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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목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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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차라리 형어(形語)와 같다. 검은 장정에 검은 글씨로 쓰여 있는 블랙 리스트-나에게 첫 서목(書目)은 윤병태의 『한국고서종합목록』이었다. 그 사상의 무게를 근수로 달아 놓은 것도 아니고, 골품(骨品)도 없이 한글 자모순으로 정리된 그대로의 열거 앞에서 취해 있을 것, 이것이 나의 정언 명령이었다. 이 서목을 통해 책을 펼쳐보면서 내 나름 사상의 근수와 골품을 재어보는 것이 어쩌면 공부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서목은 장서와 관리, 검색과 열람을 위한 공구(工具)이다. 무엇보다 학술을 분별하고 원류를 살피는 문경(門徑)으로써 그 연변(演變)을 통해 각 시대 학문의 스펙트럼을 조망하고, 학문의 성쇠, 다시 말해 발전과 분화 등 새로운 학문 영역을 조감한다.
중국의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육예략(六藝略), 제자략(諸子略), 시부(詩賦略), 병가략(兵家略), 수술략(數術略: 천문, 역수, 오행 등), 방기략(方技略: 의서)으로 분류되었던 것이 육조시대에 사부(四部: 경부(經部: 유가경전), 사부(史部: 역사서), 자부(子部: 철학), 집부(集部: 문학) 체계가 시작되고,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 이후 많은 목록서들이 이를 준용하면서, 이런 독립적인 대분류 속에 있던 것이 학술 변화에 맞춰 축소되거나 재편되었다.
특히 청대 사고전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제[提要]를 단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가 만들어지면서 서목의 질량이 큰 성취를 이루었다. 새로운 저술 내용과 형식을 갖춘 책들은 목록 분류에 강입(强入 억지로 분류에 끼워 맞춤)하거나 새로운 분류를 만들어 내었다.
가령 송나라 우무(尤袤, 1127~1194)가 『수초당서목(遂初堂書目)』에서 자부(子部)에 「보록류(譜錄類)」라는 한 부문을 세워서 『향보(香譜)』, 『석보(石譜)』, 『해록(蟹錄)』 등을 정리한 것에 이어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 보록류를 따로 정리하는 한편, 스위스의 선교사 요한네스 테렌츠(1576~1630, J. Terrenz, 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전대에 보이지 않던 기술서로 보록류에 넣은 것도 이런 학문의 변화를 보여준다.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와 같이 역대 저록이 많지 않은 것은 황우직(黃虞稷, 1629∼1691)의 『천경당서목(千頃堂書目)』을 따라 자부-잡가(雜家)에 배치한 것에서 그 변화의 원류를 볼 수 있는 경우라 하겠다.
근대의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의 범례를 보면, 체계 없는 초사본(抄寫本)을 비롯하여 일정하게 분류하기 어려운 서종(書種)을 집부(集部)-잡저류(雜著類)에 분류하였는데, 서종의 다양성과 혼잡에 따른 분류의 어려움과 고심을 느낄 수 있다.
서형수(徐瀅修, 1749~1824)는 저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서목이라고 했다. 전통시대 서종의 파악은 물론 이를 정리하여 ‘지식의 좌표’를 그려내는 작업이기에 오랜 시간 동안 넓은 지식을 갖추지 않고는 그 분류 체계를 세울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서형수는 중국의 서목을 전시대를 망라한 것, 특정 왕조를 정리한 것, 한 지역과 집안(장서가)의 장서를 정리한 것으로 나누었다. 이런 지적 전통이 이어져 중국은 종합목록으로 『중국고적선본서총목(中國古籍善本書總目)』에 이어 『중국고적총목(中國古籍總目)』을 만들어 전통시대 전적을 총괄 정리해 내었다. 아직 우리 목록학사에서 한국의 종합목록은 미완이지만, 중국의 것을 그대로 도습(蹈襲)한 것만은 아니었기에 우리 나름의 서목이 완성되리라는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본다. 임방이 정리한 『재적록』 역시 장서 내용의 한계와 개인적인 취향의 구서(求書)를 정리한 가장서목(家藏書目)으로써 나름의 분류법을 적용한 것이다.
한편,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무엇보다 구서의 여러 방법의 하나로 서목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정조가 『절강채집유서총록』을 참고하여 『내각방서록(內閣訪書錄)』을 만들어 학술을 위한 구서목록을 만들었듯이, 서유구 역시 서목을 통해 동시대의 서책들을 확인하고 이를 참고하여 자신의 학술에 응용하고자 했다.
책으로 들어가는 천문만호(千門萬戶)의 문패들, 그 서목 앞에 서서 거듬거듬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목록취(目錄趣)’는 전통이 쌓아 놓은 다양한 분야와 성과 앞에 겸허를 가르친다.
서목 속에 늘어선 하나하나의 책들로 위패를 대신하고, 제서(祭書 책에 제사를 지내는 일로 조선의 이옥(李鈺)이 책 제사를 올린 적이 있다.)의 전통을 이어 책들에게 감사 올려 본다. 서신(書神)에게 통사정하나니 그 가려지고, 고초로 다듬어진 책들을 세상에 보여주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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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책의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죠 ^^
책은 체기를 내려줍니다.
예전에는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이 자랑스럽고 소중했는데
요즘은 인터넷 보급으로 인해 책의 소중함이 퇴색된 느낌입니다.
시대의 흐름인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