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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자유롭게 글쓰기 남당 박창화 유고 30권
과거와 미래 추천 0 조회 171 26.05.05 11:14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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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6.05.05 14:32

    첫댓글 1999년에 박창화님의 아드님인 박인규님 댁에 직접 박창화 님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박인규님이 직접 '화랑세기'와, 박창화 자신이 지은 '강역고' 2책만을 박창화님께서 소중히 여기셨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2책을 제외한 다른 책의 경우 박창화가 직접 썼다기 보다는 옮겨 적은 책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가장 소설에 가까운 책은 '을불대왕전', '어을우동기' 정도인데, 이 책을 보면 유학자인 박창화가 창작했다고 보기 어려운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박창화가 전한 필사본에는 소설보다는 역사서 형태를 갖춘 책이 훨씬 많습니다. 다만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도서료에서 책을 보고 옮겨 적었다고 한다고 해도, 언제 누가 만든 책이냐는 문제가 문제가 됩니다. '추모경'은 위서라고 하겠지만(고려 초 칠대실록의 저자 황주량의 저서라고 했으나, 그가 쓴 책으로 보기는 무리이므로), 다른 책은 누가 지었는지도 적어놓지 않아서 언제 만들어졌는지 조차 알 수 없어 더 난감합니다. '고구려사략' 같은 책과 삼국사기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가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서지학적인 문제 즉 원본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박창화가 남긴 책 연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 26.05.06 22:35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아드님 김인규님이나 청송 김성겸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는 지요? 김성겸 선생님의 말씀처럼 남당 박창화 선생님은 성경을 창작할 작품으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복사본생산등 등 대단한 사료정리 일을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연구를 하다보니, 표기법 등에 대해 궁금한 점은 많은 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 26.05.14 08:06

    일단 과거와 미래님이 첫 번째 주장한 내용이 곧 이 글의 근거로 보여지는데, 이는 남당유고 자체를 읽어보지 않고 쓴 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구지왕기를 분석하면 그 즉위 초년이 188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근거로 제시한 일성이사금기의 내용 역시 다른 필사본에 의해 연도가 일치됩니다. 남당유고는 기본적으로 백제는 고이왕, 고구려는 태조왕, 신라는 내물이사금 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고 이병도 박사의 말처럼 그 이전 기년의 기록에 대해 수정됨이 있습니다.

  • 작성자 26.05.19 23:45

    구지왕이 188년이면 담로주였던 초고-구수왕 시기로 한강유역 전체가 목지국 진왕의 통치하에 있어서 백제가 외교권과 인사권도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구지왕이 외국에 사신을 보내고 인사권도 행사하고 있습니다. 후한서와 삼국지와 진서에 모두 모순인 것은 물론이고 삼국사기와도 모순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를 정복한 말갈의 고이추장이 234년에 즉위하고 외교권과 인사권을 회복하는데 이것이 정확하며, 백잔이(말갈이)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한 광개토왕의 비문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일본서기와도 일치하는데 이는 설명을 생략합니다.
    만일 삼국사기 집필할 떼 남당유고가 다 있어서 집필진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가정해도 유학자들로 구성된 집필진은 담당유고를 삼국사기 집필에 하나도 채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집필진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이었느냐면 진서를 다 보고도 372년의 여구왕의 백제왕 책봉기록과 386년의 여휘왕의 백제왕 책봉기록을 싣지 않았고, 송서를 보고도 457년의 개로왕의 백제왕 책봉기록을 싣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록들을 자신들이 가진 여러 사료와 비교해보고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체 심의 과정에서 탈락했습니다.

  • 작성자 26.05.30 02:54

    과거에 학계가 삼국본기 초기 기록들 중에서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가 가장 정확하고, 그 다음이 백제본기 초기 기록이고, 가장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 신라본기 초기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사서를 검증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고, 4세기 이전 삼국사기 사건 기록 연도를 하나씩 체크해보면 90% 이상이 단 한 달도 안 틀립니다. 그러면 10%는 틀리느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2천 년 된 기록이 90% 이상 정확한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그만큼 정확하고 무서운 책입니다. 이에 비하여 남당 유고는 사료로 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삼국사기 집필진이었다고 해도 남당유고는 사료로 채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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