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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 詩 硏究
- '이야기'적 특성을 중심으로 -
박 경 순
Ⅰ. 들어가는 말
이 글에서 1930∼40년대에 활동한 백석 시의 '이야기시'적 특성을 지닌 시를 중심으로 '이야기시'의 개념 규정을 하고 그의 '이야기시'가 고향인식과 공동체적 친근성이 어떻게 형상화 하고있는가를 고찰하는자 한다. 이야기는 줄거리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재현하는 모방적 양식이며 화자와 대상, 즉 사건 사이의 거리 확립을 그 본질로 하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시에는 고향의 풍정(風情)이 섬세하게 재현되어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친근성이 밀도있게 형상화 되어 있다. 백석 문학세계의 시적 화자는 유년 세계의 시적 공간에 있으며, 그곳에서 자아를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련의 기행시에도 자연과의 매개를 통해 이런 그의 시적 형상화의 노력이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백석 시에서 이야기 즉 서사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로 시장르의 특징적 요소인 서정성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인생사의 깊은 문제를 '이야기시' 형태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백석이 등장하기전 한국 시단은 세 개의 유파에 의해 판도가 결정되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김기림이 주도한 주지주의계 모더니즘시다. 이들은 가능한 한 선명한 심상을 제시하고자 했고, 명증한 말씨로 대상을 부각 시키기에 힘썼다. 두번째 유파는 카프의 발전적 전개 형태에 해당되는 현실주의 흐름이다. 일제 강점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마르크스 세계관에의 지향을 드러낸 카프 계열의 상당수 작품들이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일방적인 전용으로 시와 문학을 심하게 변질 . 무력화시키고 만다. "카프의 행동원칙에 따라 제작 . 발표되는 시는 이데올로기의 앙상한 잔해로 선동 선전을 위한 전단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대 시문학에서 리얼리티를 획득하려는 형상화 노력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외에도 서술구조를 택하여 시간과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내용을 제시하는 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술구조의 개념은 서술성, 서사성, 서술시 (본 글에서는 서술시보다‘이야기시’개념으로 사용), 서사시 등에 나타나는 시문학의‘서사 지향성'에 직결된 것으로, 시의 진술이 이야기나 사건을 수용하여 시의 내용을 전달하는 'narrative structure’를 가르킨다. '이야기시'적 특성을 서정시에 원용하여 서술구조를 빌어 사건이나 이야기가 주제를 집약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보이며, 소설에서 이룩하기 힘든 시적 정서에 호소하는 시 장르 특유의 시적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시는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서술구조의 변별성에 따라, 사건을 진술하는 사건시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는 서사적인 시의 두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백석의 경우는 대부분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이야기의 구조를 통하여 소설적인 서사 진행을 보이면서 대상을 좀 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이야기와 주인공을 설정하여 이야기의 진행을 시인이 간접적으로 진술하는데, 이는 때로 과감한 삭제가 필요하게 된다. 여기에서 독자는 많은 상상력을 얻게 된다. 김기림(金起林)이 지적한 대로 백석시의 특징을 '유니크(unique)'한 점, 다시 말해 백석 시작품의 '독특함' 그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착안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방언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시에 입각한 그의 시세계이다. 어느 한 특정 부분에서 그러한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 전반에서 '이야기시'적 특성을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그의 시적 노력이 백석시 전반에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이 글은 그의 시의 '이야기시'적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야기시'의 시적 형상화 양상을 셋으로 나누어 분류하였는바, 첫째는 고향 인식과 공동체적 친근성이다. 그의 시 전반에서 알 수 있듯, 고향 인식은 그의 시에 있어서 절대적이다. 둘째로 주목할 것은, 유년 세계의 시적 공간과 자아 회복의 양상을 볼 수 있다. '기억'을 통해 어린 시절로 돌아간 화자에 의한 시적 형상화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셋째, 여행을 통해서 본 현실 인식이다. 시인은 결코 값싼 낭만에 함몰되지 않는다. 당대의 피폐한 식민지 현실을 여행하는 시적 자아를 통해 깊이있게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분류한 백석시의 시적 형상화 방법으로 '이야기시'의 형식을 빌어 표현한 것은 김윤식도 지적했듯 현실 앞에서 절망감을 느껴 고향을 떠난 유랑민으로서 그 심리적 허무감을 '이야기시'의 새로운 형식을 채택함으로써 초월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Ⅱ. 본 말
1. '이야기시'의 개념
'이야기시'를 먼저 논하기에 앞서 '이야기시'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임화(林和)의 시 「우리오빠와 화로」를 읽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 김기진(金基鎭)은 처음으로 '단편서사시'를 부각시켰다. 그는 이 시를 세밀히 분석하면서 프로시가가 나아갈 길이 '단편서사시'라 하고 이 양식은 프로시가의 참된 모습이자 동시에 대중화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논증하였는바, 이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기존의 서정시로는 급변해 나가는 서사적 현실의 복잡성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프로시의 한 방향 모색으로 이는 당대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시적 노력의 성과였다. '단편서사시'가 서정시의 발전 과정에서 서사시의 소설적 요건 - 스토리와 사건의 요건-을 어느 정도 소재상이나 문체상으로 지니면서 인상을 선명하고 간결하게 압축하여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기진(金基鎭)은 '우리시의 양식 문제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임화(林和)의 시 「우리오빠와 화로」를 분석하고 있는데 그 특징을 다음 네 가지로 들었다. 현실적 실제적 사건을, 객관적·구체적으로 파악하여, 통일된 정서로, 생생한 소설적 사건을 안전에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들어 프로 예술은 현실적 . 객관적 . 실제적 . 구체적 요구에 따라 시의 형식은 단편서사시의 형식을 요구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임화(林和)의 이 시가 자신의 이론을 증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작품적 사례로 들었다. 임화(林和)가 시도한 단편서사시의 시적 양식을 기폭제로 하여 한국시의 진정한 방향성과 대중성 획득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것이 하나의 강력한 시사적 경향성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성 서정시’로써는 미처 급변해 가는 서사적 현실의 복잡성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일종의‘양식적 자각’이 매우 진지하게 행해진 결과로서 비교적 선명한 골격을 지닌 일종의‘이야기시’를 지향하는‘시의 서사화 경향'은 악화일로만을 치닫는 당대의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마땅히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강력한 현실적 요청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야기를 도입한 시를 지칭하는 용어로 '단편서사시, 이야기시, 서술시, 담시' 등 여러 용어가 있으나 '시에서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취급하다 보면, 즉 시에서 서사 지향성을 밀고 나가다 보면 이야기가 산출된다. 여기에서 이야기시는 서사 지향성이 강하게 발현된 시, 즉 처음과 끝을 갖는 어떤 변화 발전하는 사건이 한편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 시'라는 개념에 따르고자 한다. 시인이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취급하는 방식은 이야기시와 서사시의 형식을 통해서라 할 수 있는데 백석의 경우 주로 이야기시 형식을 통해 시의 형상화를 모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특히 소설의 경우는 유념할 때, '이야기'란 줄거리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재현하는 모방적 양식이다. 그리고 화자와 대상, 즉 사건 사이의 거리 확립을 그 본질로 하는 객관성의 양식으로 화자가 청중에게 전달하고 보고하는 양식이다. 인간은 원시사회로부터 이야기를 지어왔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구비전승 되어 왔는데, 우리는 이렇게 구비 전승된 이야기를 '설화'라 한다. 이는 한국 시가의 전통이 되고 있다. 고대 삽입 가요인 「 공무도하가」를 비롯하여 「처용가」,「헌화가」,「서동요」등 신라향가도, 「쌍화점」,「만전춘」,「정읍가」등의 고려속요는 물론 조선시대의 많은 사설시조 및 우리의 대표적 민요인「아리랑」도 이야기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시에 있어서 '이야기'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시적 상상력에 구체성을 부여해주는 하나의 뚜렷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은 직접적인 감동 요인으로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이야기속에 사람들의 마음이 스며 있으며 긴 세월을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일수록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그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쉽사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시에 있어서 시인 자신이 사상 . 감정의 직접적 서술보다는 서술적인 구조로 형상화된 사건이나 이야기를 통하여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시'의 도입은 일제 강점기의 현실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삶의 모습들을 형상화함에 있어 주관화의 경향에 함몰하지 아니하고 시적 대상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시적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정서를 전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독자의 감흥도 직접적으로 시인의 정서에 동화하지 않고 시 자체가 주는 객관의 정서에 독자가 반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백석의 이야기시에서는 하나의 이야기 줄거리가 담겨져 있는데 어린 시절 고향에서 평온한 삶을 누리던 서정주체가 암울한 식민지 시대속에 성인이 되어 공동체의 삶에서 소외되는 갈 등을 겪으며 우랑하던 끝에 자신의 삶의
지표를 깨우치게 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또한 서정적 주체는 객관화된 현실이나 인물을 일정한 거리에서 보고 듣고 전해주는 화자의 위치에 서서 이야기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2. 시적 형상화 양상
이 장에서는 백석의 '이야기시'의 형상화 양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그런데, 백석 시세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삶의 역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래에 그 개인사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백용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기행(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이다. 1929년 개칭된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년여의 문학 공부에 힘써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신춘문예)에 당시로서는 최연소인 19세의 나이로 〈그 母와 아들〉이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된다. 이어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같은해 일본의 주요 사립대학에 속하는 기독교 재단의 청산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전공한다.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의 「臨終 체홉의 六월」과, 러시아 비평가 티.에스.마리키스의 논문 「'죠이쓰'와 愛蘭文學」을 번역하여 발표한다. 백석은 마리키스의 논문에서 많은 공감대를 찾았는데 애란의 훌륭한 작가들의 방법론을 습득하여 독자적인 방언을 중시함으로써 평안도어(平安道語)가 한국적인 시어가 될 수 있다는 시적 인식에 도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곳에서 기자와 계열 잡지사인 『여성』에서 편집일을 하면서 1935년 8월 31일 조선일보지상에 첫 작품 「정주성」을 발표한다. 그후 계속하여 조선일보사에서 창간한 『조광』지에 「산지(山地)」(1935), 「주막(酒幕)」(1935), 「비(雨)」(1935), 「나와 지렝이」(1935), 「여우난골族」(1935), 「통영」(1935), 「흰밤」(1935) 등을 발표한다. 특히 그는 서정성이 뛰어난 「늙은 갈대의 독백(獨白)」이란 산문을 발표했는데, 거의 시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한 이 글은 갈대의 일생을 매우 서정적으로 읊고 있다. 백석은 1936년에 이르러 『사슴』이라는 제목의 첫시집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당시로는 최고의 호화판 시집을 간행했다. 백석이 활동하던 이 1930년대 중반이란 문학사적으로 보면 카프가 해산계를 제출하고 문단의 이면으로 잠복하던 때이며, 시문학파로 시작 활동을 전개하던 정지용(鄭芝溶)과 김영랑(金永郞)이 각 각 첫 시집을 출간하던 때이다. 또한 이효석(李孝石) . 박태원(朴泰遠) . 김유정
(金裕貞) 등이 이른바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순수문학적 경향을 문단의 분류로 이끌어 들이던 때이며, 최재서(崔載瑞) . 김기림(金起林) 등의 영문학자들에 의하여 모더니즘 이론이 소개되던 때이기도 하다.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있는 동안 그곳 출신의 ‘김자야’라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3 . 4년간 둘의 사랑은 백석의 생활과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최근 출간된 김자야의 『내사랑 백석』에서 볼 수 있다. 교사 노릇도 1938년 사임하고 1939년 다시 서울로 와 『여성』지에 편집일을 담당하다 그해 말 서울을 떠나 만주의 신경 (지금의 장춘)으로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김자야 여사에 의하면 백석이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간 것은 그가 부모의 강권에 의하여 이해에 두 번째 결혼을 치르는 등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 등으로 심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려 할 때 김자야 여사에게 같이 가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녀는 정식으로 결혼을 한 두번째 여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논리에 부담을 느껴서 백석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백석만을 만주로 보냈다고 한다. 그가 왜 직장과 가족 및 문우들을 버리고,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조차 뿌리치고 만주에 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백석은 만주의 신경으로 떠난 이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발행된 당시의 문학지 『문장』이나 『인문평론』 등에 「북방(北方)에서」(1940), 「흰 바람벽이 있어」(1941) 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조광』지나 『야담』지 같은 데는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즈음 백석의 작품에는 북방의 서늘한 분위기와 뿌리를 읽은 당대의 지식인들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담겨 있으며, 백석의 작품중 절창이라 불리우는 작품, 예컨대 「허준(許俊)」(1940), 「杜甫나 李白같이」(1941) 등이 이에 포함된다. 백석은 만주로 간 후 신경시 동삼마로(東三馬路) 시영주택의 '황씨집'에 살았으며 그후 측량 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등을 하다가 안동의 세관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측량보조원이나 측량 서기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나 의문이지만, 1941년 4월 『조광』지에 발표한 「歸農」을 살펴보면 측량관계일
뿐 아니라 남의 밭을 얻어 소작인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신의주로 거처를 옮겼다가 이내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평안북도 정주로 간다. 그곳에서 조만식 선생의 러시아어 통역 비서를 하며 1946년 평양의 술집에서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고, 마야코프스키의 시들과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江』 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그후 김일성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는 그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지금 알려진 바와는 달리 중국 한인촌에 머물다가 전쟁 후 숙청 당해 함경도의 협동농장에서 일하며, 서정시를 계속 써 오다 1963년 숨졌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백석은 한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을 하며 삶을 마무리 하였으며 그의 이야기시는 서정양식으로는 미처 두루 포괄하기 어려운 당대 현실의 모습을 여러 가지 형태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시인의 뚜렷한 노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시의 시적 형상화 양상은 크게, 첫째 고향 인식과 공동체적 친근성으로, 둘째 유년 세계의 시적 공간과 자아회복 양상으로, 셋째 기행시와 현실인식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그의 시적 형상화 양상중 고향인식과 공동체적 친근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고향인식과 공동체적 친근성
고향인식의 시적 양상
우리 민족의 삶의 실체를 탐구하기 위해 그의 시에 절실하게 투영(透影)된 것은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우리의 고향이었다. 이 고향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원형적 모습이 잘 보존돼 있고 전통적인 풍속이 그대로 온존되어 있는 시적 대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백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이야말로 그의 시작 활동의 가장 풍요로운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고향인 평북 정주는 그런 의미에서 백석에게는 행운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인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현실을 노래한다. 어딜가나 고향은 그런 점에서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고향인식은 막연한 향수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이 강력한 기반을 이룬다. 그는 이같은 고향마을을 무대로 거기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탐구하는 고향은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전 우리민족의 고유의 삶의 모습이 그래로 보존된 원형적인 존재이다. 백석시에서 인식하는 형상화 방법으로 특히 평안북도 방언의 사용과 음식물 이름의 사용이 한눈에 두드러진다. 고향이란 어느 시인에게나 중요한 창작 모티브로 작용한다. 그러한 경향은 시인의 현재적 삶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할 때 더욱 그러하다. 고향의 시적 형상화 방법에는 고향을 중심으로 펼친 방언 사용과 갖가지 토속적 소재 사용을 들 수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어린시절의 고향에 대한 재현 작업이 그 당시 백석에게는 가장 절실하고도 유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백석이 고향을 인식하는 양상은 아무런 파괴가 없는 풍족한 고향을 노래하는 방법과, 파괴되고 일그러진 암담한 일제 강점기의 비극적 형상을 드러내는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가. 풍족한 고향마을의 형상화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
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季女 작은季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
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
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
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고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
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
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
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
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
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
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셋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族」 전문 -
풍요롭고 아무런 파손됨이 없는 고향의 마을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위에서 열거한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엄매, 아배를 따라 명절을 새러 진할머니집에 놀러가는 시적 화자의 행복한 모습이 첫연부터 그려지고 있으며, 이 행복은 마지막 연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로 이어진다. 이 시에서는 청자는 나타나지 않고 화자가 명절날의 풍속을 다채로운 기법으로 형상화 하고 있는바, 우선 눈에 띄는 시적 특성으로는 '엄매', '아배', '고무', '아르간' 등의 방언을 들 수 있다. 도시 문명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전통적인 방언의 사용으로 민속 명절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잔디, 고사리 등 음식물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의 많은 시에서 두루 산견(散見)되는 시적 현상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 나는 명절날 일가친척이 모인 가운데 화목하게 지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그대로 앞에서 보여주듯 이야기해 주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눈앞에 보이듯 진술한 시제(時制)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문장의 종결어미가 '놀았다', '잤다'가 아니라 '논다'와 '잔다' 등의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재형의 사용은 시적 자아가 지나가 버린 사건을 독자들에게 단순히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현재라는 것은 지속의 개념 안에서 '창조의 의미', '발전의 의미', '미래를 지향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현재 시제에는 크게 (1) 순수 현재 (2) 현재 진행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순수 현재는 동사의 기본형을 의미한다. "나는 가다"라는 말속에서 "가다"라는 동사로 나타난다. 현재 진행형은 "나는 간다", 나아가 "나는 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순수 현재가 '순수한 수행'을 의한다고 보면 현재 진행형은 '지속적 수행'을 의미한다. '지속적'이라 함은 곧 영원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연에서는 큰집으로 가는 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되고 있다. 개가 시적 화자이면서 주인공인 나를 따르고 나는 엄매아배를 따르고 엄매아배는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집으로 가고 있음을 적고 있으며
연에서는 이 시가 서사적 구성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나타난다. 말을 더듬는 곰보인 신리고무,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토산고무, 해변으로 시집을 가 과부가 된 큰골 고무, 술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삼촌 등은 여우난골족의 가족사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는 백석의 가족사와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연에서는 후각과 촉각의 이미지가 연결되면서 연과는 달리 대상이 매우 밀접한 환기력을 갖고 회복되면서 동적 분위기가 유도된다.
연에서는 동사들의 의미가 연결되는데 "∼고 ∼고 ∼고"의 부사어 나열이 동시에 연결되는 문장이 3개가 병치되는데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상응하는 순차성을 보여주면서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율동적을 표현하고 있다. 즉 "고"의 중간운이 반복적으로 구사되면서 일가 친척들의 소개에 대한 진술과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속도감있게 표출되었던 것이다. 각연은 서로 평행선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편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구도는 어느 한 연이나 어느 한 구절을 중심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무게로 각연이 대등하게 평행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작품으로는 「三防」, 「고방」, 「여우난곬」, 「山地」 등을 들 수 있으며 「오리」, 「연자간」, 「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등에서 풍족한 고향마을을 찾아볼 수 있다.
나. 고향마을의 비극적 형상화
녯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
이었다.
- 「흰밤」 전문
이 시에서는 한 수절과부가 목을 매어 죽은 사건을 넣어서 긴 이야기적 요소를 이미지즘의 기법을 사용하여 매우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절과부라는 인물의 설정 하나만 보더라도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을뿐 아니라, 그 수절과부의 자살이라는 사건은 이 시가 다른 시에 비해 비록 짧다하더라도 시 속에 많은 이야기시적 요소가 농후하다 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의 처리는 매우 말끔하게 독자의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한다. 드러나지 않는, 관찰자로서의 화자는 그림을 그리듯 옛 성에 떠오른 달과, 묵은 초가 지붕 위에서 달처럼 하얗게 빛나는 박과 목을 매어 자살한 수절 과부의 이미지는 푸르스름하게 느껴질 정도로 흰빛깔이란 점을 유추해 볼 때 단순하지 않은 고향을 느낄 수 있다. 흰색을 표현하는 그의 시에는
수리취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쓸쓸한길」부분
불을 끈 방안에 횃대의 하이얀 옷이 멀리 추울 것 같이
-「머루밤」 부분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준 개비린내가 온다
-「비」 전문
무이밭에 힌나뷔 나는 집 밤나무 머루넝쿨 속에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彰義門外」부분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萬年녯적이 들은 듯한데
- 「湯藥 」부분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膳友辭」부분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부분
등 여러 작품들을 들 수 있다. 비교적 많은 시에서 '흰색'을 나타내는 시어를 썼는데 '흰색'은 시인 백석의 정서를 표현한다. '흰색'은 순수함과 청정함을 의미하는 반면 쌀쌀함과 냉혹함의 정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당시 백석의 황량한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
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
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모닥불」전문
시인에 눈에 비친 고향은 한없이 풍족하고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핍되고 훼손된 상실된 고향 바로 그것이었다. 위의 작품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적 화자가 보이지 않는 청자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 견지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연에서는 각종 사물들 -새끼오리 . 헌신짝 등-이 열거하는 방식을 취하고 연에서는 살아있는 인간과 동물이 열거된다. 연에서는 어느 한 쪽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대등하게 강조하는 열거식 병렬법을 사용하고 있다. 열거식 병렬법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의도, 또는 개인적 욕망을 시 속에 표출하지 않고 좀더 객관적으로 대상을 표현하고 있다. 연에서는 모닥불의 주체, 즉 타는 물질을 열거하고 연에서는 모닥불을 쪼이는 인간과 동물을 열거함으로써 연과 연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의 인물은 특별나게 잘나지도 않은 그야말로 극히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이러한 이웃들이 추워서 모두 모여 따뜻함을 함께 공유하고자하는 공동체의식을 고귀하게 여기는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모닥불 안에는 "딸라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진 몸뚱이"만 있는 할아버지의 슬픈 이야기가 남겨 있다는 결말에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비단 할아버지의 개인사가 아니라 모닥불 주위에 모인 재당 . 초시 . 더부살이 아이 등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모닥불이라는 현재의 대상에 다양한 개체들이 갖는 삶들을 투영시켜 암담한 고향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주홍칠이 날은 旌門이 하나 마을 어구에 있었다
'孝子盧迪之之旌門'-몬지가 겹겹이 앉은 木刻의 額에
나는 열 살이 넘도록 갈지字 둘을 웃었다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가득하니 꿀벌들이 많이 날어드는 아츰
구신은 없고 부헝이가 담벽을 띠고 죽었다
기왓골에 배암이 푸르스름히 빛난 달밤이 있었다
아이들은 쪽재피같이 먼길을 돌았다.
旌門집 가난이는 열다섯에
늙은 말꾼한테 시집을 갔겄다
- 「旌門村」전문
이 시에서도 고향은 늘 충만하고 자족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 또한 자기의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옆의 사람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하듯 진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문(旌門)이란 충신 . 효자 . 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의 집앞에 세우던 붉은 문인데, 그 정문의 칠이 낡은 것으로 보아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어떨 것인지를 일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연에서 이 시의 배경이 된 정문촌(旌門村)을 회상하고 있으며 연에서는 낡은 정문촌을 구체적으로 폐허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시적 화자는 유년으로 돌아가 정문에 쓰인 두 개의 "之"자(字) 글씨에 대한 웃음의 행위를 보여준다. 시적 화자는 유년이 되어 웃지만 시인인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성인으로 그것이 단지 재미나서 웃지는 않는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연과 연에서는 유년 화자로 하여금 공포심을 유발하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폐허가 된 정문촌이 아이들에게는 무서움의 공간인데 시각과 후각의 이미지를 이용해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엉이의 심상찮은 죽음과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은 배암만으로 된 정문 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움의 공간일 수 있다. 그래서 유년의 시적 화자인 '나'는 그 정문촌(旌門村)을 피해서 멀더라도 돌아간다. 연에서는 '가난이'라는 인물과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한때는 번성했던 정문촌의 몰락을 진술한다. 한때는 번성했던 정문촌의 딸이 '늙은 말군'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만으로도 독자는 많은 상상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말하자면, 이야기적 요소에 이미지즘적 표현이 중첩되어 묘한 시적 광휘를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는 특히 시제와 시선의 변화도 아울러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은 다른 연에서의 과거 시제적인 시적 표현과는 다른 것으로, 이를 통해 '가난이'의 평범하지 못한 삶이 제시되고 정문집에 대한 유년의 공포나 뜻모를 웃음이 사실은 이러한 삶의 이야기들과 직결되어 있음을 환기시키는 일종의 시적 장치(appratus)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의 진술은 결코 정적이지 않은 그의 고향이다.
공동체적 친근성
백석의 시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한편의 시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고향을 노래함으로써 지금 현실과 어린시절의 고향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또 그것을 통해 우리민족이 느낄 수 있는 공동체적 친근성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공동체의식이 시 속에 어떻게 담겨져 있는가를 다음 작품들을 통해 논해보기로 한다.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
록 남어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찰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
부산적을 께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
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은 소신 같은 짚신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녯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 「고방」전문
바슐라르에 의하면 모든 구석은 존재의 칸막이로서 이미지들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곳이다. 여기에 '구석'은 '공간'을 의미하는데 하르트만은 '공간'을 '실재공간', '직관공간', '기하학적 이념공간' 등으로 분류하였다. '실재공간'은 실재적 자연이 전개되는 차원으로서의 공간을 의미한다. '직관공간'은 자연을 직관하는 우리 의식의 형식으로서의 공간을 말한다. 점의 운동으로 선이, 선의 운동으로 평면이, 평면의 운동에서 입체가 성립되는 3단계 연장의 공간이 존재한다. 고방이란 온갖 세간 밑천들과 곡식들과 조상때부터 써오는 집안일에 필요한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는 곳으로서, 남아있는 공간은 구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백석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정한 '미학적 거리(aesthetic distance)’두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현상적 화자는 존재하지만 자신의 너절한 감정을 표현치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1930년대 이미지즘의 영향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시적 화자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연에서는 송구떡이 오래 남아 있었음을 회상함으로써 고방을 끌어올린다. 연에서는 삼춘이 밥보다 더 좋아하는 찹쌀 탁주가 있고 어린 나와 사춘은 삼춘의 흉내를 내며 시큼털털한 술을 먹는다는 내용을 유년의 화자가 등장하여 진술한다.
연과 연에서는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등장하며, 비록 이야기는 못하지만 그 주위에는 '파리떼'같이 아이들이 모인다. 이미 아이들의 의식 속에는 이야기가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존재는 그러한 이야기의 생생한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곰의 발같은 손'은 할아버지의 존재가 이미 아이들의 의식 속 한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비록 귀머거리 할아버지 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존재이다. 삼춘과 사춘과 할아버지는 친족 공동체로서 고방에서까지 그 친근함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이다. 고방에 삼춘이 밥보다도 좋아하는 술이 있다는 사실은 고방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시적 화자도 그 술을 잘도 채어 마신다는 것 또한 이러한 시적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연은 구석에서 시적 화자는 할아버지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짚신이 수두룩이 걸려 있음을 회상한다. 막연히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못에 걸려있는 짚신을 삼는 할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여기서도 백석시의 지배적인 시적 정서인, 친족공동체 내에서만 가능한 풍요로운 정서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연에서 고방을 백석은 '녯말'이 산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녯말'은 조상들의 옛 이미지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며, 이를 통해 화자는 고방 속에서 조상들의 옛말과 또 그 속에서 할아버지와 삼춘과 사춘을 만나게 된다. 또한 고방은 동심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무궁무진한 장소여서, 시적 화자는 저녁 끼니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 할 정도로 고방에서 노는 것을 남몰래 즐긴다. 고방과 관련된 자신의 가장 은밀한 추억을 서술하면서 화자는 시의 내적 공간에 동화되어 있는 존재이다. 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하는 행위는 고방에 있었지만 지금도 그곳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기를 바라는 현재 화자의 간절한 소망의 시적 투영이다. 즉 화자는 과거회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시속의 세계에 동화되어 행위의 주체도 되는 것이다. 백석은 어린시절로 돌아가 우리삶 속에 끈끈하게 배어 있는 친족공동체의 풍요로움을 표현하였다. 바로 이를 통해 우리는 유년 화자를 등장시켜 조상 전통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이 시인은 세계와의 분열을 모르는 민속적 세계와의 합일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민담 . 풍속 . 속신(俗信)과 같은 샤마니즘적 세계는 전통적으로 전래되어 온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에 다름아닌데, 백석은 바로 이점에 깊이 착목(着目)하여 우리에게 한국인의 근원적인 삶의 모습을 유감없이 표현한 셈이다.
3. 맺는 말
1930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 이보다 좀더 넓게 잡으면 1930년대 후반에서 '해방'되기까지 집중적으로 활동한 백석은 어느 특정 유파나 시적 경향성에 휩싸이지 않으면서 그나름의 특유한 시세계를 튼튼하게 구축한 시인이다. 백석 시에서 무엇보다 이채를 띠는 것은, '이야기시적 특성'이다.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서정성의 발현으로는 그 시적 전개가 미흡하리라고 판단한, 말하자면 일종의 양식적 자각의 소산인 것처럼 보인다. 즉, 백석이 시 속에 '이야기'(서사적 골격)를 끌어들인 것은, 인생사의 깊은 문제를 여러 이미지들의 단편적 제시만으로는 그 시적 성취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보다 높은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방법으로는,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상징적인 시적 표상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보다 더 확실하게는 비교적 튼튼한 서사적 뼈대 속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백석의 시적 특성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의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지닌 '이야기시적 특성'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야기시(narrative poem)'란 서사지향성이 강하게 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근현대시사를 돌아볼 때, 1929년에 발표된 임화(林和)의 [우리 오빠와 화로]에 대하여 김기진(金基鎭)이 명명한 '단편서사시'가 그 단초에 해당하며, 1930년대 들어 이러한 시적 경향은 백석을 비롯하여 이용악(李庸岳)·안용만(安龍灣) 등의 작품에로 이어진다. 일반적인 지적이지만 이같은 시적 경향의 출현은, 단순한 기성 서정시로써는 당대의 복잡다단한 서사적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데서 탐색된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한마디로 백석의 '이야기시'는, 짤막한 서정 양식으로는 미처 두루 포괄하기 어려운 당대 현실의 복잡성을 포착하려 한 시인의 뚜렷한 노력의 소산이라 하겠는데, 그 '이야기시'의 형상화 양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고향의 모습을 세부적으로 재현하였을 뿐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친근성을 생동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삶의 실체를 탐구하고자 한 백석 시에 두드러지게 투영된 것은,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고향' 바로 그것이다.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고향인식은 무엇보다, 한낱 막연한 향수감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에 밀착되어 있다. 고향에 대한 이러한 시적 형상화 방법과 관련하여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 시인의 고양인 평안북도 정주(定州) 방언의 다채로운 활용 및 갖가지 토속적 소재 사용이 눈길을 끈다는 점이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대체로 '현상적 화자'가 시적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시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에서 '고향'은 때로는 풍요롭고 포근한 시적 공간으로 노래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파괴되고 일그러진 암담한 일제 강점기의 비극적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본장에서는 논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시적 특성은 다음 사항을 덧붙일 수 있다.
둘째, 유년세계의 시적 공간과 자아 회복의 의지가 적실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사실이 '기억' 또는 '회상'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상상력에 의한 예술적 변용보다는 '기억'에 의존하면서 체험 그 자체를 재구해 내는 데 역점을 둔 백석이 '기억' 속에서 반추하고 있는 것은, 저 유년 시절의 화목했던 전통적 생활상이다. 이는 그가 상실된 세계에서 현실과의 대결의식보다는 지난날의 기억 속에서 자아의 동일성을 회복하려 했음을 잘 말해준다.
셋째, 유랑(流浪)·표랑(漂浪) 체험을 토대로 하여 상당수의 '기행시'를 남겼다. 그의 시에서 '여행'은 일제강점기의 피폐한 민중적 삶의 현실을 절실하게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시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때로는 단순한 객수(客愁)를 읊조리기도 하였지만, 자신이 유랑했던 여러 지방의 일반 민중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의 위치를 재조정하였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식민지 현실의 깊이있는 인식에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산골 마을의 향토성 짙은 풍정(風情), 여기저기 표랑하면서 몸소 보고 들은 참담한 민중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시의 사적 전개과정에서 볼 때, 백석에 의해 하나의 뚜렷한 시적 경향으로까지 대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야기시'는 1960년대 이후 신동엽(申東曄)·신경림(申庚林) 등에 의해 다시 현대시의 한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더 아래로는 1980-90년대 고은(高銀)의 연작 '인물시집' 『萬人譜』로도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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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전라도 길 / 한하운
全羅道 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한 하 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全羅道) 길.
한하운 시집 《파랑새》 중에서
한하운(韓何雲) 연보
1919년 2월 24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촌면 쌍봉리에서 한종규(韓鐘奎)의 2남3녀중 장남으로 출생.
(본명 : 한태영 韓泰永, 이후 개명 : 한하운 韓何雲)
1926년 한하운의 진학을 위해 함흥으로 이사.
1933년 몸이 붓기 시작(癩病 발병의 시초)
1936년 전라북도 이리농림학교 졸업. 중학 5학년 때 癩病임이 판명됨.
단편소설 <어머니>를 조광[朝光], <두견새>를 삼천리에 투고.
1939년 동경 성혜고등학교 수료.
1942년 중국 국립 북경대학(北京大學)농업원 축산학과 졸업.
논문으로 조선축산사(朝鮮畜産使) 저술.
1943년 귀국 후 함남도청 축산과 임용. 장진군(長津郡)으로 전근.
면양(綿洋) 연구와 개마고원 개간에 몰두.
1944년 경기도청 축산과 전근. '나병' 발병으로 치료 시작.
본명을 한하운(韓河雲)으로 개명함.
1945년 8. 15 해방과 함께 소련 군정이 시작되자 재산을 몰수당함.
1946년 함흥 학생의거 사건에 연루, 소련군에 체포되어 형무소 수감.
1947년 동생이 주동한 북한 전복의거에 연루되어 체포됨.
형무소에서 탈옥하여 월남. 전국을 방랑하며 시작(詩作)에 몰두. 다시 월북.
1948년 7월 월남.
1949년 4월 첫작품 <전라도길> 외 12편을 '신천지' 4월호에 발표.
5월 <한하운 시초>를 정음사에서 발간.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나환자촌 하천부락(河川部落)에 정착.
1950년 경기도 부평에 나환자 수용촌 '성혜원(成蹊園)'을 설립.
1951년 '신명보육원'을 창설하여 나환자 미감아들을 수용하여 교육 시킴.
1953년 경기도 용인에 '동진원(東震園)'을 설립.
대한 한센 연맹위원회 회장 취임.
1954년 전국 나병환자의 중앙기관인 '대한한센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선임.
<한하운 시초>가 불온하다고 하여 국회 및 방송 등에서 논란되었으나 무혐의로 밝혀짐.
1955년 3월, 제 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
월간 '희망'지에 자선전 <나의 슬픈 반생기>를 연재.
1956년 제3시집 〈한하운시전집〉간행.
1957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간행.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톳길〉및〈정본 한하운시집〉간행.
'청운보육원' 원장에 취임. 음성나병으로 판단받음. 한미 제약회사를 창설, 회장에 취임.
1962년 신문회관에서 첫 시화전(詩畵展) 개최, <한하운 시화집>을 문화교육 출판사에서 간행.
1963년 가축개량사업으로 '경인종축장(京仁種畜場)을 부평에 설립함.
1964년 월간 <새빛>을 창간하여 <세계나문학소사(世界癩文學小史)>를 연재.
1966년 신안농업기술학교 교장 취임.
1973년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시비(詩碑) '보리피리' 건립.
1975년 2월 28일 인천 십정동 자택에서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인해 영면(永眠).
세상을 떠나면서 천주교에 귀의.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장릉 묘원에 안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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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여인 / 한하운
女人
한하운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기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양 걸음걸이 몸맵시 하며 틀림없는 저……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입술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한하운 시집 《파랑새》 중에서
<1960년대 신명 보육원>
<한하운 가족 사진> <한하운이 생전에 살았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