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나이 고희 넘겨 ‘사람아… ’ 출간
김남조 시인.
1927년 9월 26일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 후쿠오카시로 유학하여 규슈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48년 <연합신문>에 시 <잔상(殘像)>, <서울대학교 시보>에 시 <성수(星宿)>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경상남도 마산시로 피난하여 성지여자고등학교와 마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3년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대학교·성균관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등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55년 숙명여자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58년에는 조교수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1961년 부교수로 승진하였고, 1964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981년 가톨릭문인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84년에는 한국시인협회 회장, 교육개혁심의회 위원이 되었다. 1986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1987년 방송위원회 위원, 1988년 한국방송공사 이사 등을 역임하고, 1990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선출되었다. 1991년 서강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1993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여 명예교수가 되었다.
2000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에 취임하였고, 2020년에는 등단 71년차인 93세의 나이에 마지막 시집을 발간했다. 대표작 '겨울바다'가 2020 수능특강 문학편과 2023 수능완성 국어에 수록되었다.
2023년 10월 10일 오전 향년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보통 사람
김남조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