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 Cohen / אֱלִיָּהוּ בֵּן שָׁאוּל כֹּהֵן
1924년12월 26일 ~ 1965년 5월 18일
1. 개요2. 상세3. 최후4. 그 이후
4.1. 고인드립?4.2. 반론
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스파이. 본명은 엘리 샤울 코헨. 중동전쟁에서 큰 공을 거둔 인물이자 감쪽같이 신분을 속인 스파이로써 유명하다. 당연히 이스라엘에서는 영웅이다.
2. 상세[편집]
이집트에서 태어난 아랍계 유대인으로 1950년대에 이집트에서 스파이로서 활동했을 정도로 철저한 아랍어 및 현지적응력을 보였으나 결국 이집트 경찰에게 걸려서 신나게 두들겨맞고 국외추방당했다. 그나마 이집트에선 별다른 활약을 못했기에 용케도 안 죽고 추방으로 끝난 것이다.
이후 남미를 거쳐 카말 아민 사베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철저하게 신분을 속인 그는 시리아 바트당에 가입하고 비행기 조종을 할 줄 아는 시리아 거부로 시리아 군부에 접근하여 온갖 처신으로 시리아 군부에서 입지를 다졌다. 시리아에선 이집트와 다르게 바트당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 결과 시리아가 요르단강의 물길을 돌림으로써 이스라엘로의 물 공급을 막으려는 계획을 알아냈다. 그는 또한 게릴라전을 통해 이스라엘 북쪽을 강타하려던 PLO(팔레스타인 민족 해방운동) 세부 계획 정보를 이스라엘에 제공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군은 단, 다프나, 세알 야슈브를 파괴하려던 시리아를 막고 먼저 시리아내 거점을 폭격했다.
더불어 유칼립투스 나무를 일선에서 일하는 병사들이 그늘에서 쉬게 하고 싶다는 핑계로 복지를 제공한다는 명목 하에 시리아군 진지가 숨겨진 곳에 심게 하여 이 정보를 이스라엘에게 비밀리에 전하면서 이스라엘군은 전시에 유칼립투스 나무 근처를 먼저 포격해 시리아군 진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 나중에 이것을 알게 된 시리아는 나무들을 죄다 뽑아버린다.
1964년 바트당의 신설된 최고위직에 올라 골란 고원의 전략적 요새들을 촬영한 사진을 손에 넣었다. 이 정보를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보내어 마침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난공불락이라고 하던 골란 고원을 이스라엘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엘리 코헨 덕분이었다.
3. 최후[편집]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연전연패에 이가 갈리던 시리아는 혹시나 하여 자국 내 인사들의 뒷조사를 면밀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코헨이 보내던 무선통신이 결국 들키고 만다.[1] 1965년 1월, 시리아는 소련의 기술협조로 결국 그를 잡았는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 코헨은 국방차관까지 오른 최고위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거저 저런 고위직에 오른 건 아니다. 위에 나온대로 엄청난 부자로 행세하면서 막대한 돈을 시리아 군, 정계에 풀면서 승진한 것으로, 유태인들의 막대한 자금력으로, 바꿔 말하면 돈만 있으면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시리아 정계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리아 군·정계는 난리가 났다. 국방차관이 알고보니 이스라엘의 스파이라는 게 드러났으니 코헨과 친했던 시리아 군·정계 인사들까지 면밀조사가 이뤄졌는데, 당시 시리아 국방장관이던 하페즈 알 아사드[2]도 차관인 코헨과 얽히면서 하마터면 숙청당할 뻔했다. 결국 연루된게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이스라엘군을 교란시킬 거짓 정보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3] 결국 사형이 확정 되고 당시 중동에서 정치 및 종교범의 인권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냥 사형도 아니고 본보기로 5월 18일 수만여 시리아 군중 앞에서 야유 속에 다마스쿠스에 있는 마르제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형된 사진
이스라엘은 그를 구하고자 막대한 돈을 준다느니, 시리아 스파이 10명과 교환하자느니, 별별 제의를 하며 매달렸지만 거절당했다. 미국이나 프랑스도 중재를 나섰으나 그동안 아랍 스파이에 대하여 미국이나 프랑스가 나선 적 있냐는 아랍권의 비아냥과 조롱만 받았다. 미국은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에게 그를 하다못해 무기징역으로라도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으나, 친미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조차 불가능하다고 매몰차게 거부했다. 워낙 간첩 행위의 스케일이 커서 별 수가 없다는 이유.
모사드 요원이던 아우 모리스 코헨(1927~2006)이나 1959년에 결혼한 그의 아내인 나디아 마잘드 코헨은 그저 TV로 생중계되는 교수형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시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만 시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자체 매장을 해버렸다.
그에게는 2남 1녀 자식들이 있었는데 장녀 소피, 장남 이리트, 둘째 샤이 코헨이 있었지만 다들 어릴적에 아버지를 봐서 기억도 하지 못한다고. 소피조차도 아버지가 죽을때 4살이었고 샤이는 채 1살도 되지 않았다.
4. 그 이후[편집]
죽은 지 50년이 넘은 지금도 그의 시체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시리아에선 하도 오래되어서 이제 국내에서도 어디에 묻혔는지 사람들이 모른다고 한다. 실제로 시리아 측에서 극비리에 묻어버렸고 당시 처형된 다른 사람들과 섞어서 시체를 빼돌려 대충 파묻어서 시리아인들이 그가 어디에 묻힌 지 모르기에 이스라엘로선 그의 시체를 이스라엘에 매장할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게다가 자세한 기록도 폐기하고 세월이 매우 오래 지났으니... 다만 밑에 서술한 것처럼 무덤 훼손을 막고자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전몰자 묘지에 그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2007년에 죽은 형 모리스나 아내 나디아는 아사드 일가에 편지를 직접 보내며 제발 시체라도 돌려달라고 여러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2008년 이스라엘 일간지에서 코헨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시리아 측이 이렇게 말했다는 보도도 했는데 전혀 다른 사람으로 속여서 매장한 사람들도 코헨인지 전혀 모르고 매장했으며 그냥 시리아인으로서 시리아인 무덤에 매장되었다고 한다는 것. 반대로 철저하게 3곳 무덤을 오고가며 가묘를 만들어 코헨이라고 위장된 무덤도 있다 카더라라고 보도한 일간지도 있듯이 여기 기자들도 소설을 여럿 쓰다보니 어디가 정확한지 불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