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5일
내년 2월이 정년퇴임인데 겨울방학 중에 고향인 전주로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올해 말에 약식 퇴임식을 갖는 것으로 학교에서 배려해주었다.
그날 무슨 말이든지 한 마디를 해야할텐데 조금 신경이 쓰여서 아침에 일어나 몇 자 끄적여보았다.
쓰다보니 또 끼가 발동하여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쩔꼬??!!!
안녕하세요!
갈참 청소계 안준철입니다.
11월까지만 해도 갈 날이 기다려졌는데
12월이 되니까 마음이 달라지는 거 있죠.
무엇보다도 그동안 30년, 혹은 20년 넘게 함께 동고동락하며 한솥밥을 먹어온
동료선생님들의 곁을 떠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네요.
같이 근무한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 선생님들도 눈에 밟히기는 마찬가지구요.
2년 동안 학생부에서 근무하다보니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 별 일도 없으면서 교무실을 들락날락한 거 눈치 채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그 시간은 저에게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답니다.
제가 인간적으로 많이 미숙해서 선배나 동료 교사로서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참, 퇴임식 끝나면 학교 근처 봉화숮불마을에서 점심 꼭 드시고 가세요!
삼겹살과 숯불갈비 무한 리필입니다!)
오늘 정년퇴임식을 앞두고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저도 번잡한 형식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처음에는 제가 좋아하는 패티김 노래나 한 곡 불러드리고 쿨~하게 떠날까?
그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교사들이 30년 넘게 몸 담아온 교직을 떠나면서
교직에 대한 뿌듯한 보람이나 추억어린 생각 보다는
교직에 대한 피로감과 쓸쓸함을 더 많이 호소하는 것 같아서
이런 현실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저도 오늘 정년 퇴임식을 약식으로 하게 되었네요.
사실은 지금 전주에서 음악선생을 하고 있는 제 아들 녀석이
제 정년 퇴임식 날 축가를 불러주겠다고 몇 년 전부터 얘기를 했었는데......
축가.......하니까 생각이 나네요.
올해 축제 때 교사 중창단 선생님들과 함께 부른 기억하시는지요?
임재범의 ‘너를 위해’와 인순이의 ‘거위의 꿈’ 두 곡을 불렀지요.
두 곡 모두 무척 어려운 노래였는데 한 곡 당 백 번씩 연습을 했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노래로 대신하게 된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인순이의 거위의 꿈은 가사가 이렇게 시작이 되지요.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저에게도 버려지고 찢겨 남루해진 꿈이 있었습니다.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요.
정말 교사가 되고 싶었던 저로서는 버려지고 찢겨 남루해진 꿈을 부둥켜안고
많이 울기도 했던 고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들은 제가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좋은 거름이 되어 주었지요.
오늘 여러 동료 후배 선생님들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지난 주 축제 때 교사중창단 선생님들과 함께 불렀던 인순이의 ‘거위의 꿈’을
오늘은 여러분들 앞에서 독창으로 혼자 해보려고 합니다.
저로서는 하나의 도전이기도 하고 여러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노래이기도 합니다.
허락해주실 거죠?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요청을 드릴까 합니다.
30년 가까운 교직 생활을 마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가 한 명 있습니다.
이 제자 이야기가 졸저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좀 줄여서 읽어보니 5분 정도 걸리네요.
30년 교직생활을 마감하면서 교직 선배로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을 대신해서
이 글을 읽어드리고 싶은데 허락하시겠지요?
허락하실 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노래부터....
☆밥보다도 진실이 고팠던 제자 이야기
멀리 창원에서 한 제자가 나를 찾아왔다. 졸업한 햇수를 따져 보니 정확이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도 변한 만큼의 세월이 흐르고도 두 해가 더 지난 것이다. 그와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떤 세월의 광풍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에 대한 기억들이 상당부분 훼손된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마만큼은 가지고 있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능력이 사뭇 부족한 아이였다. 누가 보아도 그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그는 그것을 시인하지 않았다. 오기나 고집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알아듣도록 설명을 해주어도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말하자면 자신이 해를 가한 상대방의 아픔이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당한 작은 손해만을 생각했다. 이런 식이었다.
“너 어떻게 급우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때릴 수 있어?”
“그 자식이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입니다.”
“시비를 걸었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려?”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요?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시비를 걸면 그렇게 잔인하게 보복할 거야?”
“지가 저한테 시비를 안 걸면 되지요.”
그의 행동을 그가 지닌 거친 무기가 아닌 그의 아픈 결핍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좋은 습성이 있었다. 그 한 가닥 희망에 매달려 낫 놓고 기역자를 가르치는 식으로 인간 도리에 관한 기초적인 이야기를 그 해 내내 해주어야만 했다.
(……)
그는 6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병이나 사고로 인한 사별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던 부모가 어느 날 큰 말다툼 끝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그와 두 살 터울의 동생을 병약한 노모와 함께 남겨두고 말이다. 그의 부친은 아직까지도 소식이 끊긴 상태이고, 초라한 숙박업소를 전전하며 험한 일을 하고 있는 모친에 대한 소식은 몇 해 걸러 한 번씩 풍문을 통해서나 듣고 있는 정도이다. 지금이라도 어머니를 만나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가끔은 어머니가 보고 싶은데 만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제가 어머니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그동안 부모 없이 자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뜻밖에도 공부라고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교과서에 있는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해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럴 것이 집안에는 까막눈인 할머니뿐이어서 아무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상급생이 되어 글자도 못 읽는다고 혼을 낼 뿐,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상하게 글자를 가르쳐준 친절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아예 그런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아무에게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담임을 맡았던 그해, 오토바이 절도로 구속되어 졸업을 불과 2개월을 남겨두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를 구해보려고 탄원서를 들고 검사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만 그러한 담임교사로서의 당연한 노력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 그는 다음 해 형기를 마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올 의사를 나에게 전해왔고 학교에서도 그를 받아들여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전과가 있어서 적어도 10년은 취직을 못할 줄로 지레짐작을 한 거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술집 웨이터 생활만 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작년에 알아보니 제가 졸업한 바로 그해 전과기록은 이미 지워졌더란 말입니다."
그런 기막힌 사연도 사연이었지만 그날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교통사고를 무려 세 번씩이나 당한 그 뒷이야기였다. 그는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 술에 취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수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런 중에 첫 번째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문득 그것이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것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문제였다.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할수록 그들의 냉소와 비웃음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두 번째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그 동안 번 돈을 거의 다 까먹고 말지만 돈에 대한 애착보다는 그 사고로 인해 사람답게 살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해졌다고 했다. 늦었지만 공부를 다시 해서 떳떳한 직업으로 바꾸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자신의 진실한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다. 결국 너무도 큰 외로움이 다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도록 했고, 그러다가 세 번째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세 번씩이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이상하게 조금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란 말입니다. 정말 진실하고 보람되게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마취에서 깨자마자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선생님입니다. 선생님만은 제 진실을 이해해주실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더란 말입니다."
그날 제자가 나를 찾아온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진실을 과거 담임에게 털어놓기 위해 그는 멀리 창원에서 차를 몰고 달려온 것이었다. 선물을 한 아름 들고서. 나에겐 제자의 회심이 가장 큰 선물이긴 했지만. 그는 지금이라도 방송통신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이가 벌써 서른 한 살인데 지금 시작해도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유쾌한 심정이 되어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다.
"공부에 무슨 나이가 문제겠어? 나도 선생님이 되려고 지금 네 아이 때 사범대에 들어가 다시 공부 시작했어. 너도 열심히 하면 분명 승산이 있을 거야. 그리고 넌 이미 성공했어. 돈보다도 진실을 선택한다는 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 너 말고 세 번씩이나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
첫댓글 돈 보다 진실 !!!! 암~~~ 주위의 동료들이 비웃죠 지랄염뱅한다고.... 하지만 꿋꿋하게 돈 보다 진실을 더 우선에 두고 살아가는 여기 일인 하나더 있습니다 ㅎㅎㅎㅎ난 독학했지요 ㅋㅋㅋ 아님 시가 가르켜 주었던지 ㅎㅎㅎ 우하하 보기 좋게 낙방했습니다 ㅎㅎㅎ 한그루나무를 만들어 보여 주기 보다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산을 만들렵니다^^ 우하하^^
어제 두시경에 전화가 오긴 왔는데 번호가 02로 시작하더라고요 순간 와 드디어 ㅎㅎㅎ 지랄 염뱅 안녕하세요 고객님 어쩌구 저쩌구 ㅎㅎㅎㅎ 콱 끊고 얼마나 웃었던지 ㅎㅎㅎㅎㅎ 저녁엔 소주 양껏 먹었습니다^^ 푹 잤습니다^^ ㅎㅎㅎ 마이 춥네요 다시 내일부턴 일 나가야 한디 ㅎㅎㅎ
하하. 우리 준한이가 쿨하게 넘어갔구나.....소주 잘 먹었다. 그럴 땐 한 잔 해야지. 그까짓 신춘문예가 별거냐? 퇴임식 파워포인트 만들었는데 한 번 볼래?
잘 가세요 전주 좋은곳이라 들었습니다
순천 사랑 감사드립니다 그 와중에 제 글때문에 순천사랑에 찬물을 ...죄송했구요
아고,샘.퇴임이라니요.세월이 무상합니다.
하하..오늘이 아내 회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실감이 안 나네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칠순 팔순 어르신들도 마음만은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새삼 반성을 해보기도 하네요. 그나저나 통 못 뵈었네요. 시작품으로나마 건필하심을 확인하고 있네요. 새해에도 왕성한 시작활동 기대할게요^^
@안준철 샘 늘 미안할 뿐입니다. 지난 십여년 시절 찾아뵙고 해야하는데...샘 시가 너무 좋아 펄쩍 뛰던게 엊그제 같아요. 실망 시키지 않은 글 쓰도록 노력할게요. 총회땐 오실 수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