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따라온 이야기
지 석 동
호박잎 처지게 무덥다 소나기 한줄기 소란을 피우고 지나가면 시원했다.
말복 머리쯤 황새 떼같이 이 논 저 논으로 몰려다니며 하던 세 벌 논 매기가 끝나 배동이
서고 섶이 가려 숨이 턱턱 막히던 밭일도 거반 끝이나 한가했다. 어른들은 날마다 그늘 깊고
시원한 괸돌에' 올라앉아 장기 아니면 지나온 이야기 따먹기나 하고 아이들은 놀기도 바빠
쇠꼴 해라 애 봐라. 소리가 듣기 싫어 학교서 오늘 길에 놀다가 와 늘 늦어왔다.
동네청년들은 그 한가한 틈을 이용해 추석과 추수 때 쓸 땔나무와 내년에 쓸 퇴비를 하러
두레를 다녔다. 지금의 유기농업이다. 집집이 집채만 한 퇴비 더미가 바깥마당에 올라가는
걸 보면 부자가 된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어른들도 내년 농사도 보나 마나 풍년일 거라고
칭찬을 했다. 퇴비는 썩는 냄새도 구수했다. 아침이면 김이 무럭무럭 나 퇴비가 잘 속성되고
있다는 것과 숙성되려면 속이 뜨겁다는 것도 알았다.
퇴비 더미 곁에는 심은 채소도 유출 물을 먹고 자라 토마토가 굵고 달았다. 가지도 팔뚝 만큼씩
하게 달려 서리 내릴 때까지 따먹었고 개 복숭아나 살구 돌배도 잘되어 알이 굵었었다.
어쩌다 개똥참외가 달리면 애들은 내가 먼저 봤으니 내 것이라고 다투기도 했었다. 청년들은
날마다 산에서 낫으로 비어 낸 풀을 지게로 몇 번씩 져 날라야 하는 일이 힘들어 은근히 비
오기를 기다려 하루 나 이틀쯤 푹 쉬었으면 했다.
농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다.
비 오는 날 하는 일 중에 가장 신이 나는 일이 물고기 잡아다 체력 보강하는 즐거움이었다.
그때는 고인 물이나 흐르는 물이나 어디를 뒤져도 붕어나 미꾸리가 퍼덕댔다.
때로는 몇몇이 개고기 추념을 하기도 했지만 일년에 한번이 고작이었다.
그 말간 기름 뜬 뚝배기를 들고 후룩 후룩 마시던 국물 맛을 그 후 어디서도 못 봤다.
아버지가 농사짓던 시절은 교통이 지금 같지 않아 바다에서 고기를 많이 잡았다 해도 산촌에
까지 실어 나를 길이나 차가 없어 생선을 구경하기 어려웠던 때다. 먹을 수 있는 게 상하지
않는 새우젓이나 자반이 고작이었는데 자반은 가격이 만만치 않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형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 여름내 농사지으며 새우젓을 세 번 먹었다면 잘 먹으며 농사지었
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니 비 오는 날 물고기 사냥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이었겠는가.
내게는 당숙이 두 분 계시었다. 큰 당숙은 일꾼 중에 상 일꾼으로 무슨 일이든 뽑혀 다녔다
나무를 가도 남보다 많이 졌고 논일 밭일을 해도 많이 했다. 평생 부지런함과 신용이 밑천이던
분으로 흙만 만지고 살아 법 없이도 살 분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지붕까지 노랗게 해이면 겨우내 하루 나무 두 짐 하는 일이 일과였다. 안방건넛방
덮이고 쇠죽 쑤고 남는 걸 올려 쌓으면 웬만한 야산 구릉만큼 쌓아 보는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쌓아올린 나뭇더미는 다음 해 보리타작 할 때까지 땠다. 간혹 게으른 사람이 장마철에 울타리
뜯어 때는 걸 보면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했다. 큰 당숙은 물고기 잡는 솜씨도 뛰어났었다.
비만 왔다 하면 당신이 만든 망을 들고 고기를 잡으러 다닌 이름난 선수였다. 아예 부엌 앞에다
고기를 저장할 수조를 만들어 놓고 잡아온 고기를 길러가며 드셨는데 원 근동에서 유일하던 어항
으로 붕어 미꾸리 송사리 피라미 메기 뚝지 등이 물 얼기 전까지 유영하고 있어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구경거리였었다.
작은 당숙은 농사와는 거리가 멀어 늘 고향을 떠나 돈 버는 일을 하고 싶어 안달하던 분이었지만
비 온 날 버섯 따는 일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비 온 날은 여러 가지 버섯이 동네 언저리에 많이
났다. 비 그치기를 기다렸다 실력발휘를 했다. 종댕이를 차고 뒷동산이나 앞 벌 밤 밭을 한 바퀴
휘돌아오면 바지 뒤에 흙물이 튀어 엉망이었지만, 따온 밀 버섯 갓버섯 꾀꼬리버섯 달걀버섯 뽕나무
버섯 국수버섯 등을 봉당에 쏟아 놓고 다듬었다. 모두 바로 먹을 수 있는 버섯이었다.
작은할머니는 큰 당숙이 잡아온 물고기에 버섯 넣고 된장 조금 풀은 데다 풋고추 애호박 채 썰고
밀반죽 띄워 지져 주시면 그 맛이 별미 중의 별미였다. 지금도 그 맛을 못 잊어 가끔 집안일로 작은
당숙을 만나면 할머니의 손맛을 떠올리며 비 오던 날의 정취에 젖는다. 들어간 것이 별것 아닌데도
이하나 없는 할머니가 삭정이와 같이 뻣뻣한 손마디를 움직여 끓여주시는 매운탕 맛이 입에 짝 달라
붙었었다. 그 구수한 맛을 본 사람은 무쇠솥이 끓으면 사립문 밖에서 기웃거렸다.
큰 당숙은 젊어서부터 무얼 자시던지 맛나게 드셨지만, 할머니가 끓여주신 물고기 지짐 앞에서는
더 맛나게 먹는 소리 가나, 같이 먹는 사람도 맛나게 먹었다. 어쩌다 같이 식사하게 되면 반찬이
변변치 않아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분의 내는 맛있어 죽겠다는 식의 먹는 소리가 식욕을 돋워
금방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었다.
목롯집에 앉아 털이 숭숭 난 돼지 껍질을 씹어도 맛있게 먹으면 옆 사람도 술맛이 나는 법이고,
쇠갈비를 뜯어도 앞사람이 깨지락거리고 앉았으면 입맛이 달아나듯, 맛나게 먹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복이다. 2010. 9. 10
첫댓글 글씨 초인트 작아 유감입니다.
한 선생님 제가 깜빡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글이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띄어쓰기나 어휘 선택이 결에 맞지 않은 부분이 몇 군데 보입니다만 이쯤하면 제출하셔도 되겠습니다. 물론 단락 사이 간격은 읽기 쉬우라고 띄우셨으리라 믿습니다. 제출 하실 때에는 수정하시구요. 그런데 제목이 좀 걸리네요. 왜냐하면 한 접시에 두 가지 음식을 담아서입니다. 전반부는 비 오는 날의 시골 풍경을 쓰셨고 후반부는 할머니, 큰당숙, 작은 당숙의 이야기를 쓰셨기에 그렇습니다. 짤막한 별개의 작품으로 나누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글은 도입 부분 석 줄이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독자가 글은 읽지 않는다는군요. "호박 잎이 축 쳐지게 더운 날이었다.(과거로)"...행 갈이 하지 말고 이어서...
"우르릉 꽝꽝 지지직 번쩍 "......이런 표현은 시에서는 허용 되지만 수필에서는 되도록'의태어, 의성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시원했다" 과거로 쓰셔야 합니다. 다음 시간엔 <안녕>이란 수필이 숙제이니 다다음 주에 제출해보시지요. 먼저 짝꿍에게 보여보세요. (활자를 키워서.).....제출하실 때에는 반드시*** 공간을 200포인트***로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퇴고 공간이 생기니까요.
김 선생님 안녕하세요. 말씀 고맙습니다. 모두 촘촘이 봐주시는 정으로 받습니다.
공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추석이네요.
내내 즐거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시골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갑자기 매운탕 생각에 침이 고입니다--
지금은 점점 없어지는 풍광에 가슴 한쪽이 허전해 옵니다-
정겹던 예전 고향이 그리워지는 한가위 목전입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명절 편히 보내소서
김 선생님 고맙습니다.
변하기 전 고향 모습의 일부입니다.
냇가에 나가 헤열을 치다 배고프면 먹석딸기를 따먹 던 이야기니
근 50년 되는 이야기 지요. 혁명나고 마을 마다 퇴비하는 경쟁이 붙어
벅썩을 치던 때도 있었고요. 그 때 실개천은 기억에서만 흘른답니다.
명절 다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운 옛 시골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말미 부분에 비 이야기를 다시 한 두 줄쯤 넣어 주면 글의 연결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첫 문장부터 과거 이야기로 곧장 들어가니 좀 어리둥절해지는 감이 있습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하면서 옛 이야기로 끌어들이면 좀 부드럽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놀기도 바빠....'에서 '놀다'라는 단어가 반복되니 앞의 '놀기도 바빠'를 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다'라는 단어도 반복되니 '길에서 노느라'로 하면 어떨까요. 정감 있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선생님 말씀 고맙습니다. 추석은 잘 쇠시었는지요.
퇴고 시 노력 해보겠습니다.
옛 시절을 참 잘도 그리셨습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구수해집니다.
김 선생님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봐주셔 고맙습니다.
비로 괴롭히던 날씨가 이지음 좋아 가을이 선뜻 깊어 가는 걸
느낍니다.
좋은 가을 이시기 바랍니다.
비 이야기가 나오니 참! 수해는 입지 않았습니까? '작은할머님이 끓이신 매운탕, 침이 꿀꺽 넘어갑니다. 김경애선생 지적대로 '한 글에 주제는 하나만' 에 동의합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