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위한 서시(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꽃의 소묘(1959)
핵심 정리
갈래 : 주지시
성격 : 관념적. 주지적. 상징적
어조 : 사색적이면서 열정적인 어조
제재 : 꽃
주제 : 꽃의 참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존재의 본질 인식에의 염원
구성
1연 : 미지(未知)의 자각
2연 : 존재의 불안정성
3연 : 존재 탐구에의 몸부림
4연 : 존재 본질 인식
5연 : 대상의 미지성(未知性)
이해와 감상1
김춘수는 초기에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존재와 의미를 천착하는 '존재의 시'를 썼으나, 후기에는 시에서 모든 합리적 의미 맥락을 제거한 소위 '무의미 시'를 지속적으로 실험하였다. 이 시기 김춘수의 시작(詩作)은 시에서 관념이란 형상을 통해서만 표시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 언어를 넘어서는 것도 있다는 전제에 의해 쓰여진다. 따라서, 비유적 이미지 대신 서술적인 묘사의 언어를 통해 상황에 대한 인상만을 제사하며, 그로 인해 철저히 대상이 무화(無化)되는 시의 순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피력한 다음의 시론에 의한 그의 후기 시 세계의 지향을 엿볼 수 있다.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관념 공포증은 필연적으로 관념 도피에로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사생(寫生)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 여기서 나는 시를 일종의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 볼 수가 있을것으로 생각했다." - 김춘수<처용단장> 자작시 해설에서 -
이해와 감상2
릴케(R. M. Rilke)의 영향을 받아 존재론의 입장에서 사물의 내면적 깊이를 추구한 김춘수의 초기시에 해당한다. 그의 시 『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남에게 바르게 인식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면, 이 시는 반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읊은 것이다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나'(위험한 짐승)가 '너'(꽃)를 인식하려고 시도하면 '너'는 더욱 미지의 세계로 숨어 버린다. 그리하여 꽃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의미하게 존재하고 있다.
제3연의 '무명(無名)의 어둠'이란 존재의 의미, 본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이 무명(無名)의 상태를 보다 못한 '나'는 의식을 일깨우는 불을 밝히고 인식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나'의 이 노력이 돌개바람처럼 문득 큰 힘으로 변하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기만 한다면 '나'는 드디어 꽃을 똑바로 인식하고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꽃은 수줍은 신부(新婦)처럼 너울을 드리운 채 그 정체를 끝내 드러내지 않는 것을….
1950년대 김춘수는 '꽃'을 제재로 한 일련의 시로 우리 시에 존재론의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한국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데, 이 시는 그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의의를 지닌다. -김태형,정희성 엮음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중에서
이해와 감상3
존재론적 입장에서 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이 시는 앞에서 설명한 시 <꽃>에 대한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화자가 남에게 바르게 인식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소망을 읊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 '꽃'이 사물의 본질을 상징한다면, '미지'․'어둠'․'무명' 등은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며, 화자는 그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 즉 꽃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몸부림치는 존재이다.
1연에서 화자는 사물의 본질을 모르는 자신을 '위험한 짐승'이라 하여 무지에 대한 자각을 보여 주고 있으며, 2연에서는 자신의 자각 없이는 '꽃' 역시 불완전한 상태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3연에서는 '추억의 한 접시 불'이라는 모든 지적 능력과 체험을 다하여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화자의 몸부림과 절망을 '나는 한밤내 운다'로 표현하고 있으며, 4연에서는 비록 존재의 본질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 '나의 울음'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역설적 깨달음을 보여 주는 한편, 마지막 연에서는 결국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만 자신의 안타까움을 '얼굴을 가리운 신부' - 꽃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