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46-56절 마리아의 찬가
여러분들의 염려와 기도 덕분으로 양영선 집사님이 일하고 계시는 곳을 잘 다녀왔습니다. 양영선 님께서 손수 차를 빌리셔서 덕분에 북한 땅을 마주보는 압록강 철교와 일제시대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분들이 몸소 고초를 당하셨던 뤼순감옥까지 다녀올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여행 기간에 양집사님이 아시는 김밥장사를 하시는 조선족 젊은 처자가 함께 하셨는데 근성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첫째날 저녁에 식사를 함께 하는데 야외이기도 하고 그래서 오광식 집사님께서 한곡을 쭈욱 뽑으시고는 그 조선족 처자에게 노래를 시켰어요. 다른 사람 핸드폰은 다 안되니까 양집사님 핸드폰으로 mr반주를 넣는다고 노래를 찾아서 노래따라 몇소절을 불렀는데 하필이면 틀은 노래가 미리듣기 30초였던 거예요. 30초 만에 노래가 끊긴거예요.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회원 가입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배터리가 방전이 돼요. 그쯤 되면 우리는 아쉽지만 포기합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가게 주인집 핸드폰을 빌려와서 다시 노래반주를 넣어요. 근데 딱 아까 끊긴 그 지점에서 전화가 오는 거예요. 전화기를 들고 음식점 주인에게 달려가죠. 상황을 잘 보십시오. 생전 처음보는 처자가 술 한잔 걸치고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중국 노래 하나 들려달라고 하니 미리듣기로 끊어지고, 배터리가 방전되서 끊어지고 전화와서 끊어지고 근데요 포기를 않하더라구요. 끝내 제가 핸드폰을 로밍해갔거든요. 제 핸드폰으로 결국은 노래를 부르시더라구요.
근데 이것뿐만이 아니예요. 몇분의 조선족 분들을 만났는데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 끝까지 기죽지 않고 자기 이유를 설명해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에게는 매우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건데 가만히보면 싸가지가 없는가 아니라 정당한 소통을 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예요. 그 근성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복에 이어서 아홉 번째 복으로 넣고 싶더라구요. “너희 하느님 나라를 위해 악착같은 근성을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언젠가는 일을 낼 것이요.” 이런 근성들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소수민족인 조선족들이 한족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부모세대의 모습을 보고 배웠을까요? 절대지지 않는 대륙의 기질일까요?어찌했던 그 문화안에서 보고 배운 거겠죠.
이번에 중국가서 크게 느낀 것 중의 하나가 말이 안통해서 느끼는 답답함을 이렇게 심하게 느껴본 적이 없어요. 중국어를 못알아 듣고 영어를 써서 귀뚱으로도 듣지 않으니까 소통이 안돼요. 그래서 선택한 게 만국공통어 바디랭귀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해야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보면 우리의 얼굴표정, 손짓, 발짓 등의 모든 행동 표현들은 우리의 또 다른 언어들입니다. 때로는 말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주면서 살아요.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기독교 교육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작은 교회들이 인력이 부족하고 그러니까 작은 교회들 아이들 모아서 아동부, 학생부 만들어서 가르치는 데가 있는데 교육 내용에 저도 충분히 관여하면서 우리도 결합해서 같이 만들어 가보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사실은 처음에 좀 솔깃했어요. 교육비 얼마 보내고 아이들 교육 맡겨 버리면 쉽고 편하잖아요. 그런데 교육이라는 게 교재를 놓고 뭔가를 가르치는 거라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그런데 교육이라는게, 그것도 기독교 교육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면서 이안에서 보고 느끼고 관계하고 사람을 대하는 표정하나 하나 그 모든 게 교육이잖아요. 특히 교회에서 우리가 함께 배우고 가르쳐야할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세상은 따뜻하고 세상은 하느님 품이고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게 기독교 교육의 목적 아닐까요?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이 다 반대했어요. <교육을 외주하지 말자. 힘들도 어려워도 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키우도록 하자> 우리의 아이들인데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돌보고 가르쳐야죠. 결국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사랑인데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해 주겠습니까?
제가 종종 말씀드렸지만 저도 초등학교 때 선생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저에게 수업시간에 가르친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는 게 없어요. 제 기억에 남는 건 그 선생님이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 가정 방문을 꼭 하셨어요. 그리고 도시락 안싸우는 애들과 꼭 밥을 같이 드셨어요. 한 학기 내내 학급 7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 피리부터 실로폰 캐스터네치 멜로디온 해서 악기 하나씩 다 가르쳐서는 합주부를 만들었구요. 때때로 실과시간에 음식을 함께 만들었던 기억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매우 재미있었고 매우 신났어요. 지금도 선생님과 함께 놀았던 그리고 아이들 하나하나를 대하셨던 그 느낌만 떠올라요. 우리가 특별히 뭘 안 가르쳐도 이안에서 함께 놀고 먹고 서로를 대하고 챙겨주고 들어주고 웃어주고 즐겁게 노는 그 모든 것이 교육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에 보면 지극한 저항성이 나타납니다. 주의 팔로 권능을 행하사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 노래입니다. 예수님께서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 마리아는 위아래를 뒤집어엎는 혁명을 꿈꿨습니다. 그런 세상을 노래했고 기도했고 살았습니다. 예수님 보시면 율법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법을 지키는 검사와 맞짱뜨고 사회의 중심축을 5%가 아닌 95%를 위한 사회를 꿈꾸면서 저항하고 사셨는데 그 모든 것을 어디에서 배웠겠습니까?.
우리가 함께 하는 행사, 서로를 대하는 태도, 오고 가면서 나누는 대화 표정하나 눈빛 하나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아이들은 배웁니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면 신기하게 내 아이도 그분을 싫어합니다. 내가 지극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환대하면 아이들도 똑같이 좋아하고 환대합니다. 기림이가 어릴 때 학기가 끝나면 어른 학생들에게 하는 인사가 뭔지 아세요? <페이퍼 잘 끝내셨어요?>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통해 배우고 모든 것을 통해 영향을 주고 모든 것을 통해 가르칩니다.
가을에 동아리 모임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신앙적 필요도 채우는 모임도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책모임이나 그림 그리기나 자기 표현을 하는 모임 같은 것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게 신나게 노는 게 어떤 거냐를 보여주는 모임도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양육하는 모임도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오후 순서를 하고 있으면 많은 경우 아이들이 소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운동도 하고 야구도 하고 하는 그런 모임도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상상력으로 신앙과 마음과 관계를 풍성하게 살찌게 하는 좋은 모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일 중심보다는 만남이 깊어지고 그 깊어지는 만남이 서로의 신앙을 살찌게 하는 그런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이 땅에 소풍 온 우리가 교회 안에 갇혀 하느님만 찬양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온 생명과 평화와 사랑의 에너지를 활성화시켜 서로의 어려움들을 함께 극복하고 더 큰 사랑과 더 큰 기쁨의 세계로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과 평화, 사랑의 에너지가 활성화된 가운데서 아이들은 그 모든 것을 삶을 통해 배우며 자랍니다.
바울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들을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지켜 주실 것이니 우리가 가진 귀한 생명의 에너지를 마음껏 활성화시킬 것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가을에는 더 깊은 사랑에서 하나되는 우리 모두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