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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문학>2020, 봄호 계간평
생명의 존엄과 敬畏感
野城 이도현
(한국시조협회 고문)
금년 봄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지구를 온통 소용돌이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세계보건기구에서 팬데믹(세계대유행)을 선언할 만큼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좌절과 불안의 늪으로 빠지게 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렇듯 나약했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감염이 저렇듯 무서웠던가? 그러나 국민 모두가 바이러스 감염 방역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이 위기를 극복,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번 바이러스 감염 사태의 심각성을 목격하면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잠시 지나가는 환상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가 백지 한 장 차이임을 실감하면서 생명의 존엄과 경외감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절실한 화두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겸손하게 살자. 살아있음에 하루하루를 감사하고 기쁘게 누리자. 매사를 긍정하고, 생명의 존엄과 경외를 노래하자. 시조문학 봄 호에도 이러한 건강한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먼저 소시집에 실린 김사균 시인의 작품을 보자. 수록된 단시조 28편 모두가 하나같이 명품이다. 그중 봄을 노래한 ‘춘경’ ‘봄비’ 두 편을 뽑았다. 그의 시작 노트를 보자.
“시인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것에 개성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작품화 하여야 한다. <중략> 비록 생명이 없는 한낱 돌덩이라 할지라도 그것에서 구도하는 ‘묵언의 성자’를 찾아내고 회오리에 휘둘려서 한천을 방황하는 가랑잎에서 겨울새의 ‘신이 내린 춤’을 발견하며 소복한 모습으로 피어있는 목련꽃잎에서 ‘청상의 하얀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다. <후략>
볕살도 살이 올라 장독대에 고인 한 낮
솜병아리 서너 놈이 봄을 문 채 조올고
황매는 달음질로 와 남창에 앉음이여.
-김사균의 <춘경>전문
단시조 <춘경>전문이다. 봄의 소재 볕살, 솜병아리, 황매를 올려, 따스하고 정겨운 봄의 정경을 가만가만 활유(蛞蝓)시켜 생동감을 준다. 정중동(靜中動)의 봄날의 지경을 묘사한 솜씨가 일품이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 정물화이듯 아니 풍경화이듯 멈춘 듯 살아 움직이는 그림 한 폭을 본다.
겨울을 이겨낸 뜰에 꽃씨가 내립니다
꽃씨는 움이 터서 빠알간 사랑이 되고
사랑은 열매를 빚어 푸른 시로 섭니다.
-김사균의 <봄비>전문
시인은 언어의 꼬리 잇기를 통하여 작품 한 편을 이루었다. 겨울을 이겨낸 뜰에 꽃씨가 내리고, 그 꽃씨는 움이 터서 빠알간 사랑이 되고, 또한 그 사랑은 열매를 빚어 푸른 시로 환치되고 점층 된다.
이 작품 속엔 빨강, 파랑 색깔을 칠한 옷을 입혀 작품을 감각화 하고, 사랑이란 관념어를 푸른 시로 형상화(形象化) 한 솜씨가 시의 격(格)을 한층 끌어올려 수준 높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시 또한 살아서 생동감을 준다.
이러한 시적 자질과 기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의 시작 노트에서처럼 한낱 돌덩이에서 ‘묵언의 성자’를 찾아내고, 가랑잎에서 ‘신이 내린 춤’을 발견하며, 목련꽃잎에서 ‘청상의 하얀 슬픔’을 발견하는 창의적인 시안(詩眼)과 작품을 빚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깊은 외로움에서
늪으로 허덕이다
어느 날 문을 여니
사방에 봄 햇살이
다시금 찾아온 봄볕
마음을 다스리리.
혼자서 흔적 안고
허망한 길을 걷다
흐르는 눈물 속에
연지 같은 봄꽃들이
아픔은 이제 털고서
꽃들을 마주하리.
기다리는 이 없는
황량한 도시에서
겨울 지난 가지에
짙푸른 새잎들이
잊을 건 잊어버리고
맑은 날을 맞으리.
-김태자의 <일어나리라>전문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김 시인은 “먹기 싫은 나이만 자꾸 쌓인다.”고 푸념이다. 수록된 21편 다수가 고독, 나이, 노년기. 불면의 밤, 부유(蜉蝣), 상실 등 노년을 달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좌절은 없다. 희망을 갖고 여생을 멋지게 건강하게 누려야 한다. 돌아다보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부푼 꿈을 꾸며 살아 온 자랑스러운 지난날이 있었지 않았는가. 멋지게 인생 말년을 누려야 한다.
금년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나라 안팎이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이 모든 아픔도 지나가리라. 화자는 황량한 도시 속에서 꽃들을 마주하며 희망을 찾는다. 다시금 찾아 온 봄볕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잊을 건 잊어버리고 맑은 날을 맞으리라는 반전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아니요 고목에서도 꽃피고 열매 맺어 새 울음 흐드러진 봄은 필경 오리라.
백두대간 타고 온 마고할미 지혜로
천왕봉에 앉아서 남해로 눈길 들어
무릉을 쏟아 펼치니 꽃피는 고향이네
백제 때 한다사군 진주부는 하동읍
동쪽에는 경상도 서쪽에는 전라도
맨 처음 국립공원에 기화요초 신령하네
섬진강 얽힌 전설 쌍계천 모래 안고
쇠북 울려 말 달리면 찻잔 속에 님 얼굴
솔향기 대바람소리 혼령도 되살리네
평사리 ‘토지’낳아 두꺼운 강을 찾고
망덕포구 유산은 찾아보는 명소된
장엄한 남도의 숨터, 미래 여는 강토여.
-고성일의 <하동>전문
고성일 시인의 <하동>전문이다.
시인은 지금 장엄한 남도의 숨터 하동(河東)에서 사방을 조망하고 있다. 하동은 동으로 진주와 사천시, 북으로 산청, 함양을 바라보며 남원시와 접하고 남으로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지역으로 하동벚꽃 십리길이 이어지고, 쌍계사와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 참판 댁, 화개장터는 대표적 관광지로 이름이 나 있는 지역이다.
하동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전설까지 조명하면서 특히 셋째 수에선 쇠북을 울리며 말달리던 임의 얼굴 혼령도 되살린다 하였고, 마지막 수에선 평사리가 그 유명한 소설 ‘토지’를 낳았다고 감격한다.
고성일의 언어는 거침없이 활달하게 문장을 전개하여 시조의 경(境)을 열고 있다. 맨 끝수 중장 ‘명소된’을 ‘명소되어’로 고치면 어떨까? 이때에 종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양을 지키던 성
다 헤진 허리띤가
치욕의 숨 고르며
이어 온 한 오백년
장대의 큰 호령소리
겹처마에 걸렸구나
쌓인 돌 하나하나
한을 굴려 새겼는가
소명은 빛바래어
장대 끝에 펄럭이고
일장산 하늘 닿은 숲
지난 세월 달래다.
-김명호의 <산성에 올라>전문-수어장대 오름길에
김명호 시인은 지금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오름길에 섰다.
수어장대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휘관이 올라서서 지휘하던 높은 전망대를 말한다.
문헌에 의하면 인조 14년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45일간의 청나라 태종과의 싸움 곧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신, 강화가 함락 되고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치욕적인 항복을 한다.
화자는 산성을 답사하면서 당시의 처절했던 전황을 떠올려 시조 한 편을 읊는다. 한양을 지키던 성은 다 헤진 허리띠요, 당시 치욕의 숨을 고르며 이어 온 한 맺힌 오백년 장군의 호령소리는 처마에 걸렸구나. 쌓인 돌 하나하나엔 한이 서리고 장군의 소명은 빛이 바랜 채 장대 끝에 펄럭이누나! 일장산 하늘 닿은 숲은 지난 아픈 세월을 달래는가. 외적으로부터 짓밟힌 역사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이 부끄러움을 어이할까?
국력을 키워야 주변 국가들이 넘보지 못한다. 조선 오백년 얼마나 많은 외침 속에 우리 선조들은 수모를 당했는가? 나라가 튼튼해야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노래한다.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수십 년 지난 세월 반갑다 손잡아도
잘 사나 나눈 인사 길어야 일 이 분쯤
젊음은 다 어디가고 초로(初老)의 행색이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 진다
흔히들 말하지만 사는 게 뭔지 몰라
알고도 자주 못 봄은 애달픈 마음일세.
-문병설의 <한 순간>전문
인생이 무엇인지 정답을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수명이 길어져 보통은 80이요, 길면 90세라. 그러기에 영원한 세상에 비하여 짧은 우리네 인생을 초로(草露)인생이라 않는가.
문 시인은 초로(初老)의 연치에 들었나 보다. 초로(初老)의 연치는 아직 청춘이다. 그런데 화자는 젊음은 다 어디가고 초로의 행색이냐고 묻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알면서 자주 못 보는 우리네 삶을 애달파 하고 있다. 한 순간 만났다 헤어지는 초로인생! 순간순간 감사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값진 삶인가. 그 의미를 천착할 일이다.
내 안의 세상의 봄 가득히 들어차고
화분과 꽃다발이 무색한 앞뜰 뒤뜰
향긋한 오솔길 따라 추억 속을 거닐다
꽃 피는 춘삼월엔 마음속 향기 따라
화려한 꽃잎처럼 가슴이 흔들리고
어쩌랴! 돈 안 드는 사치에 흠뻑 빠진 이 봄을!
-박선희의 <흔들리는 여심>전문
박선희 시인의 <흔들리는 여심>이다.
시인은 지금 화창한 새봄을 내 안에 가득 담고 꽃피는 춘삼월을 만끽하고 있다.
누가 이토록 아름답고 오묘한 자연을 주었는가? 하느님은 참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앞뜰 뒤뜰이 온통 화분과 꽃다발로 가득하다.
‘정원에 한가득 물을 주듯 오늘도 감사한 마음과 시를 사랑하는 정원사 마음으로 물조리개를 들고 서 있다.’고 시작노트에서 말한다.
화자는 지금 꽃에 취해 꽃잎처럼 가슴이 흔들리고 있다. 어쩌랴! 돈 안 드는 사치에 흠뻑 빠진 이 봄을 어쩌랴!
조그만 밭 한 뙈기 포슬한 흙 일구어
솔향기 섞어가며 이랑이랑 모종한다
산등성 연두 물결도 농부 따라 나선다
시원한 빗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나
물먹은 솔바람은 더디게 넘어오고
단비를 기다리는 맘 바위처럼 무겁겠지
하지 지난 감자밭은 서너 포기 남아있고
열매 없는 토마토는 바닥을 기고 있다
오가는 발걸음들도 애당긴 눈길이다.
-박효석의 <초보농부>전문
박효석 시인은 귀농(歸農)을 했나보다. 조그만 밭뙈기를 일구어 이랑이랑 모종을 한다.
비가 제때에 오지 안 했는가? 초보 농부라 기술이 없나보다. 하지 지난 감자밭은 서너 포기뿐이고 토마토는 실한 열매도 없이 줄기만 바닥을 기고 있다. 그러기에 오가는 사람들은 애가 당기는 눈길로 밭을 본다.
농사일처럼 정직한 것이 없다고 한다. 첫술에 배부른 사람 보았는가. 초보농부가 그만하면 반쯤은 성공한 것을, 내년부터는 좀 부족했던 점을 보충하면 실한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다.
거드름 진눈깨비
꼬지꼬지 내려도
휘나리 바짝 말려
군불 지핀 아랫목
시린 발 깊게 데밀면 잠들 만큼 따습다.
다 형제 발들 모여
띠앗 장난 펼치면
왁자글 웃는 소리
정 넘치게 만들어
출가한 뒷날까지도 걸음 잣게 해 주다.
-성동제의 <아랫목 정분>
성동제 시인은 옛 온돌방 아랫목을 회상한다.
옛날 겨울철엔 군불을 때야만 겨울밤을 지낼 수 있었다. 당시엔 핵가족으로 나뉘지 않고 여러 형제들이 한집에 살았다. 군불을 지핀 따스한 아랫목 이불속엔 형제들 발이 모여 체온을 높인다. 오순도순 정이 오가고 사랑이 익어갔다. 출가한 누이도 정을 못 잊어 잦은걸음으로 찾아오곤 하였다.
이 작품에선 ‘꼬지꼬지’:빈틈이 없이 매우 빽빽한 모양, ‘휘나리’:덜 마른 장작, ‘띠앗’:형제자매 사이에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 등 우리말 고유어를 사용하여 고아한 맛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시작노트에서 “맨드리 곱디곱게 애만져 가꾸리라. 우리네 고유어로 가멸차게 쓰겠다. 사전에 갇혀 있는 새틋하고 앙증맞은 숱한 언어들을 들추어 햇귀 보게 하련다. 그래서 더더욱 도사린 다작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덧짐이며 들온말에 대한 오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미친데기가 되어 냅뜰 뚝심 쏟겠다.”고 말한다. 순수한 우리말인데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시인은 우리 고유어, 토착어에 대한 애정과 연구가 깊다. 마침 국내 유수의 일간지에서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고자 자료를 모으는 중이다. 좋은 자료와 정보를 공유하여 풍족한 우리말 사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쁨과 슬픔을
저울에 달아보자
슬픔 쪽이 기울면
웃음이 사라지고
기쁨 쪽 기울어지면 행복이 손짓하지
조금만 더 많아도
기우는 저울 보며
행-불행 모두 다
마음먹기 달렸으니
작아도 행복 쪽에다 올려놓고 볼 일이다.
-이근구의 <삶>전문-저울의 속삭임
이근구 원로시인의 <삶>전문이다. ‘저울의 속삭임’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시인은 지금 기쁨과 슬픔을 저울에 달고 있다. 저울이 슬픔 쪽으로 기울면 웃음이 사라지고, 기쁨 쪽으로 기울면 행복이 손짓한다 하고, 행-불행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작아도 행복 쪽에 올려놓고 살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다. 화자의 생각처럼 여생을 기쁘게 살아야 한다. 긍정하고, 감사하고, 기쁘게 살면 행복이 온다.
기쁨과 슬픔을 저울에 단다는 발상이 놀랍다. 시인의 시작노트 또한 놀라운 한편의 작품이다.
“팔십령 일곱째 구비, 꿈은 봄빛이지만 몸은 피할 수 없는 만추의 고목이다. 고목도 꿈은 살아 잎 달고 꽃도 피우고 싶어 한다. 시조는 나의 동행이요, 취미요, 지팡이처럼 내 노년을 지탱해주니 참으로 고맙다. 그래서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내 꿈의 실타래를 풀어 생각의 수를 놓는다.”
노시인의 건승건필을 기원해 드린다.
장에 갔다 오시는 노을 걸친 아버지
사공을 부르는 소리 갈잎만 흔들리고
나룻배 기척이 없어 폴짝 뛰는 짱뚱어
구멍 숭숭 강바람은 도시로 쓸려가고
도깨비불을 들고 갈대밭 헤쳐가면
한가득 털게를 잡아 까맣게 웃던 엄니.
-임동석의 <영산강>전문
영산강은 전남 담양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빠져나가는 호남권 대표가 되는 강이다. 이곳저곳 여러 골짜기의 물을 모아 민중의 애환을 실어 나르는 강이다.
첫수에서는 저녁나절 장에 갔다 돌아오시는 아버지가 사공을 부름에 나룻배는 기척이 없고 짱뚱어만 뛴다 하고, 둘째 수에선 구멍 숭숭 뚫린 강바람이 도시로 쓸려가고 도깨비불을 들고 갈대밭 헤쳐가면 한가득 털게를 잡아 까맣게 웃던 엄니를 떠올린다.
구구절절 실감실정(實感實情)의 극치를 이룬다. 이렇듯 구체적인 묘사가 살아 있어 생동감을 준다.
영산강의 삶의 현장, 나지막하게 흐르는 서민의 애환을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시던 모습을 스크린이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처럼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 눈시울이 시큰해 오는 대목이다.
다음에는 봄 시조단의 작품을 보자.
면도날 꼭 쥔 파도 천년만년 깎고 있다
모난 돌 모난 마음 다 버린 오늘 아침
차르르 빛 빛 구슬을 바닷가에 쏟는다.
-김승재의 <몽돌>전문
김승재 시인의 단시조 <몽돌>이다
개울이나 해변에서 오랜 세월 물결에 씻겨 귀가 닳은 돌이 몽돌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면 물결에 씻겨 둥근 돌이 되었을까?
그러기에 화자는 면도날을 꼭 쥔 파도가 돌을 천년만년 깎고 있다고 하고, 그래서 모난 돌 모난 마음을 다 버린 오늘 아침에 빛으로 헹군 구슬을 차르르 바닷가에 쏟는다고 한다.
면도날로 천년만년 깎고 깎아서 만들어진 몽돌이 마음을 다 버린 오늘 아침에 차르르 빛나는 구슬이 되었다. 가편이다. 잘 다듬어진 함축된 작품이다.
여기서 종장 첫구 ‘차르르’는 천금보다 값진 언어의 보배다.
끓이는 찻물 위로 소슬한 바람 불어
마냥 보고 있어도 시리도록 좋은 하늘
황토길 노래 한 소절 여민 옷깃 흩날려.
계곡을 타내려간 끝자락 슬픈 벼랑
낙엽이 한 잎 지듯 계절이 흘러가고
초연한 그 목소리에 붉게 물든 이 가을.
엊그제 푸르렀던 들판을 바라보며
과녁은 어디인가 활시위 떠난 세월
밭두렁 익은 호박처럼 비워가며 살란다.
잉걸불 타오르는 깊은 밤 적막에서
풀잎 끝 이슬방울 야위어진 얼굴보고
찬 서리 짙어가는 단풍 사는 일을 접는다.
-김토배의 <가을 적벽부>전문
김토배 시인의 <가을 적벽부> 네 수로 된 연시조(連時調)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북송 말기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를 연상케 한다. 소동파는 필화사건으로 멀리 황저우에 유배되어 적벽강에 배를 띄우고 술잔을 기울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 말년의 허무를 노래했다.
그러나 김 시인은 황토길에서 붉게 물든 가을을 노래하며 여민 옷깃을 날린다. 엊그제 푸르렀던 들판을 바라보며 과녁은 어디인가 활시위 떠난 젊은 세월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제 화자는 늦가을의 중심에 서서 밭두렁 익은 호박처럼 비우며 살고자 한다. 나지막한 밭두렁에서 자연스럽게 익어가는 호박처럼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로 자기를 비워가며 살고자 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속으로 빠진다.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화자는 <가을 적벽부>에서 결코 쓸쓸하지 않은 만추의 노래를 독백하듯 부르고 있다.
신조처럼 읊조리던 그 혼백에서 맞네
한마디 말 없어도 임의 손길 다정하오
우러러 당신을 보니 내 조국이 보입니다.
낯선 땅 이국에서 장한 꿈 접으시고
민족혼 깨우시고 충절을 키우셨네
내 조국 위해서라면 그렇게 외치시며
한 점 부끄럼도 치욕이라 하시었소
겨레의 핏줄 속에 심기운 당신의 혼
털어도 한 점 흠 없기를 하냥다짐 합니다.
-류준식의 <‘서시’ 앞에서>전문-용정중학교
류준식 시인은 지금 만주 길림성 용성에 있는 용정중하교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1917~1945)의 대표작 ‘序詩’를 새긴 시비 앞에 서 있다.
윤동주 시인은 이곳 북간도에서 출생, 일제 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이었다. 그의 유고시집에 수록된 <서시>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으로 하늘, 바람, 별의 천체적(天體的) 이미지를 조응하여 윤동주 시의 절정을 이룬다.
류시인은 서시를 감상하면서 시인 윤동주의 애국혼을 기리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원하는 그의 기독교적 삶과 신념을 찬양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서시>의 한 대목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를 인용한 류준식 시인은 <서시 앞에서> 머리를 숙인 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뒷동산 무덤가에 등 굽은 할미꽃을
눈 안에 그리면서 할머니를 불러본다
밤마다 들려주시던
자장가를 새기며
지워진 시간 속에 흔적을 되살리며
뒤돌아 갈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려 본다
땀 냄새 배어나오던
할머니의 큰 사랑
실개천 버들치를 손으로 잡으면서
갈매골 하늘 위에 무지개를 그렸었지
아련한 추억이 되어
떠오르는 그리움
-박근모의 <그리움>전문
사람은 그리움 때문에 사는가 보다. 아니 그리움은 지울 수 없는 영원한 향수인가 보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그리움은 쌓여만 간다.
박근모 시인은 뒷동산 무덤가에 혼자서 등 굽은 할미꽃을 보며 밤마다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자장가를 떠올린다.
먼먼 지워진 시간 속을 되살려 땀 냄새 흥건히 배인 할머니의 큰 사랑을 그려본다.
마을 실개천에서 버들치를 잡으면서 갈매골 하늘 위에 무지개를 그렸던 아련한 추억을 그리워한다.
박 시인은 뒷동산 할미꽃을 할머니로 환치하면서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다. 할머니는 손주를 사랑하는 사랑의 아이콘이요, 우리 모두의 사랑의 화신이다.
꿈 세상 헤맸지만 달라진 게 없으며
꿈 깬 뒤 살펴보니 내 있는 방 그대론데
공연히 땀이 나도록 끌려 다닌 바보라네
꿈속의 한세상은 신선놀음 였지만
그쪽세상 이쪽세상 둘 아닌 줄 알고 보니
그 실상 허무맹랑한 꿈 허상일 뿐이더라.
-박상문의 <꿈 세상은 헛것>전문
꿈 세상은 무엇일까? 꿈을 많이 가졌던 젊은 시절이 아니었을까?
박상문 시인은 그 시절을 돌아다보면서 공연히 땀만 쏟은 바보였다고 후회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속이 없는 허무맹랑한 꿈은 허상(虛像)일 뿐이라고 쓸쓸해 한다.
그렇다. 실상이 없는 꿈은 허상일 뿐이다. 그러기에 솔로몬왕도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 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였다.
꿈 세상은 헛것이니 그것이 아닌 지혜로운 삶, 창조적인 미래를 여는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새벽길 재촉하여 산 정상 올라서서
저 멀리 바다 끝에 소망을 던져놓고
원단(元旦)의 눈부신 기적 일어날까 설렌다
뜨거운 저 불씨를 가슴에 담았으니
얼마나 아팠으랴 그리도 출렁이더니
드디어 시뻘건 불을 토해내고 있구나
가슴팍 차오르는 물결을 헤치고서
유유히 떠오르는 생명의 화신이여
사람들 환호에 실어 소망들을 쏟아낸다.
-이명순의 <해돋이>전문
이명순 시인은 새벽길을 재촉하여 산 정상에 올라 파도를 가르고 솟아 오르는 태양을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첫수에서는 일출 직전의 기다리는 설레임을, 둘째 수에선 불을 토해내고 있는 일출의 모습을 셋째 수에선 사람들이 소망을 쏟아내는 환호성을 차례대로 표현한다.
해돋이 광경은 장엄하여 많은 시인들이 예부터 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중 조종현 시인의 ‘의상대 해돋이’는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된바 그 감회가 새롭다.
조종현은 일출의 광경을 ‘불덩이가 솟는 구나/가슴이 용솟음친다’ 하였고, 이명순은 ‘드디어 시뻘건 불을 토해내고 있구나’ 하였으니 예와 이제, 시대가 다를 뿐, 보는 눈과 표현의 솜씨는 하나 같으니 어인 일일까?
산성을 감고 도는 아리수 긴 허리는
출렁이는 물결 따라 펼쳐진 행주치마
도도히 흐르는 역사 천년 꿈이 서려있네
-이윤제의 <행주산성>전문
이윤제 시인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을 답사한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왜군을 대파한 곳으로 당시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을 벌여 적에게 큰 치명을 입혀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전한다.
화자는 산성을 감고 도는 아리수(한강의 옛 이름), 출렁이는 물결 따라 펼쳐진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적을 물리친 빛나는 역사, 전승(戰勝)의 흔적들을 조망하면서 감격하고 있다.
팽나무 그늘에서 늙은이들 모여 앉아
살아 온 이야기들 시나브로 흘리는데
자석들 맨 등에 지고 발광했던 나는 싫어.
새끼들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때는
추운 줄도 모르고 그 새벽을 달렸는데
다 키워 보내고 나니 껍데기만 버석거려
손가락 발가락은 제 맘대로 돌아가고
구멍 나서 덜컹대는 생의 마디 하냥 골골
돈 벌러 타던 기차를 돈 쓰려고 이젠 타네.
-조경순의 <새벽기차>전문
조경순 시인은 늙은이들이 모여 앉아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는 현장을 취재하듯 귀담아 듣고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작품 한편을 완성한다.
자식들 등에 지고,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가르치며 발광 했었지. 추운 줄도 모르고 새벽열차에 몸을 싣고 새벽을 달렸지. 이제 다 키우고 나니 내 몸은 껍데기만 버석거리고 구멍 나서 덜컹대는 생의 마디가 하냥 골골댄단다. 이젠 남은 돈 모두 털어 마음 놓고 쓰자는 이야기다.
충청도 사투리, 언어 구사가 구수하고, 사건 전개가 마치 어느 단편소설을 구성하듯 재미있게 짜여 지고 있다. 대화하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전이, 묘사하여 생동감을 주는 가작이다.
청춘은 간데없고 백발만 늘었구나
세월은 나를 안고 고집만 키웠던가
용기는 등 뒤에 숨고 세치 혀만 바빠지네
오간다 말도 없이 나이만 던져놓고
휘어져 멀어진 길 미련만 뒹구는 듯
그립고 아쉬워한들 다시 못 올 시절이여
하늘은 높디높고 대지는 넓고 넓다
아련한 옛 추억은 바람에 흩어지네
못다 한 지난 일 들은 허공 속을 맴돈다.
-최동운의 <한 살 더>전문
우리나라 시조의 처음은 고려 말 우탁선생의 탄로가(歎老歌)로부터 시작한다. 늙음에 대한 탄식은 예와 이제가 같은가 보다.
최동운 시인은 한 살 더 먹으니 청춘은 간 데 없고 백발만 늘고, 용기는 등 뒤에 숨고 세치 혀만 바빠지고 아련한 옛 추억은 허공 속을 맴돈다고 한다. 늙어가는 것은 아쉽고 허전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 자연의 섭리(攝理)가 아닌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가을 가지에서 익어가는 과일처럼 우리도 익어가자.
참고 산 설움인가 문풍지 앓는 소리
제 몸을 못 가누는 낡은 창문 절로 열려
시린 손 이마를 짚고 가다서는 새벽달.
-홍진기의 <이심전심>전문
석가(釋迦)는 어느 날 제자들을 모아놓고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많은 제자 중 가섭만이 이를 알고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비법이다. 진리란 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한다는 의미이다.
홍진기 시인은 말년의 삶을 ‘시린 손 이마를 짚고 가다서는 새벽달’에 환치(換置)한다. 참고 산 설움, 문풍지 앓는 소리와 제 몸을 가누지 못해 절로 열리는 낡은 창문, 시린 손 이마를 짚는 새벽달과 같은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시를 빚고 있다. 누가 황혼녘을 말하랴? 낙엽 한 장을 보면 가을이 온 줄을 안다.
다음엔 단시조 특집에 오른 작품을 보자.
예쁘게 앉은 자리 너의 모습 자비일레
산 마음 그 깊이에 일월 또한 사람일레
청징한 너의 자태에 눈을 감는 유혹일레
-강기주의 <난아>전문
강기주 시인은 난꽃 한 송이에 흠뻑 취해 있다. 예쁘게 앉아 있는 네 모습이 부처님이요. 산 마음 그 깊이를 아는 사람이요, 청징(淸澄)-맑고 깨끗한-자태가 유혹을 한다고 병치은유(倂置隱喩)하고 있다.
한 촉의 난이 자비요, 사람이요, 유혹이라고 모양새를 바꾸어 변용한다. 곧 병치은유(倂置隱喩)의 기법, 고도의 수사법이다.
또한 각 장(章)의 어미를 ‘~일레’로 반복하여 감탄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묘한 가락을 자아내고 있다.
천하의 칭기즈칸은 성(城)을 짓지 않았다.
생애를 다 마치고 봉분도 안 남겼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집 한 채가 소망인데.
-강세화의 <집>전문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한때 세계를 제패한 영웅이다. 그가 “성(城)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는 명언(名言)을 남겼듯이 천하의 칭기즈칸이 ‘성을 짓지 않고 봉분도 남기지 않았다’는 일화를 인용하여 강세화 시인은 시조 한 수를 창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집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난리를 편다. 집은 나그네가 잠시 쉬었다 가는 거처가 아닌가? 대조가 되는 두 생각이다.
수목원에 들렸더니 익숙한 향기 하나
많은 꽃 중에서도 금방 눈에 띄는 것이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 말보다 진해서.
-박봉주의 <구절초>전문
구절초(九折草)는 가을 들국화를 대표하는 꽃이다.
박봉주 시인은 수목원에 들러 가을 꽃 중의 꽃 구절초에 깜짝 놀란다. 꽃말,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 말보다 향기에 흠뻑 취했기 때문이다.
구절초는 약재로 쓰이는 식물로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아홉 마디가 생기는데 이때에 채취하여 약으로 쓰면 약효가 월등히 높다는 유래에서 구절초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 작품 종장에서 어순(語順)을 바꾸어 3, 5, 4, 3의 자수율(字數律)을 지킨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가락과 의미를 반전(反轉)시켜 종장의 미를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시인은 대전의 가람문학회를 이끌며 시조창작 외에도 뛰어난 유머와 위트 그리고 웃음치료 강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상 시조문학 봄호를 빛내준 작품들을 일별하였다.
생명의 봄을 생동감 있게 예찬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뛰어 넘어 꽃밭에서 꽃에 취해 흔들리는 여심을 본다. 자연과 계절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찬미한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위대한 선현의 발자취를 추억하고 묵념도 한다. 그런가 하면 쓸쓸한 인생 황혼녘을 ‘일어나리라’ 반전시키는 희망찬 의지도 있다. 시를 만드는 고차원의 기법, 은유나 상징으로 구성한 작품이 돋보이는가 하면, 옛날 군불 때던 아랫목 정분을 떠올려 가족 사랑을 회상하고 그것을 순수한 우리 고유어, 토착어를 구사하여 이룬 작품이 다시 떠오른다. 문학은 왜 하는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기쁘게 그리고 보람 있게 살기위해서다. 그것이 생명의 존엄과 경외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