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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우리詩》2017년 상반기 추천 신인상 당선작 및 수상소감-장정순
삭朔
바다가 산 위에 올라 달을 삼켰다
산이 바다에 내려가 달을 토했다
본시 둥근 달이 빛을 잃자
바다는 까맣게 몰락하고
조개가 검은 진주를 토해
달 대신 바다에 걸었다
달은 여전히 둥글지만 아무도
검은 진주를 달로 여기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빛나지 않는 것은 삭은 것이라고
달은 바다 밑 대륙붕에도 떠서
검푸른 바다의 전설을 캐고 있다가
달마다 은밀히 여자를 찾아와
생명의 빛을 뿌리고 간다
빛 속에서 나온 바다벌레가
여자의 몸속에서 자라나고
벌레의 꼬리에서는 숲이 태어난다
매월 초하루 산에 오르는 저 까만 달은
여자의 바다에서 태어났다
여자는 달의 기운으로 바다를 품고
생명의 바다에서는 창조가 이어진다
기울어 까만 달은 삭은 것이 아니라
채울 날을 위해 잠시 비운 것
바다에서 떠오를 준비를 마치면
서서히 태양을 향해 나아가
온몸 가득 빛으로 채우고
드디어 온 누리의 밤 신이 된다
여자의 몸은 바다였다가 달이었다가
종국에는 대지가 된다
숨비
제주섬 한라 봉우리는 허리 굽혀 바다를 줍고
달빛은 파도를 밀어 육지 소식 줍는데
뭍에 간 아들 소식은 바다 깊이 잠겼는가
할망 한숨 소리에 성산 봉우리가 업혔는가
휘영청 굽은 어깨에 망사리 걸쳐 메고
야윈 가슴엔 테왁 하나
둥글려온 목숨처럼 끌어안은 채
할망은 바다로 간다
숨 하나 오롯하니 너울에 몸 싣고
상괭이 따라 깊은 자맥질 한 번에
숨 한 번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휘효오 휘효오 휘요오 휘요오
바다처럼 파아란 할망 얼굴 위로
날숨에 묻어나는 당피리 소리 섧구나
영혼 실어 너울에 춤추는 할망
꿈은 뭍에 두고 자맥질만 파도에 넌다
철들기 전부터 바다와 놀던
만첩해당 꽃잎 같은 성님
보름달 같은 섬 하나 건져
망사리 늘어지게 담아 올리자더니
숨비소리 흥겨워 갈매기와 춤추다가
파도가 되어버린 성님 생각
건져 올린 망사리엔 눈물만 가득하고
석양빛인지 미역 줄기인지
할망 발걸음으로 감겨든다
풍경
바다에는
물고기로 변한 날개가 있다
날개에는 아비가 만들어준 비늘이
원죄처럼 붙어있을 뿐
운명은 하늘에서 멀어져
바다만이 우주가 되고 꿈이 된다
바람 세차게 불어도 좋은 날
날개가 비늘을 곧추세우고
붉은 산호초 사이를 날면
은빛 갈매기도 파도를 가른다
밀랍에 쌓인 날개가
금기를 어기고 바다로 향하던 날
불가사리는 산호초 위에서 꽃처럼 웃고
물고기는 비어飛魚가 되었다지
높이 솟아 바람에 실으면
하늘이나 바다나 어느새 한 몸
별은 바다를 유영하는 윤슬
광활한 활주로를 달리는 비어 뒤로
물수제비 덩달아 하늘 길 난다
고래의 몸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태초의 바다로 돌아가 산란을 하려는지
산란은 비상을 낳아 바다에서 기르고
비상은 하늘 향한 인간의 욕망을 낳지
모든 비행은 원초적인 것
오늘도 끊임없이 하늘 오르며
억겁에 간직해 온 은빛 꿈꾸는
바다에는
풍경으로 변한 날개가 산다
달과 고무신
흰 고무신 한 켤레 사들고 오른 낯익은 산 중턱
봉긋 달처럼 솟은 묏등에서 삭발식이 한창이다
요란한 기계음에 묻어나는 아버지의 고단한 얼굴
추석을 사흘 앞둔 툇마루 아래
아무렇게나 엎어진 검정 고무신 한 짝에는
무거운 하루를 수레에 담아 끌며
골목을 누볐을 아버지의 질펀한 수고가
달빛에 엉겨 있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살아요
잔망스런 여식의 빳빳한 눈물 자국에
얘야 나는 아직도 세상이 무섭구나
학도병 시절 어깨에 앉은 검푸른 별 하나
아버지 시선 따라 하늘로 올랐다
수레 위에 양은 솥뚜껑 같은 달이
둥글게 걸려 멋쩍게 내려다보던 밤에도
빈손으로 터덜터덜 끌려오는 고무신에서는
땀으로 찌든 하루가 찌그덩찌그덩
붉게 녹슨 눈물을 삭이고 있었다
구월의 스산한 바람은 뚫린 문종이 들추고
여름내 야윈 몸 감싸던 홑치마
시든 코스모스 꽃잎처럼 너덜대는데
다가올 삭풍 걱정에 잠을 내어 준
아버지의 노곤한 눈동자에 얹힌 달이 붉었다
마악 이발을 마친 아버지 묏등
까실까실 잘 깎인 턱수염 어루만지다가
흰 고무신 아버지 앞에 내려놓고
돌아서는 발자국에 오소소 낙엽이 몰리더니
노랗게 차오르는 달 하나 아버지 곁에 눕는다
복숭
고즈넉한 숲길 야생 복숭 밭에
한여름 푸른 잎 사이로 초록의 복숭아
알알이 다산의 축제가 한창이다
산새도 솟소리리 종종대며 합주하는데
비탈에 떨어진 복숭 한 알
터진 상처 사이로 신물이 배이고
몸서리에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스무 살에 시집가서 처음 가진 아이
개복숭 익어가는 산비탈 옆으로
너른 보리밭 노랑노랑 물들 무렵
품앗이 서툰 낫질로 보리 베던 날
휘몰아친 태풍에 홀연 낙과해버린
첫아이 울음소리 철마다 맺히고
불어 오른 젖가슴 울혈로 욱신거렸다지
팔순이 넘어서도 잊지 못하는 복숭 하나
여름밤 설익은 복숭 물에 오스스 돋는 추억
당선 소감
가로등도 없이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걸었습니다. 더듬더듬 딛는 발걸음이 늘 불안했습니다. 외지고 낯선 곳에서, 두려웠던 날이 더 그리도 허전하고 그리운지 모르고 살았던 날들, 이제 돋보기 안에서 조금씩 보입니다.
책에만 있고 읽기만 하는 것인 줄 알았던 시였습니다. 머리 아프게 분석해야 하는 것으로만 대했던 시였습니다. 시가 사람의 가슴을 이리도 뜨겁게 하는 것인 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시를 만나고 삶이 열정적으로 변했습니다. 때로는 글자들과 심하게 다투기도 하지만, 그것많았던 삶에서, 하현달 같은 시 하나 붙잡고 웃습니다. 점점 퇴화하는 시력을 붙들고 지새운 밤들, 남의 옷을 입은 듯 헐렁했던 삶들, 무엇이 조차도 흥분으로 다가옵니다.
관념의 제국에 돌을 던진 니체는 무슨 배짱이었을까요? 저는 그이에게서 시인의 자세를 봅니다. 틀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 늘 새로운 눈으로 가슴을 여는 사람, 창조를 향해 굽히지 않고 걷는 사람이 시인 아니겠는지요.
밤새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뛰노는 아이들
신났구나
플라스틱 미끄럼틀 쳐다도 안 보고
마른 잔디 동그마니 뭉쳐있는
낮은 더미 위에서 미끄럼 타며
꺄르륵 꺅꺅
그리도 재미있구나
인공 구조물보다
풀 더미에 앉은 눈이 더 좋은
네 마음이 신인 게지
신나는 세상
귀신 신神이 아니라
순우리말 신, 신명, 신바람 나는 세상
네 마음처럼 순수하고
맑은 세상을 그린다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걷겠습니다. 신명나는 시를 쓸 수 있게 많이 배우고 다듬겠습니다. 오염된 세상만 보던 눈을 깨끗이 씻고, 사랑의 돋보기를 쓰겠습니다. 탁해진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겠습니다. 우리詩회가 둥근 보름달이 되고 가로등이 되어 저를 인도해 주셨으니, 질정叱正의 약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어둠도 보고 밝음도 보겠습니다.
진정으로 고맙습니다.
약력) 충남 연기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국어, 독서, 글쓰기, 논술 지도
현재, 《한국번역가협회》 (번역강좌) 우리말 강사
<우리詩 신인추천 심사평>
바다였다가 달이었다가 풍경으로 흔들리는 시인
오늘 새벽에 많은 눈이 내렸다. 세상의 더러움과 오욕칠정을 모조리 덮어버리는 순백의 폭설 앞에 사람은 말을 잊는다. 아무 말 없이 포근한 대자연의 침묵 앞에서 가만히 오체투지, 엎드려 경배하는 수밖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설국의 정체는 무엇이던가? 과연 저 설국처럼 감동 깊은 詩는 어디에 있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본다. 맑은 울림으로 메아리치는 잔잔한 그늘이 있으면 좋겠다.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울림,
득음의 경지를 넘나드는 ‘어울림’의 그늘들, 일파만파로 번지는 비 갠 날의 무지개인 듯 씨줄 날줄 봉합의 흔적도 없이 정밀하게 직조되는, 솔가지를 땐 아궁이에서 내뿜는 시원스럽게 뻗은 굴뚝에서 판소리 가락처럼 술술 풀려나오는,
푸른 허공을 멀리 밀었다 당겼다 그네 타는 춘향이 같은,
다 읽고 나서 가만히 눈감고 한동안 먹먹해져서 그 심상에 나를 통째로 맡겨버릴 수밖에 없는, 기나긴 설한풍 견디고 피어난 한 떨기 난초나 매화 같은 향기….
우선 장정순의 시세계를 일별해 본다. 주로 존재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주조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가난한 이웃들의 삶에 대하여 천착하는 ‘연민’의 시풍을 자아내고 있다. 주변 사물에 대하여 겨울 햇살 같은 깊고 낮으막한 응시를 통하여, 시의 행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사물의 침묵 속에서 발견하는 비의들을 넉넉한 언어로써 주무를 줄 안다.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길항하는 은근한 사태에 대하여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내밀한 상처를 위무하고 있다.
평생 학도병 시절 참화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셨던 아버지 그 낡아빠진 ‘고무신’의 삶에 대하여, 낙과한 복숭아 나무 같은 어머니에 대한 회상에 잠기는 모습은 왠지 쓸쓸하고 적막하다.
장정순 시의 궁극적 지향점은 어디일까? 다분히 신화나 전설에 천착하고 있는 시풍을 보이는 듯하다. ‘몸의 몽상’이나 ‘달빛의 시학’이라고나 할까,
신비로운 우주와 여인의 몸 사이에서 빚어지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샤먼처럼 풀어낼 줄 안다. 때로는 바다가 풍경이 되고 지느러미 윤슬이 되는 이카루스의 잃어버린 날개의 꿈을 묘파하기도 한다.
“달마다 은밀히 여자를 찾아와/ 생명의 빛을 뿌리고 간다/ 빛 속에서 나온 바다벌레가/ 여자의 몸속에서 자라나고/ 벌레의 꼬리에서는 숲이 태어난다” (「삭」 부분)
“밀랍에 쌓인 날개가/ 금기를 어기고 바다로 향하던 날/ 불가사리는 산호초 위에서 꽃처럼 웃고/ 물고기는 비어飛魚가 되었다지” (「풍경」 부분)
이제 우리는 “바다였다가 달이었다가 대지가 되는” 시인을 만나게 되나 보다. 그녀의 시적 아우라는 허공과 바다를 품고 드넓은 대지와 더불어 아득한 신화를 시의 현장으로 불러내어 한바탕 신바람으로 풀어내고 있다.
‘달 고무신’을 신고 훨훨 신명나는 춤을 추다가 천지신명 앞에 가만히 무릎 꿇을 줄 아는, 먼 시원과 현대를 아우르고 아득한 미래까지 투시할 줄 아는 시안을 기대해도 좋으리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의 진경에 온전히 자신을 불사를 수 있는 그런 시마詩魔의 불꽃 춤이 기다려진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詩의 새벽을 활짝 여는 ‘눈이 맑은 새’의 소임을 다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물의 ‘떨림’과 ‘울림’을 ‘어울림’으로 승화하여 감동의 진폭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밝은 상상력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꼭꼭 숨어있는 서정을 유감없이 풀어놓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임보, 홍해리, 나병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