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박창화 선생은 일제치하에서 일본 왕실 궁내부 도서관에 직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 30권의 역사책을 남겼는데 아직도 논란 중인 화랑세기 필사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역사소설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입니다. 그 소설을 자신이 창작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 궁내부에서 소설을 보고 베낀 것인지는 모릅니다. 남당유고를 모두 역사소설로 보는 이유가 몇가지인데 제가 아는 것 3가지만 서술해보겠습니다.
1) 연도가 뒤죽박죽이다.
*백제왕기 仇知王 四年 辛未; 四月 獵于漢山 (4년, 신미 4월,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루왕 四年(131); 夏四月 王獵漢山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남당의 백제왕기에는 2-3세기에 백제에 구지왕이라는 삼국사기에 없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루왕 4년(131년)과 신미라는 간지와 4월이라는 달까지 일치합니다. 따라서 구지왕 4년은 131년입니다. 신라는 제6세 지마이사금의 시기입니다.
*백제왕기 仇知王 五年 壬申; 二月 築北漢山以備高句麗, 八月 新羅王逸聖立 遣使來貢 (5년 임신; 2월 북한산성을 쌓아 고구려를 대비하였다. 8월, 신라왕 일성이 즉위하였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쳐 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루왕 五年(132); 春二月 築北漢山城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북한산성 축조기록이 달까지 일치합니다. 신라 제7세 일성이사금의 즉위도 134년이라 2년 밖에 차이가 안 납니다. 따라서 구지왕 5년은 132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왕기 仇知王 十七年 甲申; 九月 公孫度王薨 太子康立 王遣使吊慰之 (17년 갑신; 9월 공손도왕이 죽었다. 태자 (공손)강이 즉위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위로하였다.)
구지왕 17년이면 132+12=144년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공손도(탁)가 죽은 것은 204년입니다. 갑자기 60년 후로 점프했습니다.
*백제왕기 仇知王 三十六年 癸卯; 二月 以吉宣爲上佐平 委以軍事 (36년 계묘; 2월 (신라에서 망명해온) 길선을 상좌평으로 삼고 군사일을 맡겼다.)
길선이 망명해온 해는 165년으로 이제는 6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길선을 상좌평으로 임명했다는 계묘년은 163년과 223년이 있는데 망명해야 상좌평이 되므로 223년입니다. 다시 60년 후로 갑니다. 좌평제는 260년에 고이왕이 만든 것이고, 상좌평은 407년에 <<삼국사기 최초의 부여씨인>> 여신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5세기의 상좌평 제도가 2세기에 이미 출현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합니다.
남당유고는 자체의 논리적 모순이 수두룩한데 놀랍게도 화랑세기는 이런 자체 모순이 거의 없습니다. 동일인의 저술이라면 비슷한 모순들이 보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남당유고 중에 화랑세기 필사본만 떼어서 연구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심지어 향가도 실려 있는데 한문을 잘 하는 것과 노래를 짓는 것(문학 즉 예술임)은 다른 능력입니다.
2) 왕과 왕비가 침실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사관이 왕의 침실에 들어가 왕비와 나누는 이야기를 기록합니까? 삼국사기나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날 TV 드라나에서나 가능합니다.
3) 독자적인 천체기록이 하나도 없다.
삼국사기나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중국이나 다른 사서에 전혀 없는 우리만의 천체기록들이 수두록합니다. 예를 들면 태백성 기록 같은 것입니다. 천체기록은 검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30권에 이르는 담당유고에 독자적인 천체기록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남당 유고가 모두 베낀 것이고 그 원본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지어진 소설이라고 해도 그 가치는 엄청납니다. 남당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이 확정되면 우리는 30권의 한문소설을 보유하게 되니 우리 문학사가 확 바뀔 것입니다.
첫댓글 1999년에 박창화님의 아드님인 박인규님 댁에 직접 박창화 님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박인규님이 직접 '화랑세기'와, 박창화 자신이 지은 '강역고' 2책만을 박창화님께서 소중히 여기셨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2책을 제외한 다른 책의 경우 박창화가 직접 썼다기 보다는 옮겨 적은 책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가장 소설에 가까운 책은 '을불대왕전', '어을우동기' 정도인데, 이 책을 보면 유학자인 박창화가 창작했다고 보기 어려운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박창화가 전한 필사본에는 소설보다는 역사서 형태를 갖춘 책이 훨씬 많습니다. 다만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도서료에서 책을 보고 옮겨 적었다고 한다고 해도, 언제 누가 만든 책이냐는 문제가 문제가 됩니다. '추모경'은 위서라고 하겠지만(고려 초 칠대실록의 저자 황주량의 저서라고 했으나, 그가 쓴 책으로 보기는 무리이므로), 다른 책은 누가 지었는지도 적어놓지 않아서 언제 만들어졌는지 조차 알 수 없어 더 난감합니다. '고구려사략' 같은 책과 삼국사기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가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서지학적인 문제 즉 원본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박창화가 남긴 책 연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아드님 김인규님이나 청송 김성겸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는 지요? 김성겸 선생님의 말씀처럼 남당 박창화 선생님은 성경을 창작할 작품으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복사본생산등 등 대단한 사료정리 일을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연구를 하다보니, 표기법 등에 대해 궁금한 점은 많은 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단 과거와 미래님이 첫 번째 주장한 내용이 곧 이 글의 근거로 보여지는데, 이는 남당유고 자체를 읽어보지 않고 쓴 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구지왕기를 분석하면 그 즉위 초년이 188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근거로 제시한 일성이사금기의 내용 역시 다른 필사본에 의해 연도가 일치됩니다. 남당유고는 기본적으로 백제는 고이왕, 고구려는 태조왕, 신라는 내물이사금 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고 이병도 박사의 말처럼 그 이전 기년의 기록에 대해 수정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