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기 연습
추석이 다가온다.
칠십 대의 마지막 생일도 지났다.
친구가 권장한 ‘신달자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머리에 스치는 새로운 결단이 일었다. 다름 아닌 버리고 떠나기 작전이다.
작가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나는 열 평쯤 되는 작은 한옥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도 많이 버리고 보냈는데도 집에는 여전히 무언가로 가득하다. 집이 작아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도 뭔가를 더 비워 내야 하는 걸까. 작은 돌 하나를 가지고 생각한다. 이 작은 돌 하나, 어깨에 걸친 조끼 하나를 가지고도 골백번 줄까 말까를 고민했던 나의 소유욕과 이기심은 내 작은 집까지 따라왔다. 누가 말했다. 3년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가차 없이 버리라고. 그러나 내게는 10년 묵은 살림도 적지 않다. 버리는 것에는 너무나 많은 의지가 필요하다. 오죽하면 나는 잘 버리는 사람이 잘 산다는 책도 읽었다.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홀로 잔인하게 버려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둘이서 버리는 작업을 하면 실패한다는 것이다. "왜 이걸 버려?"라고 하면 누구라도 버리기 쉽지 않다는 것, 옷걸이도 장롱 속도 헐렁한 만큼 복 들어온다고도 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조금 독해지기도 했지만 결국 나의 본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많이도 이별했으나 이 작은 집에 가져온 몇 가지 물건들은 과연 꼭 필요한 것들인지 나는 생각한다. ‘그래, 이것도 반드시 내가 지녀야 할 것은 아닌지도 몰라.’ 그러면서 작은 조각 하나, 이스라엘에서 사 온 두 개의 촛대, 그리고 아직 사용하지 않고 언젠가 가득 채우리라는 생각을 하는 예쁜 공책들, 십자가, 성모님, 성경책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눈감을 때 함께 가야 할 것들인가 하고 나를 바라보게 된다.
아직은 작은 집이 불편하고 몸에 딱 붙지 않지만 서로 잘 사귀면서 정을 붙이려 한다. 나는 마음을 비웠어. 나는 헐렁하게 살 거야. 말은 그렇게 했는데도 마음은 언제나 경계에서 괴로워하는 나를 다스려야 한다.
아침 햇살이 한지 창문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날 깨우면 나는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 괴로울 것도 없었다. 물건들, 그게 무엇이었겠는가. 사라진 것들은 그립지 않다. 아깝지도 않다. 지금 그리운 것은 내 앞에 있는 열 평의 집이고 나와 함께 사는 몇 가지 물건들이다. 물을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하는 식탁이 그저 고맙다. 그러니 괴로워할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꼭 버려야 할 물건은 내 이기심과 소유욕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빨리 마음을 비우는 사람이겠는가. 내가 마음을 비웠다고 조오현 무산 설악 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공일당'이 라는 당호를 지어 주셨다.
“마음을 비운다며… ”
그래서 그렇게 지으셨다는 말씀 끝에 나의 이기심이 발딱 숨을 쉬며 급하게 일어섰다. ‘다 비우면 안 되는데’하는 두려움이 불쑥 솟았다. 내 대답이 걸작이었다.
“스님, 다 비우면 다시 가득 차겠죠?”
날 쳐다보시는 스님의 얼굴이 복잡했다.
공일당에 닿으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스님의 공심에 가까이 가기도 나는 멀었다. 그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PP. 212-215)
그뿐인가 나의 절친 김 교장도 버리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닌 것을 토로한 바 있다.
집안 사정에 따라 서울로 이거 해야 할 처지. 집을 내놓고, 살림을 추슬러 자녀들이 옮기고, 종국에는 본인이 직접 자신의 책상 서랍을 정리하면서 버릴까 말까, 지금? 아니면 나중에? 쓰레기 봉지에 넣었다 뺐다, 중요한 기록인데 남길까 없앨까, 애라! 애라! 아니야 아니야…
서랍 정리하느라 꼬박 하루가 걸렸다니, 버리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
‘언젠가는 쓸모없는 내 소유물을 조금씩 덜어내 보자’는 결심이 확고하게 선 것은 아내와 함께 가구점을 들러서 집안의 구닥다리 보관함을 비우고 필요 최소한 남길 작은 서장을 하나를 점 찍었을 때였다.
배송 예약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관장을 해체하려다 보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장 안에 비치된 도서, 사진첩, 이불, 옷가지, 생애 기록물, 기념품(각종 패 등), 디지털 기기, 각종 메모지…
이를 어쩌나?
그보다 더 어려운 작업은 보관함을 해체하는 일이다. 폭이 깊은 장롱 두 개를 이었으니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니고 두 양주가 이를 움직인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서장은 준비되었고 비우기 연습은 시작되었으니.
우선 물건들을 옮기고 보관장을 들어내 보기로 했다. 방은 비좁고 물건들은 즐비하고. 거실이며 안방이며 건넌방 할 것 없이 분산되니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고 물건 하나하나 내겐 필요했지만 남길만한 것은 별로다.
서장이 들어왔다.
이제 본격적인 버리기 연습에 돌입.
먼저 도서정리.
책은 내 사무실에 보관되어 본가에는 몇 권 안 되지만 최근에 읽은 책, 외부 강연에 쓰일 참고 도서, 그간 출판했던 도서 모음, 보관된 누대의 족보(전질, 세덕록, 파보, 문중 족보 등)…
사실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이를 어찌 버릴 수 있나.
도서는 그대로 서장에 보관되었다.
문제는 잡다한 문서들과 사진들이다. 잡다한 문서는 내 사무실에 대부분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여행 기록물이나 개인 기록물은 여기에 있다. 기록물을 버리기는 이르다. 그래 사진을 정리하자. 아이들의 졸업앨범, 옛날 사진기로 찍은 사진 묶음, 사진 앨범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사진 처리는 아내 담당이다. 요리조리 뒤적이며 정리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 나름 행복했던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 두고 봐야지. 어떻게 무엇을 얼마나 버릴 수 있을지
아내는 오래된 이불이며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다. 솜이불만 해도 결혼할 때 친정 어머님이 손수 목화를 재배하여 정성껏 만들어 주셨다며 애지중지 모셔왔는데 이를 버린다면 큰 불효로 여기고 있고 나도 동감이다. 그래서 54년간 보관 중이다. 버릴까 말까. 그래, 솜은 남기자. 잡동사니 옷가지나 사용하지 않는 이불은 버린다.
버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괘종시계만 해도 그렇다. 추는 움직이지만 시침은 이미 멈추었고 건전지를 바꿔 끼워도 제대로 가지를 않는다. 이도 24년간 놓인 물건이다. 버리잔다. 프린터는 어떤가. 성능 제로. 버리자. 버리자면 이를 부숴서 재활용 분류를 하고 포대에 담아낸다. 시계도 그렇지만 작은 프린터도 해체가 쉽지 않다.
문서를 정리하면서 버릴까 말까, 넣었다 놓았다, 어차피 버릴 건데 왜 이리 미련이 많을까. 망설이는 시간이 흘렀다. 아내가 빈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과감히 버리세요.” 정말 과감히 버렸다. 그래도 남았다. 이런 미련을 어이하랴.
그래도 오늘은 많이 버렸다.
(202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