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宗義恭大王
金宗瑞外 28人
諱는 武요 字는 承乾이니 太祖長子라 母는 莊和王后吳氏이며 以後梁乾化二年壬申(912秊)에 生하다 吳氏ㅣ 嘗夢에 龍入懷한데 未幾에 太祖ㅣ 出鎭羅州에 見而幸之하여 遂有娠이라 及壯에 氣度恢弘하고 智勇絶倫하여 從太祖征百濟有功이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四라
혜종(惠宗) 의공대왕(義恭大王)의 휘(諱)는 무(武)요, 자(字)는 승건(承乾)이니, 태조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912)에 태어났다. 오씨가 일찍이 용이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안 가서 태조가 나주(羅州)를 지키러 나갔을 때 오씨를 보고 사랑하여 드디어 아기를 배게 되었다. 나서 성장하자, 도량이 넓고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서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공이 있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2년이요, 수(壽)는 34세니다.
甲辰(元年 944秊)
<後晉 開運元年, 契丹 會同七年>
○ 遣廣評侍郞韓玄珪와 禮賓卿金廉을 如晉하여 告嗣位하고 遂賀破契丹하다
○ 광평시랑(廣評侍郞) 한현규(韓玄珪)와 예빈경(禮賓卿) 김염(金廉)을 후진에 보내어 왕위의 계승을 알리고, 거란을 쳐부순 데 대해 하례하였다.
* 사위(嗣位): 임금 자리를 이어받음.
○ 冬十二月에 翰林院令 平章事 崔彥撝卒하다 彥撝는 新羅人으로 稟性寬厚하며 自少能文이라 年十八에 入唐登科하고 四十二에 始還國하니 拜執事侍郞 瑞書院學士라
○ 겨울 12월에 한림원령 평장사(翰林院令平章事) 최언위(崔彦撝)가 졸하였다. 언위는 신라 사람으로 타고난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며 어릴 때부터 글을 잘하였다. 나이 18세에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오르고 42세에 비로소 본국에 돌아오니, 집사시랑 서서원학사(執事侍郞瑞書院學士)로 임명되었다.
* 서서원(瑞書院): 신라시대, 문한(文翰)을 맡아 보던 관아. 헌강왕(憲康王) 6년(880) 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관원으로 서서랑(瑞書郞)·학사(學士) 등이 있었다.
及新羅歸附에 太祖ㅣ 命爲太子師하여 委以文翰之任이라 宮院額號는 皆所撰定이요 一時貴遊ㅣ 皆師事之라 及卒에 年七十七이라 諡文英이라
뒤에 신라가 귀부하자, 태조가 언위를 태자사(太子師)로 삼아 (文翰)의 임무를 맡도록 명하였다.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지어 정한 것이요, 당시의 귀족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77세에 졸하였으며,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 귀유(貴遊): 遊는 관직이 없는 것으로, 貴遊는 王公의 子弟를 가리킨다.
乙巳(二年 945秊)
<後晉 開運二年, 契丹 會同八年>
○ 晉이 遣光祿卿范匡政과 太子洗馬張季凝하여 來冊王하여 爲持節 玄菟州都督 上柱國充 太義軍使 高麗國王하다
○ 후진이 광록경(光祿卿) 범광정(范匡政)과 태자세마(太子洗馬) 장계응(張季凝)을 보내와 왕을 책봉하여 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충 태의군사 고려국왕(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充太義軍使高麗國王)으로 삼았다.
○ 大匡王規女ㅣ 爲太祖第十六妃하여 生一子하니 曰 廣州院君이라 一日 規ㅣ 譖王弟堯及昭가 有異圖라하되 王은 知其誣하여 恩遇愈篤이라
○ 대광 왕규(王規)의 딸이 태조의 열여섯째 비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광주원군(廣州院君)이다. 어느 날 왕규가 왕의 아우인 요(堯)와 소(昭)가 반역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참소하였으나, 왕은 그것이 무고임을 알아 그들을 더욱 두터운 은혜로 대우하였다.
至是하여 司天供奉崔知夢이 奏流星犯紫微하니 國必有賊이라하다 王은 意規謀害堯昭之應이나 亦不罪規하고 乃以長公主로 妻昭하여 用强其勢라
이 때에 이르러 사천공봉(司天供奉) 최지몽(崔知夢)이 아뢰기를, “유성(流星)이 자미성(紫微星)을 범했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왕규가 요와 소를 해치려는 징험인 줄 짐작했으나, 역시 왕규를 죄주지는 않고 이내 맏공주를 소의 아내로 삼아 그 세력을 강성하게 하였다.
公主는 從母姓하여 稱皇甫氏라 後凡取同姓者는 皆諱稱外家之姓이라
공주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황보씨(皇甫氏)라 하였다. 이후에 동성(同姓)에게 시집간 여자는 모두 숨기고 외가의 성을 썼다.
史臣曰 取妻에 不取同姓은 禮也니 雖百世라도 婚姻不通이온 惠宗之以公主로 妻弟는 何也오 時俗이 然也라
사신이 논하기를, “아내를 얻을 때 동성에게 장가들지 않는 것은 예이니,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혼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혜종이 공주를 아우의 아내로 삼은 것은 무슨 이유였던가. 그 시대의 풍속이 그러하였다.
太祖는 不世出之主也로 動法古昔하여 有志化俗이나 而狃於習俗하여 不能變也라 自是厥後로 視爲家法하여 恬不爲異하며 中葉以降으로 雖禁堂從之親이나 而同姓則訖不能禁也라
태조는 세상에 나기 드문 훌륭한 군주로서 모든 일에 옛것을 본받아 풍속을 변화시키려고 했으나, 습속에 젖어 능히 변경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그 후로는 이를 가법(家法)으로 삼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중세 이후에는 비록 종형제 사이의 혼인은 금하였으나 동성간의 혼인은 끝내 금하지 못하였다.
傳曰 男女同姓이면 其生不繁이라하니 同姓尙爾온 況至親乎아 今觀其取姑․姊․妹者하니 率多無後하여 傳世五百年之久로되 而宗支ㅣ 終不過數十人이라 然後에 知先王制禮之意ㅣ 深矣니 可不戒哉아
옛글에, '남녀가 성이 같으면 그 자손이 번성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동성도 그러한데 하물며 지친(至親)이랴. 이제 그 고모나 자매에게 장가든 사람을 보니 대개가 자손 없는 이가 많아서 5백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났어도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이 끝내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본 뒤에야 선왕이 예를 마련한 뜻이 심원함을 알 수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종지(宗支): 宗孫과 支孫.
王規ㅣ 謀立廣州院君하여 嘗夜에 伺王睡熟하고 遣其黨하여 潛入臥內하여 將行大逆한데 王이 覺之하여 一拳斃之하고 令左右曳出하고 不復問이라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도모하여, 일찍이 밤에 왕이 깊이 잠들었는가를 엿보고 자기 편을 보내어 몰래 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 왕을 해치려고 하였는데, 왕이 잠에서 깨어나 한 주먹으로 그들을 때려 죽이고 측근에서 시중하는 신하를 시켜 끌어내게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一日 王이 違豫하여 在神德殿한데 崔知夢이 又奏 近將有變하리니 宜以時移御라하여 王이 潛徙重光殿하다
어느 날 왕이 병환이 나서 신덕전(神德殿)에 있는데, 최지몽(崔知夢)이 또 아뢰기를, “가까운 시일 내에 변고가 있을 것이니 곧 옮기셔야 합니다." 하므로, 왕이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기었다.
規ㅣ 夜使人하여 穴壁而入하니 寢已空矣라 王이 知規所爲而亦不罪之하다 後規ㅣ 見知夢하고 拔劍罵之曰 上之移寢은 必汝謀也라하다
왕규가 밤에 사람을 시켜 벽에 구멍을 뚫고 왕의 침실에 들어오니 방은 벌써 비어 있었다. 왕은 왕규가 한 짓인 줄 알면서도 역시 그를 죄주지 않았다. 그 후에 왕규가 최지몽을 보자 칼을 빼들고 꾸짖기를, “임금이 침실을 옮긴 것은 반드시 너의 꾀일 것이다." 하였다.
王은 自王規謀逆之後로 多所疑忌하여 常以甲士自衛하고 喜怒無常하며 群小並進하고 賞賜將士無節하니 內外嗟怨이라
왕은 왕규의 역모가 있은 뒤로부터는 의심하고 꺼려하는 바가 많아 항상 갑사(甲士)에게 호위하도록 하고, 기뻐하고 성냄이 일정치 않았으며, 소인들이 한꺼번에 등용되고, 장사(將士)에게 상을 내려주는 것이 절도가 없으니, 조정 안팎이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 秋九月에 王疾篤한데 群臣은 不得入見하고 憸小ㅣ 侍側이라
○ 가을 9월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였는데 신하들은 들어가 뵙지 못하고 간사한 소인들만 왕의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 戊申에 薨于重光殿하다 上諡曰 義恭大王이요 廟號惠宗이라 葬順陵하다 群臣이 奉王弟堯卽位하다
○ 무신일에 왕이 중광전에서 훙(薨)하였다. 시호를 올려 의공대왕(義恭大王)이라 하고, 묘호는 혜종이라 하였으며, 순릉(順陵)에 장사지냈다. 신하들이 왕의 아우 요를 받들어 즉위하도록 하였다.
* 순릉(順陵): 경기도 개성에 있음.
李齊賢贊曰 羽父(우보)ㅣ 請弑桓公하고 將以求太宰한데 隱公은 不聽하고 亦不討之러니 終致蔿氏之禍라 王規之譖兩王弟도 亦羽父之意也온 惠宗不致之罪하고 顧使居左右하니 其免於袖刃壁人之謀ㅣ 可謂幸也라
이제현(李齊賢)이 찬(贊)하기를, “우보(羽父)가 환공(桓公)을 시해하도록 청하고 태재(太宰 관명(官名))가 되기를 요구하였는데, 은공(隱公)은 듣지도 않고 그를 토죄하지도 않더니 마침내 위씨(蔿氏)의 화를 입게 되었다. 왕규가 두 왕제(王弟)를 참소한 것 역시 우보의 뜻과 같았는데, 혜종이 그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측근에 있도록 하였으니, 칼을 감추고 사람이 벽 속에 숨었다가 왕을 해치려던 그 음모를 면한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 羽父 請弑桓公 將以求太宰: 노(魯) 나라 환공이 적자(嫡子)이나, 아직 어리므로 그 서형(庶兄)인 은공이 임시로 임금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우보가 은공에게, “내가 공자(公子 환공)를 죽일 터이니 태재(太宰) 벼슬을 주시오." 하였다.
* 終致蔿氏之禍: 은공이 우보의 말을 거절하자 얼마 후에 우보가 은공을 위씨의 집에서 죽인 일을 말한다.
時는 去太祖棄代ㅣ 甫耳하여 規之不義而得衆하니 已能如漢魏之曹馬耶아 其未有以竄殛之는 何也아 嗚呼라 小人之難遠也ㅣ 如此하니 其可不戒哉아
이때는 태조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왕규가 불의(不義)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으니, 이미 한(漢)ㆍ위(魏) 시대의 조씨(曹氏)ㆍ사마씨(司馬氏)와 능히 같을 수 있었던가. 그를 내쫓거나 죽이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아, 소인을 멀리하기가 이토록 어려우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 漢魏之曹馬: 한(漢) 나라 말기에 조씨(曹氏)의 세력이, 위 나라 말기에는 사마씨(司馬氏)의 세력이 임금보다 강하였다.
○ 己酉에 王規ㅣ 殺大匡朴述煕하다 述煕는 性勇敢하여 年十八에 爲弓裔衛士하고 後事太祖하여 累樹軍功하고 受遺命輔惠宗이라
○ 기유일에 왕규가 대광 박술희(朴述熙)를 죽였다. 술희는 성품이 용감하여 나이 18세에 궁예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며, 후에 태조를 섬겨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유명(遺命)을 받아 혜종을 보좌하였다.
及惠宗寢疾에 遂與王規로 相惡하여 以兵百餘自隨한데 王이 疑有異志하여 流甲串(갑곶-京畿道 江華)이러니 規ㅣ 因矯命殺之하다 後諡嚴毅하고 贈太師하다 配享惠宗廟庭하다
혜종이 병환이 나자, 드디어 왕규와 서로 미워해서 군사 백여 명을 데리고 다녔는데, 왕이 그가 딴마음을 품었는가 의심하여 갑곶(甲串 경기 강화(江華))으로 귀양보냈더니, 왕규가 이어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 후에 엄의(嚴毅)란 시호를 내리고, 태사(太師)를 증직하였다. 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교명(矯命): 임금의 명령(命令)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내리던 가짜(假-) 명령(命令).
○ 王規ㅣ 伏誅하다 初에 王知規逆謀하고 密與西京大匡式廉으로 謀應變이라 及規將作亂에 式廉이 引兵入衛하니 規不敢動이라 竄規于甲串이라가 遣入追斬之하고 誅其黨三百餘人하다<高麗史節要>
○ 왕규가 처형을 받았다. 그전에 왕이 왕규의 역모를 알고 은밀히 서경(西京)에 있던 대광 왕식렴(王式廉)과 모의하여 변고에 대비하게 하였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호위하니,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왕규를 갑곶으로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뒤쫓아 보내어 그를 베어 죽이고, 그 도당 3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