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교 졸업식이 한창일 때다.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졸업식으로 대체하게 됐고, 부모님들도 유튜브 졸업식을
볼 수 있게 됐다. 졸업생 한 명, 한 명 영상으로 찍은 인사말이 나오고 재학생
대표의 송사와 졸업생 대표의 답사가 끝나면 졸업식은 끝이 난다고 한다.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6학년 때가 생각난다. 졸업식을 한다고 머리를 빡빡
밀어서 이제 사진을 보니 스님머리 같고, 귀만 쫑긋해서 마치 부처님 귀 같다고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내 기억에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엄마가 사주신 스웨터를 입고
찍은 졸업사진이 초딩 때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었다.
누가 송사를 했는지 답사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그냥 졸업식만
참석한 것이다. 부모님이 오시거나 꽃다발(그때는 귀함)을 받은 기억도 없다.
으레 송사를 할때의 눈물바다를 이루던 추억은 내게는 희미하다.
촐망촐망한 눈동자, 코흘리게 촌뜨기들의 사진을 보니 추억이 아련하다. 내가
다니던 때만해도 우리 시골학교는 제법 많은 졸업생(약120명)이 있었는데 우리
동네는 약30명 정도의 졸업생 중 남학생의 70%, 여학생의 30% 쯤이 중학교에
진학할 정도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 가서 공장에
다니거나 나중에 검정고시를 치러 고등학교 졸업자격까지 획득한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그땐 우리에게 졸업이 그냥 현실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일 뿐 어떤 기쁨이나
희망을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요즘은 1년에 한두 번은 전체 동창회를 하다보니
얼굴들이 조금은 익숙해진 듯하다. 난 중간에 바뀐 초1때 담임선생님을 제외하곤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초4때 여생님이신 손ㅇㅇ선생님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우리 땐 그랬다.
가난한 집에서 장남으로 장녀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형은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고 가죽공장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고, 누나는 남의
식모로 팔려가 몇 푼 되지도 않은 돈을 받고 살다가 조금 성장하자 기술을 배우고자
봉제공장 시다바리부터 시작해서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죽어라고 일만했다.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하나 사 쓰는 것도 아까워 안사 쓰고 돈을 버는
대로 고향집에 보내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되어가던 60~70년대의 경제성장을 이끌던 우리의 누이들,형님들은
이렇게 자라 지금은 자식들을 출가시키는 세대가 된 것이다.
오늘날 극도의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며, 조금이라도 60~70년대
고생하신 그분들의 삶의 모습을 기억했으면 한다.
고무신에 빵빵하게 양말 신고 공을 차던 머시마들, 덤블링을 환상적으로 하며 고무
줄을 하던 가시나들이 다 커서 자식들 여운다고 청첩장을 보내고 있으니 세월이 정말
꿈만 같다.
“그때, 내가 너 좋아했는데....”
첫댓글 하하님들 설명절 잘 보내시고 나이는 하나씩만 가져가세요.
건강하시고 행복한 미소가 가득한 날이 되세요!
저도 나이 한 살만 가져갈게요.^ 언제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갔는지..추억의 졸업식 생각이 가물가물합니다. 초등학교는 거의 안 나구요. 어려운 시절들. 추억의 검정고무신..만화로 드문드문 아,그랬었지..하지요. 어김없이 소식 전해주시는 마이프렌드 님. 늘 항상 감사드려요. 설명절 잘 지내세요.^^
myfriend님 국민학교 스님같은 졸업사진도 올려주셨음 좋겠어요.
국민학교 졸업식 때 얼마나 울었던지...
60~70년대,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더 애틋하고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순정의 추억도 많고요.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 때는 눈물을 펑펑 쏟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졸업식 때 입었던 옷도, 친구들과 찍은 사진도 생각난다. 고등학교 졸업식엔 한복을 입게 했는데 부모님의 젊은 지인 분 아내가 결혼식 때 입었던 것을 빌려 입었던 기억. 그러고 보니 졸업사진 단체컷 중에도 한복 입는 게 있어서 옆반 친구한테 빌려 입고 사진을 찍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왜? 졸업식에 한복은 너무했다.
my friend님, 어김없이 재미난 추억을 소환하는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