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속에 고양이를 키우세요
강인한
수박 맛있지요
열매가 둥글다는 상식을 넘어
네모 난 수박은 상식보다 맛있을 거야
정사각형 틀 안에 가두고
키운 멋진 수박
처럼
네모 난 유리병 안에
새끼 고양이를 키워 보실래요
부드럽게 부드럽게
새끼 고양이를 병 속으로 유인하세요
얼른 병마개를 닫은 다음
두 개의 빨대를 끼우세요
하나는 먹이를
또 하나는 배설을 위한 장치
들어가면 나온다는 철학을 위한 장치
사랑도 정기적으로 확인이 필요하듯
가끔씩 뼈를 유연하게 하는 약물을
투입하기도 하면
귀여운 고양이는 병에 맞춰 자라지요
자라면서 끝내는 유리병 모양이 된다나요
사뿐한 도약 호기심 많은 질주는 거세된 채
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미덕인지
고양이는 잘 알지요
분재 고양이 아니 본사이 키튼
네모 난 고양이를 보세요
얼마나 정직하고 우아한지요
죽을 때까지 유리병에 갇혀서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본사이 키튼
당신의 맨션에 살아서 빛나는 소품
본사이 키튼.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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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시인의 「병 속에 고양이를 키우세요」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에 대한 고발로 읽힌다. '욕망'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 마음'이다. 인류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욕망은 인간의 삶을 지배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욕망을 위한 도전이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도 사실이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변화무쌍한 뉴스는 대부분 욕망이 빚어내는 부조리한 현상들이다. 이제 욕망은 자연과의 대립을 넘어 인간끼리의 공격성으로 변모하는 양상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네모난 고양이'는 욕망하는 인간의 현주소이다. 움직이는 짐승을 작은 병속에 가두는 행위는 욕망의 무엇을 충족시키려는 것인지 소름이 돋는다. 하여 욕망을 고발하는 화자의 위악적 포즈('본사이 키튼' 현상은 한때의 소동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실제 병속에 갇힌 분재고양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로 믿고 싶을 정도이다. 보다 염려되는 것은 화자가 말하는 '적응의 미덕'이라 하겠다. 적응이란 거대한 환경과 맞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인간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으로 진화해 온 것은 적응의 결과이며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 말하는 강자의 억압에 의한 적응은 우리를 고민에 빠지게 한다. 자본주의 욕망에 의해 좁은 우리에 갇힌 수많은 짐승들이 있다. 저임금으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하루를 버티는 빈민국 어린이들이 있다. 비정상적인 적응은 강자가 휘두르는 욕망의 슬픈 풍경이다. 마치 오랜 감옥생활에 길들여진 죄수가 마침내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줄 몰라 다시 감옥을 그리워하는 영화 속 장면에 다름 아니다. 주도적 삶을 거세당한 수동적 자아의 욕망이 적응으로 미화될 때 그 사회는 표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병에 갇힌 고양이를 시인의 자아라 하자. 자아를 가둔 병을 세상의 규범과 관습이라 하자. 편견에 갇힌 시인은 병 너머에 광활한 상상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까. 시인은 늘 상상을 갈구하고 공들인 시간에 비해 성과의 초라함을 바라보며 쓸쓸해할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 처한 상황일 수 있다. '자유로운 상상력'이란 말을 중얼거린다. 이 아름다운 관념어를 습관적으로 대하지는 않는지, 상상을 초대할 내면의 공간은 충분한지 질문한다. 스스로를 완고한 틀에 가두는 경우는 어이없지만 비일비재하다. 물론 시인이라면 사물이 방해받지 않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는 일, 감정이입과 교감을 통해 그들의 삶을 나의 인식영역으로 초대하는 일, 나아가 사물의 감정까지 읽어내 시적 성취를 거두는 자유로운 상상의 결과물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놀랍도록 인간의 삶과 닮아 있어서 구차한 진술이나 설명 없이도 감동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자유로운 상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 연결된다. 고유질서와 공존의 원리라는 인간과 자연의 동화는 자연스런 상호회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비추어 인위人爲가 개입되면 인간은 자연의 본성에 어긋나게 된다. 이는 곧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하는 행위이다. 나비 꿈을 꾸면서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꾸는 것인지, 자신이 나비가 되어 꿈을 꾸는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는 순간 매력적인 시 한편이 완성된다. '본성대로 살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시인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우위의 사고는 세계를 한정시키고 상상기능을 위축시킬 위험이 있다. 시인에게 상상력이 매우 중요하지만 전제되어야할 것이 '자유'일 것이다. 자유야말로 무한상상으로 질주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병 속에 고양이를 키우세요」에서 화자가 암시하는 것은 틀에 갇힌 자신을 돌아보라는 경고로도 읽어낼 수 있다.
좋은 시를 창작하기 위한 시인의 욕망은 아름답고 좋은 시의 정점은 욕망의 그것처럼 끝이 없다. 삶이 그러하듯 과정으로서 시인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 상상의 외로운 날갯짓, 이것을 아름다운 적응이라 불러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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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산 /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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