자유분방하며 자신감 있는 모습이지만 그녀도 부모의 이혼으로 내면의 아픈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산처럼 너그럽고 인자한 할머니가 있어서인지 그녀는 그늘 없이 자신감 있게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2. 부모 된 자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깝고 불편했던 진실은 엄마의 트라우마와 그로인한 자포자기식의 무기력한 삶의 모습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사라지듯 자살을 해버렸기 때문에 엄마에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의 유명한 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버지의 사망(객사)의 충격으로 간질병까지 생겼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무책임하게 죽은 남편도 문제이지만 부모라면 아니 엄마라면 며칠을 앓아 누었다가도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더 강하고 씩씩하게 일어서며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스탕달이 한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란 스승이자 나를 키워준 사람이며 사회라는 거센 파도로 나아가기에 앞서 그 모든 풍파를 막아주는 방패막 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정신적인 큰 충격을 받으면 스스로 삶의 고난을 이겨내기가 힘든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인지 어떻게 자식들이 넷이나 되는데 집안일마저도 하지도 않고 아이들이 해준 밥과 간식만을 먹으며 거구가 되도록 몸을 부풀리며 동물적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지적장애아도 돌보지도 않고 일하러 다니는 아들에게 그 아이를 돌보게 하며 일을 하게 한단 말인가. 물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소설이었고 영화였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작가는 그런 엄마를 각성시키는 사건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니로 인해 발생하게 한다. 어느 날도 가게에서 일하는데 어니가 아파트 높이의 가스탱크 위에 올라가서 보안관이 참다못해 구속하려고 유치장에 가두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칠 년 동안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엄마가 용기를 내어 그 큰 몸집을 뒤뚱거리며 파출소를 향해 ‘내 아들 내 놓으라’며 어니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다 보게 되고 마치 동물원의 코끼리를 본 것처럼 희희낙락하며 거대한 엄마의 모습을 비웃고 조롱하며 심지어는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까지 있게 된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 거구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삶을 후회하게 되고 자신의 트라우마로 길버트와 자식들에게 너무도 무거운 짊을 짊어지게 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런데 깨닫는 과정에서 더 충격을 받은 것일까. 그 다음날 엄마는 간신히 올라간 2층의 침대에서 잠든 채 죽게 되고 크레인을 불러서 장례를 치러야 할 것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남매들은 사용할 만한 짐들을 밖으로 꺼내놓고 동네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전에 엄마가 깊이 잠든 집을, 그리고 아버지가 자살했던 아픈 기억들을 함께 지우고자 그 집에 불을 질러 엄마를 화장 한다. 엄마의 죽음으로 큰누나는 새로운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고 엘렌은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고, 길버트는 동생 어니를 데리고 캠핑족인 베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위해 길을 떠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3.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마음 헤아려줄 단 한 사람의 사랑
토니 험프리스 라는 심리 상담가는 『가족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스위스의 내과의사 겸 정신의학자인 폴 트루니에 박사가 한 말을 인용했다. ‘자기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고 진실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상대를 찾고 싶은 인간의 무한한 욕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이다.
이 영화에서 길버트가 베티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하루종일 피곤하게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도 행복하거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는 길버트, 집에 돌아와서 어니를 목욕시켜야 하고 어니가 잠을 자야만 마음을 놓고 잠을 잘 수 있으며, 늘 엄마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큰누나를 도와야 한다. 아직 전정만리 같은 싱그러운 청춘인데 가족들에게 저당 잡혀 집밖에서나 집안에서나 한시도 마음 편하게 지내보지 못한 것 같아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너무도 안타깝고 안쓰럽기만 하다. J·G 홀런드는 ‘사람은 집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진다’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 길버트에게 눈빛을 마주하고 가슴안의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아버지의 자살과 그런 아버지의 역할까지 떠 않은 힘겨운 어깨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해주고, 누구에게도 풀어놓지 못한 삶의 무겁고 슬픈 마음을 내려놓으며 아픈 상처를 다독여주는 가슴 따뜻한 사랑을 지닌 단 한 사람의 베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이며 그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고, 그런 가족을 위해 힘들고 고달픈 일이지만 참고 견디며 극복해가는 것 아닐까. 슬프고 가슴 아픈 기억들과 무겁게 억압했던 현실적인 상황들을 죽은 엄마를 화장하는 불길 속으로 다 태워버리고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어니에게 좋은 형 노릇하면서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베키와 행복하게 잘 살아가길 기도해본다.
2018. 청사초롱 제 29 집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