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꿍
이태 전, 친정아버지의 파젯날이었다. 나선 김에 성묘도 하고 고향 초등학교도 들렸다. 나는 함평군에 있는 해보초등학교 출신. 학교로 가다가 우연히 6학년 때 짝꿍의 부음을 들었다. 연둣빛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짝꿍의 소식이었다.
섣달의 눈발은 며칠 째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광주에서 함평으로 가는 버스는 달뜬 마음을 싣고 은빛 설원을 달려갔다. 마치 48년 전의 열두 살 소녀가 된 듯했다. 사람의 나이는 생각 속에 있는 것 같다. 한 움큼 숫자가 뭉텅 빠질 수도, 더해질 수도 있는 것. 오늘 내가 그러했다.
어릴 때 살던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걸렸다. 동네를 벗어나면, 실뱀 같은 논길이 반겼다. 그 논길 끝의 봇도랑을 건너면 뿌연 신작로가 가로막았다. 지금은 매끈하게 포장이 되어 있지만, 그 당시는 자갈과 먼지투성이었다. 등뼈 같은 신작로는 조롱박 같은 마을들로 향하는 길들을 갈비처럼 달고 끝없이 이어졌다.
학교 가는 길목에 있던 장터는 하굣길 조무래기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놀이공원도, 볼거리도 없던 그 시절에 오일장 구경하는 재미는 참 오달졌다. 장날이 오일이 아니라 이틀 만에 돌아왔으면 싶었다.
우시장 옆 공터에서 벌어지는 서커스를 볼 때면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재미있었다. 서커스단 소녀는 다람쥐처럼 고공 줄타기도 하고, 나비처럼 사뿐히 날아 장대 끝에 서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고아들을 데려다가 끼니를 굶기며 극심한 훈련을 시킨다는 풍문에 마음이 찡했다. 탄성을 지르며 서커스를 보고 있는 우리들과 소녀는 같은 또래 아이들이다. 한참 부모님 사랑 받으며 학교에 다닐 아이들인데, 하지만 스릴이 넘쳤다.
어느새 장터 사거리, ‘김 약국’ 앞까지 왔다.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김 약국이라는 간판은 그대로 있다. 덩실하게 걸려있는 김 약국의 간판 위로 한 얼굴이 다가왔다. 그 집 아들은 J․K, 공부벌레라는 별명을 가졌던 아이이다. 그 얘는 항상 얼굴이 창백했다. 흡사 그늘 밑에 돋아난 상추이파리 같았다. 몸은 깡말랐고 무언가를 항상 생각하는 눈빛이 인상 깊었다.
약국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45년 전의 그 얼굴이 거기 있을 리 없지만, 열릴 듯 닫힌 문으로 그 아이가 얼굴을 내밀 것 같았다. 어떻게 변했을까.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 여자가 밝게 맞았다. 오랜만에 고향에 왔다가 간판을 보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혹시 J․K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놀란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 분은 자신의 삼촌인데, 오래 전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럴 수가….’ 그렇게 일찍 천계(天界)로 가다니. 요즈음은 폐결핵이 병도 아니지만, 70년대의 결핵은 걸렸다하면 치명적이었다.
약국 문을 뒤로 했다. 창호지 같던 그 얼굴이 사거리 저 끝에서 뭐라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날 길을 걸으며 ‘구나’라는 어미를 수없이 되뇌었다. 체육 시간이면 함께 뛰지 못하고 플라타너스 아래 하염없이 앉아 있던 그 아이. ‘아, 그래서 그랬구나.’ 소풍 갈 때면 선생님이 자주 챙겨서 옆에 걷던 일. ‘그때도 그랬구나.’ 철없는 우리들은 공부 잘하는 그를 선생님이 편애한다고 조잘대었는데. 어린 나이에 병마와 싸우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이웃에게 큰 아픔을 줄 때가 있다. 사금파리 같은 말 한 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는가. 약국 앞에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걷는 학교 길. 함박눈 속으로 그 옛날의 교실이 떠올랐다. 그 때는 투박하고 긴 책걸상에 두 사람씩 앉아 사용했다. 짓궂은 남자애들은 책상 한 가운데에 철책선 같은 금을 그었다. 마치 눈을 부릅뜨고 38선을 지키는 것처럼. 자칫 연필이라도 굴러서 금을 넘으면 사정없이 밀어버렸다. 책상은 그렇다고 치고, 긴 의자는 앞뒤로 밀고 당길 때 둘이 함께 일어서고 앉아야 했다. 그런 불편함 때문에 짝꿍끼리 다툼도 많이 했다. 그런데 내 짝꿍은 책상에 삼엄한 금을 긋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더 양보했던 것 같다. 그뿐 아니다. 그때는 학용품이 무척 귀했다. 짝꿍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를 내 필통에 넣어주기도 했다.
우시장 앞을 지나 학교에 당도했다. 교문 양쪽으로 도열하여 반기던 왕벚나무는 흔적이 없다. 그때는 없던 철문이 육중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철문을 비죽이 열었다. 예전에는 바다 같던 운동장이 지금 보니 동네 놀이터마냥 작아보였다. 운동장 가운데 섰던 플라타너스는 서너 명이 팔을 벌려야 손이 닿았고, 나무 정수리에 앉은 까치는 하늘 끝에 아스라했는데….
그런데 웬 낯선 고목이 내 앞에 엉거주춤 버티고 서 있다. 윗동은 다 베어지고 몸통과 밑동만 남아 있다. 그나마 몸통 움푹한 곳은 시멘트로 채워져 있다. 세상 놀이터에서 지쳐 엄마 품을 찾듯 달려오는 졸업생들을 위해서일까. 운동장을 본래 모습으로 지켜주려는 선생님들의 정성이 읽혀졌다. 상의군인 같은 플라타너스의 몸통을 살며시 안아보고, 눈을 감고 귀를 대어보았다. 우레 같은 함성이 들려오고, 출발을 알리는 화약 총소리며, 청백 계주자들의 말발굽 같은 발소리도 들려온다. 게다가 만국기를 물어뜯는 가을바람 소리까지, 아스라한 시공을 넘어서 귓전에 울린다.
교사(校舍)는 거의 새 건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6학년 때 공부하던 두 칸짜리 슬라브 단층 건물이 여태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나를 기다린 걸까. 외벽을 와락 안아보았다. 창 너머로 교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지금은 과학실로 사용하는 듯 실험기구들이 올망졸망 진열되어 있다. 창문 안으로 70여 명 급우들의 얼굴이 흑백 스크린처럼 떠오르고 짝꿍의 허연 얼굴이 그 속에 있다. 짝꿍과 내가 앉았던 자리. 앞에서 세 번째였던 것 같다. 쉬는 시간에도 공부만 하던 아이. 항상 말이 없고 극성스런 친구들도 옆에 꼬이지 않던 내 짝꿍.
오보록이 돋아나던 콩나물 교실 앞에 짝꿍의 허상과 마주하고 서 있다.
첫댓글 이혜연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차근차근 파일 복사하고 붙여넣기를 하니
됩니다. 신기합니다. ㅎ ㅎ ㅎ
제가 일러드렸는데요? ㅎㅎㅎ
아이고 ㅡ이복희 선생님이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니 잘 되네요 그래서 시험적으로 한 꼭지 더 올려봤어요
책에서 봤던 그 작품 맞지요? 어린시절은 아득해졌어도 추억은 더욱 진해지는 모양입니다^^
네 그 작품입니다 선생님
아직 책을 손에 받아쥐지 못해서 궁금했었는데여기서 글 한편을 접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드시 아늑한 어린 시철로 안내하는 글, 군데군데 묘사가 놀랍습니다. 표주박 같은 동네, 등뼈 같은 신작로....개구쟁이들은 예나지금이나 짓군긴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김경애 선생님 먼 곳에서 이렇게 격려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건강히 잘 게시다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