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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재의 2011년을 돌아보다.
아담한 연못이 하나 생겼네.
해와 구름의 그림자가 수면 위를 오가네.
어찌 이리도 깨끗할 고
연못의 상류에서 깨끗한 물이 흘러들기 때문이라네.
주희의 한 싯구처럼 지난해도 금년도 또 다가올 내년도, 나는 늘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지난날의 그 활기차던 모습과 가졌던 웅지들도 어느 사이 다 떠나보내고, 이제는 모든 이유와 구실을 그저 나이타령을 하는 처지로 변해버렸다.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주려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감언이설에 혹하지 않는 나는, 본시 태어나길 역마살에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도 나왔는지라 그저 씨익 웃어넘기고 만다.
모든 사람들이 의기소침에서 벗어나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하건만, 딱 한사람만은 ‘절대 하나도 안변했어.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모조리 남을 기만하는 거야.’ 하면서 나를 좀 더 기를 죽이겠다고 몇 가지 생활의 기본을 들어 늘 타박을 일삼는 그분의 폭정을 항상 감수하고 있다.
‘중간에서 만나. 뭐 좀 사게 농협으로 와.’ 하면 난 부리나케 땀복에 등산화 신고 작은 배낭하나 메고 나무 작대기 하나 툭툭 차면서 눈 내리고 살벌하게 바람이 부는 신작로를 하염없이 걸어 십리길이 넘는 수안보까지 내달린다. 동네밖에 뛰어다니는 멍멍이들이 참으로 부럽다. 눈 속에 놀자니 얼마나 좋으련만, ‘* 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암튼 솔찮게 그런 일을 종종 겪으며 산다.
한 해를 보내는 시점에서, 그래도 돌아보니 참으로 감사할 일이 많았던 한 해였다. 무엇이든 더 보탤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저 내년도 올해만 같았으면 나름으로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올 한해를 정리해본다.
2011년을 들어 최고의 기쁨을 들자면 당연히 나의 아들이다.
나만의 애칭으로 ‘아덜’이라 부르는 짱구가 어느덧 자라 당당한 성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내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한 남자의 시선으로도 ‘참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생각이 늘 내 가슴에 가득하다.
고교생 때 대학 1년을 마치면 군대부터 간다고 하던 녀석, 실제로 딱 그시기에 자원해서 현역을 최전방에서 무사히 마쳐내고, 카나다에서 1년 있으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사방팔방을 죄다 쑤시고 다니고, 모 단체에 선발되어 졸업여행을 동유럽으로 한 달 가까이 돌아다니다 왔다.
주변에서 취업을 문제로 유급들을 자청하는 때에, 지난해 9월부터 툭하면 독립을 선포하는 아덜을 꼬득이느라 흘린 땀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이제 떠나보내면 마지막이겠다 싶어 ‘등록금이 아까우니 학기와 졸업은 제대로 마치자’고 통 사정을 해야 했다. 사실은 등록금이래야 사립대를 다니면서 전 학년을 통 털어 국립대학의 절반 정도로 마쳤으니, 부족한 애비가 아덜에게 갖는 고마움이야 이루 형용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토익 900점을 넘으면 책임지고 데려간다던 외삼촌을 마다하고, 900점이 넘었기에 제 맘대로 골라간다 하던 녀석이, 2011년 1월 첫 주에 모 외국회사 연수원에 입소를 했다.
녀석은 독립이라 우기지만, 난 달랑 하나뿐인 품안에 자식을....... 새장 속에 새가 날아가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봄 계절엔 사회속의 인간관계 때문에 나름의 고충이 있는 듯싶더니 지금은 온통 제세상이 되었다.
‘아빠. 눈이 내려요. 외출 좀 하셔서 영화도 보시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아덜. 난 눈도 비도 다 싫어졌다. 아덜이 운전하고 오가는데 견뎌낼 수 있고, 아덜이 원하는 만큼만 내렸으면 좋겠다.’
어느새 난 참 많이 변했다. 남 모르게 저절로 변해갔다. 그런데 딱 한 모시깽이만 아니라고 날 윽박지른다.
- 책 많이 읽고, 친구 많이 사귀고, 여행 많이 해라가 가훈이라면 가훈이고, 아덜에게 주는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 몇 가지 추가하기로 했다.
- 음주운전하면 부자지간에 의절할 것이며, 여하간 노름만은 배우지 말 것이며, 당장 어떻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담배는 백해무익이야 라고 은근히 협박을 하곤 한다.
사실 음주운전의 본보기야 시범을 보인 것이 아빠지만 시절이 변했고, 아직 복권을 안 사본 고지식한 가문에 노름은 당연지사고, 문제는 군대서 배워온 아덜의 흡연. 이제껏 담배를 안 피워본 아빠가 협박을 한다. 아무래도 ‘아덜을 이해하려면 내가 담배를 배울까봐.’라고. 어이없어 하는 녀석이 스스로 시한을 금년으로 했으니, 며칠 후가 기다려진다.
- 내 아덜 짱구. 웬만한 연예인은 왔다가 울고 간다. 어려서부터 항상 주변에 뇨자들이 모여들어 지덜 엄마는 은근히 걱정이지만, ‘아덜인데 모 어뗘? 딸도 아닌데.’
- 닮는다 닮는다고 어쩜 제 애비하고 저렇게 닮느냐 하는 소리가 내겐 과히 싫지가 않다.
무엇이 그리 좋으냐고 물으시면........ 그냥 웃지요. 헤헤헤헤 하고.
오월엔 송사 하나를 끝냈다.
차라리 보지 못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들었고 알았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본시 생겨먹은 심보가 그렇게 태어난 것을.
참으로 악덕한 사람에게 어찌 보면 별로 상관도 없는 일에 올인을 선언했다. 의기라 하긴 좀 그렇고 치기라 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주위에 관심과 우려 속에 남의 일에 총대를 멨다. 2010년 11월에 시작한 송사가 오월에 승리로 끝이 났다. 법의 언저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경험했다. 악덕한 사람에게 형을 받게 했고, 2억 8천만 원을 받아서 피해자 이백여 명에게 해당 금액만큼씩 모두 돌려주고, 67만 4천 원을 내 몫으로 받았다.
땅 팔아다 헛장사 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종국에 남은 것은 허망함이었다. 바르고 감사함은 아주 잠시이고, 늘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또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무심하게들 살아가고 있다. 괜한 일을 했나 싶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 한 가지는, 불호령을 내렸을 그 분께서 근 6개월을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하시더니, ‘잉간아. 나이 먹었으면 그 승질머리 죽일 때도 되지 않았니? 그래도 암튼 이번일은 이기길 잘했어.’ 해준다. 땅 팔아다 바친 거 용서해 주려나 보다.
유월에 접어들어 스멀거리듯 피어오르는 역마살을 주체 못해, 서둘러 울릉도 답사팀을 급조해서 묵호항을 뒤로하고 바다로 떠났습니다. 일전에 두 번이나 시도했다가 하늘의 도움이 없어서 좌절됐던 여행이었습니다. 추산에 자리를 잡고 성인봉도 오르고 삼일 간 온 울릉도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팀에 칠십이 넘으신 형님과 거의 가까우신 형님. 저보다 서너 살씩 위인 두 분 포함 다섯이었으니, 서둔 일정에 고령이신 분들 많이 고달프셨을 것입니다. 제 인맥들이 평소 세월을 초월하는 편이다 보니........
여행일정 내내 하도 날씨가 좋아 횡재거니 했더니만, 자고 일어나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파도가 수상쩍더니만, 배가 못 뜬다고 합니다. 종일 들어앉아 문어 삶아서 술타령을 했는데, 담날은 어제보다 바다가 더 성질을 내서 또 꽝이라는 것입니다. 이역만리 타국도 아니고, 굳이 갈려면 누가 하나를 환자로 만들어서 119 헬기라도 띄워야 할 판이었는데, 그냥 더 놀아보자는 큰형님 땀시롱 또 들어앉아 술타령으로 하루를 더 보내야 했습니다. 담날은 파도며 폭우까지 더 쏟아지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왈....... ‘세상없어도 오늘은 배가 뜰 겁니다. 섬사람들도 먹고살아야하니까 배가 뜹니다. 주말 아닙니까? 이적지 발 묶어 논 사람들 돈 떨어졌으니 새 손님들 받아야 하고, 섬에서 먹을 것이라곤 나는 게 없어 죄다 육지에서 가져다 먹으니 안 굶기려면 오늘은 배가 들어와야만 합니다, 기다려 보이소.’
이 알듯 모를 듯 요상한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실로 난리 부르스를 추면서까지 험악한 상황에 어지되었던 배가 뜨더라는 것이다. 고것 참.
암튼 우여곡절 끝에 울릉도를 다녀왔다.
앞으로는 비행기 편이 있던가, 다리가 놓였던가, 아니면 내가 헤엄쳐 건널 정도 거리의 섬이 아니면 안 가려고 한다.
- 나래분지. 조금 낯선 이국적인 정취와 분위기에 한참을 머물렀다.
- 줄 곳 머물렀던 추산일가. 멋진 추억의 명소로 기억될 것이다.
울릉도를 다녀온 6월에 나는 가출을 했다. 아니 출가(出家)를 감행했다.
감히, 그 분의 으름장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짐 보따리를 대충 싸서 도망치듯 나왔다.
한적한 곳에서 고즈넉하게 그럴싸한 폼 잡으며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것을 꿈처럼 간직하고 사는 처지에, 산골의 이장께서 창고(산막)가 하나 비었으니 와보라고 하시기에 바로 이틀 뒤에 무조건 출가부터 하고보자고 일을 저질러버렸던 것이다.
그분의 진노가 엄청났으나 설마 어쩌랴 하고 버텼다.
얼마를 살벌한 분위기로 지내다가, 은근슬쩍 내심 아덜의 지원을 받아볼까 하여 아덜 페이스 북에다 사진을 한 장 올렸다. 그런데 그 일이 효과를 냈다.
낯익은 꼬마차가 올라오기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는데, 바리바리 김치며 마른반찬이며 싸들고 와서는 ‘멀기도 하네. 기름 값이 얼마니 팔자에 없는 고생을 하니......’ 종일 신세타령으로 나를 맹렬하게 공격한다.
그러더니 여름부터는 산막생활에 재미를 붙여서 뻔질나게 드나들며 온갖 참견을 다해대고 나보다 더 시골 생활을 즐긴다. 으름 따먹고 산수유 따고 남의 밤나무에서 서리도 하고, 너른 마당에 무 썰어서 말리고 늙은 호박으로 죽도 쑤고 서리 맞은 뽕나무 잎도 따고 첫눈오던 날까지 수시로 씀바귀와 냉이 캐러 다니고, 요즘은 쑥 뜯고 복분자 따고 채소밭 가꾼다고 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신다. 이것저것 하도 조르고 시키는 통에 나의 고즈넉한 꿈은 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금 나는 소조령에 산막을 차지하고 들어 앉았다. 본시가 산적이었으니 제자리에 들어있는 느낌이다. 충주까지 출퇴근에 다소 시간이 들어가기는 하나, 하루하루가 다르게 풍광이 바뀌고 자연속의 만물들이 변해가는 것을 오가는 시간에 늘 많이 느끼면서 지내고 있다.
도로위에 오가는 여정 속에는 시간도 세월도 인생도 아픔도 슬픔도 없다. 그저 무념무상의 염원을 간직하는 시간으로 오간다.
수안보가 십리 길이니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참 많고, 산책을 나서면 수옥정 폭포나 고사리 수련원 인근을 수시로 거닐곤 한다.
관문은 차로 한 육칠 분 거리로 걸어서 다니기도 하고, 자전거로 새벽길을 나서 새재 숲길을 내려달려 문경 관리소에 맡겨놓고 되돌아오는 길은 걸어서 오르고, 며칠 뒤에 차로 가서 자전거를 찾아오기도 한다. 지금 분명 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의 그분께서는 특히 여기 새재 길을 걸어서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괴산 쌍곡계곡의 각연사 초입 길을 왕복 산책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 산막에 눈이 내렸다. 산막의 주변은 눈이 좀 과하다 싶으면 제설작업도 포기하는 구도로 구간이다. 그러면 도로는 모두 비료 푸대를 깔고 앉은 나의 눈썰매장으로 변한다.
한때는 당장 나오지 않으면 아파트 팔고 아덜에게로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그분께서 요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아파트를 팔아서 충주 인근의 시골로 아예 거주지를 옮길 심산인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나의 이 산막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명분이 없지 않겠는가?
하긴 우린 가족이라고 하는 행태가 참으로 우수운건 사실이다.
달랑 세 식구인 처지로, 셋 모두가 다른 곳에서 각자의 거주지를 따로 가지고 살고 있다. 주소지도 다 다르다. 세 식구 처지에 차도 세대나 되고........ 객관적 잣대로 이거 가족이 맞나 모르겠다. 세집 살림 하느라 등골 빠진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 나름 이해는 간다.
또 그분보다 더 뻔질나게 이 산막을 드나드는 지인들이 있어 가을은 정신없이 보냈다.
지인들은 모처럼 나들이 삼아 들리지만, 여기에 사는 나는 아예 휴일이면 늘 술독에 빠져 산다. 볼 것 많고 놀기 좋고 먹을거리 많고 갖출 것은 인근에 다 갖추고 산다고 불쑥불쑥 이젠 아예 예고들도 안하고 찾아온다.
10월엔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제껏 살면서 그 분 심기를 건드린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나? 거기에다가 금년엔 울릉도를 몰래 다녀온 것이 영 마음에 걸렀다.
하여 며칠 바람 좀 쏘이자고 설레발을 틀어 길을 나선 뒤, 다짜고짜 차를 끌고 완도에서 배에다 싣고 제주도로 건너가 버렸다.
일주일을 아무런 준비된 계획이나 시간의 구애됨 없이 느긋하게 보냈다.
가장 좋다는 곳을 골라 올레 길을 서너 군데 찾아다니며 걸었고, 해안 일주며 한라산이며, 제주시과 서귀포 재래시장은 죄다 뒤지고 다녔다.
그 분이 좋아하시는 갈치를 이번 여행 내내 정말 원 없이 입에 달고 다녔다. 돌아오는 배편에서 이제 갈치도 물린다고 하더니만, 지난 장날에 재래시장 어물전 앞에서 갈치를 만지작거리더니 너무 비싸다고 돌아서며 제주 갈치 얘기를 다시 꺼내는걸 보고 웃었다.
금년 들어 내가 한 일중에는 제주도를 모시고 다녀온 것이 제일 잘 한 일인 것 같은데, 문제는 이 약발이 그리 오래 안 간다는 것과, 내년엔 이번보다 더 감동적인 일을 꾸며야만 그나마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데에 그 핵심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성탄 메시지에 아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덜.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든 게 많아지는 것이란다. 그리고 넌 이제 시작을 한 것이야.’ 라고.
‘전 아빠하고는 다를 거예요. 그러니 이제라도 아빠나 기운 차리세요. ㅋㅋㅋㅋㅋㅋ’라고 문자가 왔다.
아!!!!!!!!! 한 방에 새 됐다.
- 올레길 10코스. 말이 산책이지 코앞에 동네를 이리저리 배 배 꼬듯이 끌고 다니는 등산 코스였음.
‘아덜. 한 해의 마지막인 달에 뭐 잊은 거 없니?’
‘11월까지 워낙 빼곡하게 다 챙겨서 12월에는 별로 챙길게 없는데요?’
“아니 이 녀석이? 이젠 나가산다고 아빠보기를 영 거시기하게 취급하네?‘
“11월 한 달을 아빠와 엄마가 절 낳아주셔서 크게 감사하다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잖아. 임마. 그 연장선상에서 뭔가..........”
“아! 그것 말씀이시구나. 아침에 엄마랑 통화 했는데요? 금년은 자신의 생일에 당사자 자신이 턱을 내는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하셔서, 저도 좋겠다고 했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아빠.” 뚝!
에고. 에고.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힘든 일이었어. 바라긴 뭘 바래.
생일 하루전날 저녁상으로 감격스러운 미역국을 한 그릇 얻어먹고, 생일날 일찍 서둘러 그 분 손잡고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아덜이 시켰으니 녀석 말대로 내가 한 턱을 낼 수밖에.
왜 그런지, 언제인가부터 그 분은 슬슬 덜 무서워지기 시작하는데, 아뿔싸 아덜이라는 넘이 점점 더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이라. 그럼 정작 나는 언제 어디 가서 누구한테 한 번 무서운 척이나 대접을 받아 볼까나?
기차를 타고 정동진엘 다녀왔다. 겨울 여행을 했다.
전날부터 밤새 40cm 정도의 폭설이 쌓여 기차타고 겨울여행 제대로 한 번 했다.
산막에 돌아오니 밤 열한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자로 살아가기 정말로 팍팍해지는 것을 새삼 느끼겠다.
그래도, 그렇게 내숭을 떨던 녀석의 선물이 날 눈물짓게 만든다.
그래서, 남자로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좀 더 살아야겠다.
내가 할 것은 별반 없겠으나, 내가 봐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았지 않은가.
- 정동진의 명물이 된 그곳. 40cm의 폭설이 내려 기차타고 떠난 겨울여행의 참 묘미를 맘껏 느끼게 해주었다.
눈이 내린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부터 산골의 남정네들이 모여 이런저런 재미난 일들을 꾸며 놀고 있는데, 아덜이 찾기에 정중하게 사양하고 동네 술판에 뛰어들었는데, 아덜이 멀리 사는 여자친구를 내려오라 해서 엄마랑 외식하고 영화구경하고 쇼핑하고, 화기애애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만끽했다고 다음날 엄마가 온 종일 자랑을 해댄다.
아무래도 난 화기애매한 가장인 듯싶다.
아흔아홉에 백수를 스무 날 앞두고 떠나신 할머니가 늘 나에게 그러셨다.
‘요느무 자식. 허구헌 날 이 할매 말 안 듣고 훗날 도대체 모가 될 라고 그러니? 나돌아 다니며 쌈질도 그만 좀 허고, 이제 들어앉아 맴 잡고 책이나 좀 읽어라. 죽은 니 에미가 보면 뭐라 할 것 같으냐?’
그런데 나는 어느새 내 어머니보다 17년을 더 오래 살았다.
내 인생을 지켜보며 통곡을 하셨을 어머니 보다 훨씬 더 많은 세상을 살고 겪은 처지로, 지금 난 전혀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아덜을 바라보고 있다.
진즉이 내가 내 아덜 같은 모습으로 살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많이 행복하시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이고 또 그리 할 수도 있었든 것을.
그것이 인생이고, 인생은 리필이 없는 것을.
피플에 올리는 (충주산성)이란 글을 금년이면 어느 정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그런데 아마도 내 후년이 되어야 겨우 마무릴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내 아덜 때문이다.
젊은 날 나의 최고의 목표와 자부심은 ‘좋은 아빠 멋진 아빠’가 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나 내 바람으로 보나 그것은 별반 어려울 것이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세상에 휘둘리며 살다보니 난 좋은 아빠도 멋진 아빠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녀석이 좋은 아덜 멋진 아덜이 되어 있었다. 뒤늦게 내가 다른 아빠들과 다르게 좋은 척 멋진 척 내어주고 보여줄 것이 없어서, 나는 한 방편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훗날 언제고 내 아덜이 읽어보고 좋다고 칭찬할 글을 써서 남겨주고 싶은 게 내가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이제 새해를 맞이할 시점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난 아직 살아있을 것이고 무엇인가 긍정적인 생활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내겐 너무도 충분히 있으니까.........
2012년은 좀 더 활기차고 바쁘게 살아야겠다.
2011년 12월 28일. 소조령 산막에서. 피안재.
첫댓글 짱구가 벌써 저렇게 컸구나.!!!!!
짱구 엄마는 또 얼마나 변했을까?
그러고 보니 야련.... 우리가 못 본지도 꽤 오래 되었다.
변명해 봐야 이건 너무 무심한 거다.
그날 자네가 준 러브체인은 여전히 기억 속에 있는데...,
'해는 서산에 지는데 갈 길 먼 나그네 몸둘데가 없고,
기다리지 않는 세월은 반백만 남기는구나...'
본시 태어나길 역마살에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도 나왔는지라 그저 씨익 웃어넘기고 마는----- 요거..평화라고 아는사람만 아는 대목입니다...피안제님 !!
글을 읽으면서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군요.하여간 재미나게 사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네요.새해에도 화이팅!!! 입니다.
그 남자가 살아가는 법......참 구수한 재미로 잠시 함께 했습니다. "그 분"을 알듯, 모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