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장갑 / 전정순
1
불을 만져도 뜨겁지 않다 물을 만져도 차갑지 않다 내 손이 덮어쓴 붉고 질긴 가죽, 지각이 없어지고 털이 빠지고 땀이 나지 않으니 나는 서서히 문둥이가 되어가나 보다 햇빛을 피해 깊숙이 그늘로 숨어드나 보다 번들거리는 흉터로 상처를 가리나 보다
2
커다란 회색 잠자리, 나무 위를 날아다닌다 티그리스 강변을 따라 자욱이 불과 연기를 슬어놓는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TV를 닦는다 모래 허물 같은 집들, 펄럭이는 사람들, 화면 위로 자주 붉은 물감이 번진다 천연생고무는 튼튼하고 칼날이 스쳐도 통증은 없다 장갑차, 방독면, 바리케이드...... 게임기 버튼을 눌러볼까 일급 사수 마린을 부를까 차라리 강 건너로 도마뱀군단을 옮겨버릴까 나무처럼 두 팔이 전지된 아이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본다 반쯤 벌어진 입가에 허연 우유가 묻어 있다 검은 웅덩이 같은 아이의 눈을 나는 물끄러미 들어다본다
유리
젖어가는 세상과 젖지 않는 세상 사이에 유리가 있다
유리에 몸을 던지는 빗방울들
베란다 화초들이 비를 향한다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려면 몸을 오므려야 한다
고무호스 같은 지하도를 통과하려면
고무인형처럼 팔다리를 접어넣어야 한다
빗소리를 따라 관음죽 뿌리들이 천천히 화분 속을 기어다닌다
서너 뿌리는 흙 위로 불거져 꿈틀거린다
초등학교 전학을 다섯 번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보부상이나 사당패였나 묻기도 하지
고을마다 고무줄놀이의 법칙은 다른 법, 고을마다 벽의 높이도 다른 법
높고 낮은 벽마다 유리가 붙어 있었고
유리가 햇빛을 잘라내고 있었지
빗방울들이 허물어져 방수액처럼 흘러내린다
젖어가는 세상과 젖지 않는 세상 사이에 유리가 있다
이삿짐 트럭이 모퉁이를 돌아서면 낯익은 마을은 증발해버리지
거듭하면 이별에도 윤기가 흐르는 법, 텅 빈 길 위로 날개도 돋아나는 법
삶의 중력이 점점 줄어들면서
나는 가끔 바람 속을 떠다니는 집을 보았다
집의 뿌리가 허옇게 드러나고
아랫목에선 무수한 유리의 씨앗들이 싹터 올랐다
목마른 화초들이 서서히 고개를 떨군다
베란다 수도꼭지를 틀자
수돗물이 빗물 흉내를 내며 쏟아진다
유리 가득 매달리는 물방울들
부지런히 물을 주어 내가 기르는 것은
화초가 아니라
유리일지도 모른다
빨랑 머리
영화<노랑 머리>가 장안의 화제로 떠올라 주인공 이재은의 샛노란 머리가 유행이라는 데 따분한 리얼리즘 영화에 식상한 관객들에게 파격적인 베드신이 충격을 준다는데 이참에 나도 한번 첨단을 걸어볼까 미용사에게 노랑 머리를 주문했다 미용사는 내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언니 너무 날려 보일텐데 은근히 말린다 아니 리얼하게 말린다 어떠랴 김수영은 수도세 때문에 삭발도 했다는데 까짓 머리색깔쯤 바꾸면 어떠랴 날리는 것이야말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 미용사는 마지못해 내 머리색이 너무 검어 노란색이 제대로 안나올 거라며 빨간색을 권한다 빨강이 노랑보다 덜 날아간다? 어떠랴 노랑이든 빨강이든 절대값이 중요하지 바꾼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검은 머리에 식상한 관객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붉은 코팅을 하고 부분적으로 더 붉은 브릿지를 넣고 비닐을 씌우고 전기 온풍기를 통과하고 중화제를 거쳐 샴푸를 마치자 드디어 촉촉히 젖은 빨강 머리가 나타났다 물기만 마르면 이제 나는 날아가는 것이다 내 검은 머리로부터 검은 머리 속으로부터 머리 속 녹슨 리얼리즘으로부터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며 미용사가 말한다 언니 머리색이 너무 검어 빨간색도 제대로 안 나오네
포스 라름
접착제로 눈가에 붙이는 눈물이 나왔다네 발매 72시간 만에 매진되어버렸다네 프랑스 어 <포스 라름>은 가짜 눈물이란 뜻 떠나는 연인을 붙잡는 눈물작전의 소도구로도 제격이지만 그냥 재미로 붙이는 사람도 늘고 있다니 이제 눈물은 얇고 가벼워져 물방울 속에 갇히지 않겠구나 화장품 코너나 액세서리 가게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이제 눈물은 아낄 필요가 없겠구나 아르지도 상하지도 않을 것이니 대형할인매장에서 박스째 구입해 두고두고 써도 되겠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핸드폰, 때와 장소를 마음대로 가리는 눈물 이제 눈물은 눈 속에 없고 핸드백 속에 누워 있겠네 액체의 길을 버려 고체의 길을 가겠네 가짜 손톱을 붙인 손으로 가짜 속눈썹을 붙인 눈가에 가짜 눈물을 두어 개 붙이고 화사한 봄거리를 걸어가면, 슬픔의 포자 같은 오색 풍선들은 가벼이 구름 멀리 떠오르겠네
바람 뜨게질
집으로 오던 길이 들판 너머 마을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빈 뜨락에 앉아 새들이 환한 발바닥으로 걸어다니는 공중의 길을 보았습니다 마당가를 걸어다니는 구름 너울을 바라보았습니다
심심한 들판이 바다를 불러와 마을은 가뭇없이 떠내려가고 나는 엎드린 섬 홀로 출렁이는 물결을 혈관 깊숙이 구겨넣었습니다 비척비척 마다 밑을 가는 한 마리 게처럼 분홍 털실뭉치가 내 곁을 돌아다닙니다
사방은 모래 사방은 조개껍질, 가시 돋친 집게발이 천천히 털실 위를 기어다닙니다 분홍 바다가, 분홍 구름이, 무수히 일었다 스러집니다 털실이 다하면 절벽이 오고 절벽에는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털실 끝에 바람의 실을 이어 나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뒤집힌 게가 집게발을 버둥거립니다 투명한 바다, 투명한 구름, 이윽고 내 뜨개질이 무형을 완성하면 나는 다시 그 완성을 헐어내고 헐어냅니다
텅 빈 뜨락, 햇볕에 적막 타는 소리 가득합니다
미국자리공
햄버거만한 이파리
과속으로 질주하는 줄기
일년초 미국자리공이 오년생 굴참나무를 가볍게 추월하네
풀은 나무 아래 자라야 한다는
근린공원의 불문율을 지키지 못해
미국자리공, 독초라 불리우네
자랄수록 줄기가 붉어지네
공원 가슴팍에 한 점 주홍글씨가 새겨지네
딤즈데일 목사의 설교가 푸른 조경으로 이어질 때
붉은 불륜 한 포기, 더욱 싱싱해지네
독초란 아무 데도 기대지 않는 것
거름 없이 버팀목 없이 군락도 없이
미국자리공 홀로 무성해지네
구청 직원들의 전기톱날과
인부들 푸른 낫은 피했지만
<토양산성화의 표지, 미국자리공>이 방영되자
누군가 장신의 한 허리를 분질러놓았네
독초란 또 쉽사리 눕지 않는 것
꺾인 줄기가 시드는 동안에도
거듭 남은 곁가지들을 밀어 올렸네
뿌리 속에 단단한 낯가림이 맺히고
환약 같은 열매가 익어가네
미국자리공
다친 짐승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상처를 핥고 있네
산성의 피가 천천히 스며 나와
벌겋게 공원 흙을 부식시키네
바람의 초상
-시인
맨발로 불을 디디고 맨발로 물 위를 걷는다 노래로 풀씨를 잠재우고 노래로 초록을 일으킨다 프리지어를 다듬던 길고 흰 손으로 시궁창 썩은 웅덩이를 어루만지는 그대 그대는 세상의 향기와 세상의 악취를 한데 섞는다
교회 지붕 위 시멘트처럼 웅크린 비둘기들에게 일일이 날개를 나눠주며 지나가는 자동차 유리창에 붉고 노란 단풍잎 스티커를 붙여주기도 한다 심심한 날이면 쓰레기 소각장 높은 굴뚝 위에 여러 개의 뭉게구름을 갈아끼우고 백양나무숲까지 반짝이는 강물을 끌어당긴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거리의 셔터들이 하루를 끌어내리는 늦은 저녁 그대는 취한 사내의 비틀거리는 담뱃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두 손을 오므린다 집이 없는 그대는 집이 없는 사내와 어깨를 겯고 어두운 거리를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