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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이나 늦어버렸다.
그녀는 지나치리만큼 경직된 자세로 미동도 않고 앉아있다.
투명한 유리잔 속에 담겨있는 잔잔한 물마냥 어색한 정적이 주위를 더욱 가라 앉히고있었다.
흡사 대출 심사를 기다리는, 신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고객 같은 모습으로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이다.
-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이상하게 늦어버렸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나설 준비를 했는데도 말이야.
- 괜찮아요. 읽을 책을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긴 했지만...
딱히 시간을 다투는 인생은 아니거든..
스스로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여서인지는 모르지만 미소 짓는다.
재미있는 표현인가?
시간을 다투는 인생... 그래, 어차피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녀도 나도.
- 어떻게 지냈어?
- 그냥 똑같아요. 학원엘 나가고, 가끔씩 수영장엘 가고..
- 수영은 어디에서 해? 나도 수영을 꽤 좋아하는데 말이야..
- 이번주엔 종로에서 했어요. 뭐 특별히 정해놓고 다니는곳은 없어요.
나 이래뵈도 수영을 꽤 잘한다구요.
1.5킬로미터씩 해요. 한번 가면.
1.5 킬로미터라.. 25미터 풀을 30번 왕복해야하는 거리다. 한강쯤은 우습게 왕복하겠군.
만약 서울에 엄청난 홍수가나서 63빌딩이 반쯤 잠기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는 살아남을 것 같다.
물속에서 살아 숨쉬고, 일하고, 식사를 하고, 사랑을 하고...
그녀는 신인류의 원조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처럼.
가만, 그럼 아담은? 아무래도 수영 선수 중에서 골라야하지 않을까...?
- 1.5 킬로미터를 연속으로 해?
- 물론, 쉬지 않고.
- 대단하군. 정말. 바다거북과 시합해도 되겠어.
- 바다거북? 왜 하필 바다거북이죠?
무신 말인지 이해를 못한다.
당연하다. 불과 몇해전에 개봉한 ‘친구’란 영화를 봤을 리가 없으니...
그녀의 손등에 기다란 상처가 나있다.
지난번에는 없었던걸로 봐서, 최근에 생긴 상처 인듯한데 무엇엔가 긁힌 듯도 하다.
상처는 쵸콜렛빛을 띤 약간 굵고 긴 모양을 하고 있으며, 거의 아물어가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오래전에 생긴듯한데, 일주일은 더 되었음직하다...
가만,,, 그녀를 만난지 정확히 일주일 만이니, 혹시 지난번에도 있었던 상처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한눈에 들어오는 손등의 상처 자국을 못봤을리가 없다.
- 손등은 왜 그랬어?
- 손등요? 아.. 이거...
음... 싸웠어요. 17 대 1. 엄청난 깡패들이랑.
하지만, 재미없는 유머엔 진지함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 저런, 싸움질에 소질이 있는 모양이군. 17명을 상대한 흔적이 겨우 손등의 상처라니.
소리를 내어서 웃는다.
그녀의 유머엔 내가 웃지않았지만, 나의 진지함엔 그녀가 웃어버렸다.
아.이.러.니.
- 상처이긴 하지만, 색깔은 이뻐.
초콜렛 빛같기도 하고, 립스틱 색깔 같기도해..
- 상처의 색이 이뻐요?
남자들이 모두 당신 같다면 세상 여자들은 화장대신 온 몸에 상처를 내고 다녀야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군... 상처가 이쁘단말은 이상했다... 하지만 정말 이쁜 색이다.
- 긁혔어요. 지난번 당신을 만난 그날.
옛날 앨범을 뒤적이다 모서리에 긁혔지 뭐예요.
이런것도... 추억에 상처받은 셈이되나요?
- 저런, 지나친 비약이야.
- 농담이에요.
- 물론 그렇겠지.
왜 갑자기 옛날 앨범을 뒤적일 생각을 했을까?
그날 각자의 추억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을까? 그녀와 내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나는... 지난 추억따위 누구에겐가 얘기하는걸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다.
...
이미 다 지난버린 일들이니까.
- 저기.. 궁금한게 있는데...
- 물어봐.
- 누군가를 몇시간쯤 기약없이 기다려본적 있어요? 특히 여자를...?
- 물론이지. 난 서른 살이 훨씬 넘었다구.
- 가장 오래 기다린건 얼마나?
- 두, 세시간쯤...
- 그 여자... 약속장소에 나오질 않았군요?
- 어떻게 알지 그걸?
- 이런, 당연하잖아요. 나타날 사람 같았으면, 상대를 두세시간씩이나 기다리게 할 리가 없잖아...
- 그런가,,, 그럴수도 있겠군,,,
정말 그랬다. 나타난 사람치고 1시간 이상은 기다려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결국, 오랜 기다림 따윈 대부분 헛된 일이었다.
- 독일있을때... 밴드를 했었어요.
건반 겸 보컬이었죠.
독일엔 그런 아마츄어 벤드가 무척 많아요.
독일 사람들... 노래는 잘 못하는 대신 악기 다루는건 보편화 되어있거든요...
- 그래서 보컬이었군..
- 흠... 꼭 이런식으로 말을 한다니깐...
- 농담이야. 어떻게 밴드를 시작하게 되었지?
상처 얘기에서 누군가를 기다린 얘기로.
왜 그런 걸 물어봤는지 따윈 설명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이번엔 뜬금없이 밴드 얘기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일상의 대화란 기승전결(起承轉結) 따위를 완전히 무시해도 전혀 문제될것이 없다는 것이 장점일테니...
원하는 만큼 무의미 할 수 있고, 지나칠만큼 감각적일 수도 있으며, 한없이 가벼울 수도 있거니와, 원한다면 마음대로 흘려버릴 수도 있다.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일상의 부유(浮遊)함에 대해서.
- 학교에 맴버를 구하는 벽보가 붙었었어요. 그냥 무작정 찾아갔죠.
어릴때 피아노를 배웠었구, 노래도 제법 하거든요. 믿을지 모르지만.
- 믿어. 믿지않을 이유가 없잖아.
- 수많은 밴드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밴드는 기존에 나와있는 곡들을 연주해요.
이런 밴드들을 Cover 밴드라고 부르죠. 알아요?
우린 사실 Cover밴드는 아니었어요.
자신의 곡을 만들고 연주를 하는거죠.
- 한국과는 다른걸?
여기에선 실력이 출중한 밴드들만 자신들의 곡을 만들고 연주한다구.
순수 아마츄어들은 대부분 기존의 곡들을 연주하지.
곡을 만드는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여하튼... 계속해봐.
- 맴버는 건반, 드럼, 베이스 이렇게 달랑 세명이었지만.. 그래도 우린 꽤 인기 있었어요.
뭐, 보컬이 생소한 동양 여자란게 그 사람들 호기심을 자극한면도 있었겠지만...
- 밴드 이름이 뭐였지?
대답을 하려다말고 또 다시 한참을 웃는다. 오늘은 내 유머가 지나치게 작용하는걸까...?
- 일전에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때... ArtBox라는 문구점에 들른적이 있었어요.
그때 본 캐랙터였는데... 재미있는 디자인이었어요. ‘파자마 시스터즈’ 라는..
그후 독일로 돌아가서 밴드 이름을 정하는데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나더라구요.
결국, 그게 우리 밴드의 이름이 되고말았죠.
재미있지 않아요? ‘파자마시스터즈’.
물론, 밴드 맴버가 나만 제외하곤 모두 남자였지만... 상관없이 ‘시스터즈’였어요.
- 그럼 결국 한국의 캐랙터를 독일에 심고온 셈이군.. 일종의 국위 선양을 한거야.
‘파자마 시스터즈’... 사실 밴드 이름으론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비치보이즈라던가... Guns&Roses라든가.. 이런것들이 밴드 이름으론 더 그럴싸하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름인건 확실하다. 게다가 국위선양 까지...
‘파자마 시스터즈’에서 건반을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그녀를 상상해본다.
노래는.. 음.. BeeGees의 Holiday로 하자.
그리 크지않은 내부의 한면은 무대이고 나머지면은 검은 벽을 따라 Bar가 늘어서있다.
손님은 대부분 2명. 이상하리만치 꼭 2명씩이다.
자욱한 담배연기가 마치 준비된 효과마냥 밴드와 객석사이의 현실감을 모호하게 흐려놓는다.
맴버는 단 세명. 건반겸 보컬인 그녀와 베이스와 드럼.
그녀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_ 물론, 독일어다 _ 연주가 시작되고, 그녀의 감은 눈과 마이크를 잡은 흰 손가락 사이에서 이제 막 찰나의 휴일이 시작된다.
목소리는 의외로 아주 낮고 그녀에 의해 불리워지는 Holiday는 마치 Blues 같은 느낌을 준다.
생소한 동양 여자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에 매료된걸까?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낮고 무거우며 우울한, 한없이 흑백에 가까운 푸른빛 목소리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사람들의 몸에 쌓인다....
- 무슨 생각해요?
내 상상 속에서 아주 잠시 존재했던 독일 어느 작은 Bar는 그렇게 그녀의 작은 한마디에 영영 사라져버렸다.
이미지는 늘 바로 직전까지 다가오지만 한번도 실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 늘 그랬다. 손을 뻗어보기도 전에.
- 당신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봤어. 어떤 모습일까...
- 내 목소리 어땠어요? 연주는 잘 하던가요?
- 훌륭했어. 무라카미류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한없이 흑백에 가까운 블루’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는걸...
- 거짓말... 내가 노래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적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한없이 흑백에 가까운 블루’같은지 알죠?
- 어쩔 수 없잖아. 현실 속에서 보여주기 전에는 난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나름대로 상상하는 수밖에... 하지만 현실보다 더 리얼했다구.
당신이 노래하던 모습부터 음악에 빠져있던 사람들 표정까지 다 기억할 수 있어. 마시던 맥주 맛 까지도 아직 혀끝에 남아있는걸...
- 저런, 늘 그렇게 상상 속에서만 원하는걸 구하나요?
흠... 이봐요, 노래쯤은 아무런 댓가 없이 당신이 원할땐 얼마든지 들려줄 수 있다구요.
더군다나 난 노래하는걸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다지 많은 노력이나 희생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잖아.
원하는게 있으면 손을 내밀어요. 그게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이야...
동감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게 뭘까...
- 여하튼 얘기해봐요. 내가 노래하던 모습.
- 지하의 어느 Bar였어. 그리 크지 않고 무대도 작아.
쌀쌀하고 무거운 안개가 낀 하루였어.
손님들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야. 술취한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
다들 무언가 나름대로들의 얘기를 조용히 나누고 있지..
이상하게,,, 누구하나 우울해보이지 않는 ‘어느 술집의 풍경’이야.
- 누구라도 한사람은 반드시 우울해야하나요? 당신의 Bar에선?
- 뭐... 꼭 그렇진않아. 그냥 그렇게 보였을 뿐이야..
...
공연을 준비하러 당신을 비롯한 ‘파자마 시스터즈’가 조용히 무대로 나와.
하지만 누구도 당신들을 주목하지 못해..
무대에서 멈추지 않았다면 그냥 무대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을 거야.
멤버는 건반, 드럼, 베이스 이렇게 세 명.
- 그건 이미 내가 얘기했잖아요. 또?
- 손님은 대부분 2명이었어. 이상하리만치.
- 대부분 연인들이었나 봐요?
-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었는데도 대부분 2명씩이었어.
- 어떤 노랠 불렀나요? 당신의 상상 속에서?
- "BeeGees"의 ‘Holiday".
- 왜 하필 BeeGees죠? 한번도 불러본 적 없는데...
- 그냥 내가 정했어. 상상만큼은 내 마음대로잖아?
그랬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노래 제목정도야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얼마든지...
-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십수년전쯤에 한 탈옥수가 인질을 잡고 있다가 권총으로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
- 아, 기억나요. 그때 그 탈옥수가 죽기전에 들었던 노래가 바로 Holiday였더랬죠..
그래서 그 노래를 선택한건가요? 왜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났을까....?
- 아니, 중요한건 그 다음이야.
한창 사춘기였던 나와 내 친구들에겐 상당히 감상적인 사건이었어.
물론 그들은 죄인이고, 어떤 이유에서건 탈옥이나 인질극 같은 일은, 더욱이 자.살. 같은건 없어야하겠지만 말이야.
-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의외인걸? 그런 생각을 했다니..
- 많이 얘기했었어. 그 사건에 대해. 특히 술을 마실 때면.
결론은 하나였어.
우.리.도.언.젠.가.그.렇.게.멋.있.게.세.상.을.마.감.하.자..... 는 거였지.
- 가만,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방금 자살 같은건 없어야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게다가 멋있게라니!!
- 이봐, 십수년전 얘기야. 우린 아직 어렸었고, 비정상적으로 감성만 발달했던 시기였어.
- 지금도 설마 그런 생각 따위 하는 건 아니겠죠?
- 설마... 아까도 얘기했듯이, 난 이미 서른 살을 훨씬 넘겼다구...
- 좋아요, 계속 해봐요.
-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 우.리.도.언.젠.가.그.렇.게.멋.있.게.세.상.을.마.감.하.자.
- 그래, 근데 우리들 모두는 한 가지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어.
- 뭐였죠? 그게?
- 뭘 것 같아?
- 이런, 내 일조차도 십수년이 지나면 희미하다구요.
하물며 당신 얘기를, 그것도 내가 본적도 없는 십수년전 얘기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우리 모두는 탈옥수가 권총 자살하기 직전에 들었던 음악이 Scorpions의 Holiday인줄로만 알고 있었어.
그래서 한동안 술을 마실 때 마다 Scropions와 Holiday를 얘기했었지.
더군다나 우리들 중 일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믿고 있을 거야. 아마도.
나도 얼마 전에야 TV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야 틀렸다는걸 알았거든.
Scorpions가 아니라 BeeGees였던거지.
박장대소(拍掌大笑).
흡사 그녀 속에서 웃음을 모아두는 댐이 무너져내린듯하다.
역시, 이 얘기가... 그렇게 거대한 충격인가...?
- 너무 재미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내게해준 어떤 유머보다도.
이래서 난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유머의 재능이 굉장히 풍부한 사람이에요. 분명히.
십수년전, 탈옥, 자살, BeeGees의 Holiday,,,, 이런 이미지들 다음에 그런 재미있는 얘기를 만들어 내다니.... 대단해 당신!!
아니다. 난 분명히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역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든, 오해란건 존재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한계 혹은 이해의 부재(不在).
- 이봐, 난 웃기려고 한 얘기가 아니었어. 만들어 낸 얘기는 더더욱 아니라구.
- 그래도 재미있는걸 어떻해요..
혹시 내가 웃어서 맘상하거나 하진않았겠죠?
- 물론.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건 이런거였다구.
그토록 오랫동안 여러 명의 마음속에서 우울함과 생의 마지막에 관한 동.화.처럼 여겨지던 한 얘기가, 알고 보니 어느 한군데가 심하게 일그러져있더라 이거야.
무려 십수년동안 난 정확하지 않은 얘기에 술을 마시고, 우울해했던 거지.
...
당황스러웠어. 지금처럼 말이야.
- 이런, 화났어요?
- 설마...
- 이봐요, 가끔 느끼는 거지만 때론 당신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물론, 당신의 감성(感性)을 내 이성(理性) 으로 판단했을 경우이긴 하지만.
당신의 유머감감 정 반대편에 서있는 원죄적 약점이죠.
- 원죄적 약점이라... 뜻밖이군.
- 우선 당신 감성 속에 남아있는 그 사건에 있어서 Holiday는 물론 중요하긴 하겠지만 절대적이진 않아요.
당신 속 그 기억이 가지는 의미를 뒤엎을만한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이 BeeGees였던 Scropions였던.
음... 그러니까... 그게 하나의 영화였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Holiday는 영화음악쯤 되겠죠.
영화음악이 중요하긴 하지만, 때론 영화보다 더 기억 속 깊게 남을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영화 한 부분일 뿐이에요.
영화음악이 바뀐다고 해서 영화가 말하고자하는바 까지 변하는건 아니죠.
당신의 기억이 Holiday를 위한 뮤.직.비.디.오.가 아니고 오히려 Holiday가 그 기억을 위한 영.화.음.악.이었던거예요.
그러니 그것이 누구의 음악이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이해하겠어요?
다음으로, 이게 정말이지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인데...
음... 제발 그런 우울한 이야기 따윈 잊어버려요.
그 얘기를 할 때 당신 모습이 어떤지 알아요?
마치 오래전 쓸쓸히 은퇴한 복서 같아.
전적 25전 6승 2무 17패... 정도가 딱 어울리는... 그런 모습이에요.
짜증을 내는 건지, 반박을 하는 건지 불분명한 그녀의 목소리다.
어쩌면 동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영화와 영화음악의 관계... 음악과 뮤직비디오의 관계... 생각해볼게.
쓸쓸한 복서의 얘기도 새겨듣고 말이야.
하지만, 25전 6승 2무 17패는 너무 심한거 아냐?
그렇게 처참하게 얻어맞고 싶진 않다구...
-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어쩌면 당신의 무의식이 일정부분 ‘스톡홀름 신드롬’에 사로잡혀있는 건지도 몰라요. 십수년이 지나 세상 모두의 뇌리속에서 사라져버린 지금까지도 말이죠.
-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니? 무슨 말이지?
- 음... 스톡홀름 신드롬은 말이죠...
그러니까 197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사건이 발생했어요.
무려 130시간이 넘는 인질극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인질이었던 한 여자가 은행 강도와 사랑에 빠져버렸죠. 원래는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동경과 동정, 연민의 감정까지 느끼는 현상을 말해요. 한 마디로 착각이죠. 어처구니없는 현상이에요.
- 멋진데... 생명을 위협하는 강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니...
그거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맹목적인, 현실에선 드문 사랑.
- 이봐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착.각.이에요. 현실에서 이미 일어난 적이 있기에 더욱 위험한 착.각.
하긴 당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리라고 예상은 했었어요.
도대체 어디가 일그러진거죠? 당신 내부에?
- 알아... 그런게 사랑이 아니란걸. 그냥 별 의미 없이 해본 얘기야.
세상에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게 말이나 되겠어?
그리고 틀렸어. 난 ‘스톡홀름 신드롬’같은건 가지고있지 않아.
탈옥수들을 동정하지도 않고 동경하는건 더더욱 아니야.
단지 생을 스스로 끝내는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과 그 순간에 기억하고픈 음악이 있었다라는 얘기가 그저 감상적이었을 뿐이야.
오해하지 말라구...
- 좋아요. 그럼, 앞으론 그런 일은 생각하지 말아요.
- 그럴게.
- 약속할 수 있어요?
- 약속하지.
- 믿어도 되겠죠?
- 물론이야.
- 그럼 이제부터 좀더 밝고 신나는 얘길해요.
뭐, 봄날의 놀이공원이라든지, 벛꽃 축제라든지...
지금부터 정신없이 신나는 상상을 하는거예요.
당신과 나 이렇게 단 둘이서!
...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황사 때문인지 해질녘은 아직 멀었는데도 하늘은 벌써 흐린 오랜지 빛을 띄기 시작한다.
지금 어디선가 BeeGees의 Holiday가 흘러나온다면 어떨까?
권총으로 생을 끝내고 싶을까?
이 순간이 영화 같을까?
...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첫댓글 노래가 영화 같은게 아니라 이야기가 정말 영화 같은걸요
우와.
멋죠요 ㅅㅅ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