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 유감(김정겸)
김정겸 편집위원,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왜곡[歪曲]은 '사실과 달리 그릇되게 하거나 진실과 다르게 함'으로 정의된다. 歪曲의 歪(왜)는 ‘아니다’의 의미인 부(不)와 ‘바르다’의 의미인 정(正)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왜(歪)는 '바르지 않다'는 뜻이다. 영어로 distortion인데 이는 ‘찌그러짐, 일그러짐’을 의미한다. 사람의 얼굴이 찌그러지거나 일그러져 있을 때를 생각해 보자. 보기 흉하다.
정치권에서 왜곡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아무런 도덕적 부끄러움 없이 자행 되어지고 있다. 왜곡은 편향된 사고이다. 편향(偏向)은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뜻이다. 왜곡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렇다’고 믿는 편향적 사고이다. '당연함'에 대해 의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항해를 하면서 지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믿지 않았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지지한다. 이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면서 왜곡되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라는 것이 있다. 이는 왜곡에 대한 의심을 통해 이루어진 위대한 사고의 전환이다. 혁명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저당 잡힌 주장을 할 경우에 사용되는 언어이다. 예를 들어 지동설을 지지한 지오다노 브루노는 화형까지 당한다. 이는 왜곡에 대한 좋은 예이다. 왜곡의 긍정적 모습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왜곡의 부정적 모습은 질타와 질투, 그로 인한 파멸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왜곡에 대한 의심을 바로 잡을 힘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제 왜곡과 의심에서 벗어나자. 한 사람의 인격까지 말살하는 왜곡과 의심은 성장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왜곡과 의심에서 벗어나 화합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화합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나타난다. 공감은 역지사지를 의미한다. '맹자(孟子)'의 이루편(離婁編) 상(上)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비롯된 역지사지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영어는 참 재미있게 표현한다. 역지사지는 'Put yourself in my shoes'로서 자신의 발을 남의 신발 속에 넣어 보는 것이다. 얼마나 어색하고 아프겠는가? 공감은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약이며 마술사이다.
명심보감의 글귀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명심보감에 '주식형제천개유(酒食兄弟千個有)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이라는 말이 있다. '주식형제천개유(酒食兄弟千個有)'는 ‘술과 밥을 사 줄 때 형, 동생 하는 사람이 천 명이나 있다'는 뜻이다.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는 '급(急)하고 어려울(難) 때 막상 나를 도와주는 친구(朋)는 한 명도 없다’라는 말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귀이다. 우리 민족은 넘어져서 아파하는 사람을 짓밟지는 않는다.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주는 그런 민족이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정말 제대로 사실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였으면 좋겠다. 왜곡과 의심은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