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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자의 정치사상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독일의 전직 가톨릭 수사이자 사제, 신학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요 인물이다.
1. 문제의 제기
ㄱ. 루터 정치사상 연구의 필요성
서유럽은 중세 말까지 수천 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지리적으로 폐쇄되어 있었고, 투르크인들의 공격 등으로 위기에 몰려 있었다. 서유럽이 이 위기를 돌파하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역사의 전환기에는 유럽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버린 “두 가지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서유럽의 해외팽창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이라는 이 두 역사적 사건은 같은 시기에 일어났지만,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서유럽의 해외팽창은 외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칼과 나침반’으로 상징되는 무력과 과학기술, 그리고 “용맹, 배신, 잔인성” 등으로 서유럽인들은 “신대륙”을 “발견”, 정복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운영”하였다. 이러한 팽창주의 또는 제국주의는 서유럽이 위기를 해결하고 다른 지역의 희생 위에서 근대화, 산업화에 쉽게 먼저 성공함으로써 현대에도 미국과 서유럽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도 세력이 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서유럽 이외의 세계에는 새로운 위기와 재앙, 파멸을 가져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고, 노예가 되었고,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하였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키는 “무자비한 착취”가 지속되었다.
이것은 정치경제적 지배와 착취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서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수천 년 지속되던 문명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부정되는 가운데, “서구 문명”의 세계 지배로 연결되었다. 서구 문명 이외의 문명은 “야만”이고, 서구 이외의 지역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서구인들의 독단적 관점이 팽배한 가운데, 서구 이외의 지역은 서구처럼 “문명화”, “근대화”, “서구화”되어야 한다는, 미개하고 열등한 지역으로 전락하였고, “서구중심주의”나 “미국중심주의” 또는 “미국예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루터는 ‘성서와 기도’라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 인간 내면의 세계를 개척하여, 인간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발견하였고, 그 복음을 “죽는 날까지” “흔들림이 없는” 신앙으로 주장함으로써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모든 부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서유럽의 해외 팽창은 무력과 과학기술을 앞세워 외부 세계로 나아갔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진리의 힘과 신앙으로 인간 내부 세계에서 하나님에게 나아갔다. 서유럽의 해외 팽창은 정복과 착취 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만의 외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신들만의 위기를 돌파해나갔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류 전체의 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운데 평화롭게 인류 모두의 위기를 돌파해나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중세 말 로마 카톨릭이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무력과 정치적 권력까지 장악하고 황제, 왕, 제후 등 세상 권력(세속 권력)과 대립·충돌 또는 협조·결탁하던 상황에서 루터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력이나 정치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비판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정의와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종교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현실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경제의 영역에서도 수요·공급이나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웃 사랑”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기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정치사상은 수용되어 개혁을 일으켰는가 하면, 오해되거나 남용되기도 하고, 극렬한 반대, 왜곡, 비방도 받는 가운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오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에서는 종교적 판도가 변하고 정치적 지도가 바뀌어, 크게 보아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부한 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구교(카톨릭) 국가들”과,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신교(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서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등으로 지배했던 국가들은 외형적인 정치적 독립 후에도 대부분 식민지 모국의 정치와 종교 등의 결정적인 영향 아래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근대 서양의 정치사와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서유럽과 미국의 팽창주의 또는 제국주의에 희생된 많은 나라들이 현재에도 대부분 주변부 국가들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중심부 국가인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도 인종 차별, 인권 유린, 빈부 격차, 실업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가운데, 인류 전체, 지구 전체가 끊임없는 전쟁과 파괴, 학살, 핵무기의 위협, 선후진국 사이의 극심한 경제적 격차, 수십 억을 헤아리는 절대빈곤층, 기후의 변화까지 몰고 온 환경파괴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21세기 인류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정치’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할 필요가 있으며, 팽창주의와 제국주의가 지배해온 서양의 근대 정치사와 정치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부분의 서구 정치사상의 근원이 된 “인간 중심적(homocentric)·기계론적·원자론적 자연관”과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의 공영과 평화를 확보할 수 있는 세계관과 정치사상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하나님의 종” 또는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수많은 전쟁과 학살 등의 비인간적 죄악의 역사, 식민지였던 “그리스도교 국가” 미국이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교(異敎) 국가” 일본과 결탁하여 필리핀과 조선을 각각 점령한 사실, “신교 국가”나 “구교 국가”나 할 것 없이 아메리카 인디언 등 원주민 학살, 노예 무역과 노예 제도 운영, 식민지 착취 등을 오랜 기간 해온 역사적 사실 등을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교가 “서구 제국주의의 시녀 또는 첨병”에 불과하였다는 것 같은 비판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 비판에 대해, 그저 “하나님의 교회”를 “음해”하려는 “반(反)그리스도교적”인 주장이라고 매도하며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보다는 팽창주의와 제국주의를 따랐던 서양의 정치사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냉철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예수의 그리스도교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와 다르며, 따라서 원래의 올바른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는 “종교개혁”을 해야 하고, 정치에도 그리스도교의 정의와 사랑과 희생정신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루터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21세기 인류의 위기를 “돌파”할 세계관과 정치사상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정치적인 문제를 그리스도교적이고 “인간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건드리고 결정하는 실존적인 문제”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루터의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그의 “두왕국론” 등을 통해서 정치의 현실에 적용되었다. 루터는 정치와 종교를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영역으로 보지도 않고 정치와 종교의 야합도 배척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정치사상은 현대에도 지배적인 영역들인 정치와 종교의 역할과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미국적 자기이해가 교묘하게 승화된” “미국 종교” 또는 “공민(公民) 종교”(또는 “시민종교”)가 지배하고 있고, 특정 종파가 보수적 정권의 집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신정(神政)정치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미국에나 관계있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 독재정권과 유착함으로써 특혜를 받으며 급성장한 종교인과 종교집단이 있는가 하면, 독재정권의 핍박을 받고 희생된 종교인과 종교집단이 있는 역사의 연장 속에서, 현재도 적지 않은 종교집단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거나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하고 있고, 어떤 교단의 “지도자들”이 금력(金力)과 함께 “신도들”을 동원하여 민주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친북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며 논란을 일으키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시급한 문제라 할 것이다.
ㄴ. 루터에 대한 논쟁, 왜곡과 남용의 역사
루터를 이해하거나 연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루터에 대한 해석과 논쟁에 부딪히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반대한 로마 카톨릭의 신학자 코흘레우스(Johannes Cochläus, 1479~1552)에 의하면, 루터는 “교활한 위선적 인물”이며, “색욕과 짐승 같은 충동이 강한 요물”이고, “악마의 자식”이다. 반면, 역사상 영웅적인 인물들을 연구한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에 의하면, 루터는 “참된 영적 영웅이며 예언자”이고, “자연과 진실의 진정한 아들”이며,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루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코흘레우스에 의하면, 루터의 종교개혁 논리는 “오래전부터 배척되어온 이단적 학설들을 혼합한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헤겔(G. W. F. Hegel)에 의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길고 다사다난하고 끔찍했던 중세의 밤”을 지나 “모든 것을 일깨우는 태양”이다.
루터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상반된 해석과 논쟁이 있다. 한편에는, 루터의 정치사상이 권위주의 국가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거나, 독일의 정치 발전을 늦춘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거나, 19세기의 국가사회주의에까지, 나아가 “제3제국”에까지 이르는 길의 시작이 되었다거나 하는 부정적 평가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루터의 정치사상이 근대를 열었으며, 개인의 해방을 가져왔고, 근대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 긍정적 평가들이 있다. 서양 정치사상 연구서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별도의 장을 설정해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루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색인에서도 무시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정치사상가들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루터를 다룬 경우도 있고, 별도의 책으로 루터의 정치사상을 다룬 경우도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에는 종파 내지 교파적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경향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루터를 “교회와 서방 세계의 일치를 파괴한 이단의 괴수”이며 “배교자, 적그리스도(Antichrist) 또는 최소한 무식한 자이거나 정신병자”로 기술해왔고,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루터를 악마로 그린 “16세기의 가장 치열한 루터의 적대자” 코흘레우스의 저작을 “열렬히 신봉”해왔다.
카톨릭 교회사가 헤르테(Adolf Herte)가 입증하였듯이, 코흘레우스의 저작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카톨릭의 루터상(像)”을 결정해왔다. 수백 년 동안 거의 모든 카톨릭 학자들이 코흘레우스의 “사실과 애매한 말 그리고 헐뜯는 나쁜 소문들을 조잡하게 뒤섞은” “편파적 사료(史料)”를 근거로 루터에 대해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평가를 해왔다. 그러나 헤르테가 지적하듯이, 많은 카톨릭 교회 저술가들의 루터 연구는, 외형적으로는 객관성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루터를 왜곡해 온 것이다. 소수의 개인들이 루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경우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금서 등으로 제재를 받거나 무시되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교회들에 대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실종되고 “신교(新敎)”가 후퇴하여 “구교(舊敎)”가 되어가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파문과 금서, 이단(異端)심사 등으로 신앙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는 비판 또는 자기반성 등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나 국가에서는 루터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과 학문적 연구와 다양한 평가가 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에서와 같은 특정한 경향을 지적하기 어렵다.
19세기 이후에는 루터를 정치적으로 인식하고 이용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웅숭배와 독일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루터는 “독일인”의 화신이 되었고,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루터는 정치적으로 극심하게 왜곡되면서 정치 선전에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제3제국”은 초기에 루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고, 반면에 미국의 정치학자 맥거번(W. M. McGovern)은 루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유럽의 전쟁에 다시금 참여하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1945년 동독 지역에 진주한 소련 군사정부가 나찌(Nazi) 반대 세력을 지지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 아부쉬(Alexander Abusch)는 20세기 나찌의 뿌리를 “1525년 대 독일 농민전쟁의 비극적 패배”에서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아부쉬는 뮌쩌(Thomas Müntzer, 1489?~1525)를 “당대 가장 강력한 혁명가”라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만들어, 엥겔스가 1850년에 만든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반면, 루터는 “독일 농민들의 혁명을 제후들에게 팔아넘긴” 제후들의 “하인”이자 “독일 반혁명”의 대표자였으며, 루터파의 종교는 “노예제도를 영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아부쉬는 비난하였다.
이어 1949년 설립된 동독(DDR) 정부는 공산주의 사고방식을 국민들의 모든 생활 영역에 침투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힘으로 뮌쩌를 치켜세우고 루터를 비난하며 깎아내리는 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뮌쩌를 칭송하고 루터를 비난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루터를 옹호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89년 동독이 서독(BRD)에 흡수 통합되면서 뮌쩌에 대한 정치적 지원이 쇠퇴하자, “뮌쩌의 의미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루터에 대한 종파적·정치적 왜곡과 남용의 역사는, 그 동안 루터를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해왔으며, “참된” 루터의 다양한 면을 일부 반영하였다고 해도, 여전히 대부분 “오해의 역사”였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종파적·정치적 동기에서 선입관과 편견을 가지고 루터에 대해 연구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정치적 오해와 갈등을 더욱 확대시키고 충돌을 일으켜 전쟁과 같은 유혈 사태로까지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루터를 이해하고 연구하려는 사람은 종파적·정파적 선입관과 편견, 이해관계 등을 떠나, 엄밀하고 객관적인 학문적 양심과 이성으로 연구해야 한다. 또한, 종교집단이나 정치집단 등은 루터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방해하지 말아야 하며, 왜곡되거나 편파적인 견해를 확산시키지 말아야 한다. 종파적·정치적 목적에서 루터에 대한 오해, 편견, 비방, 왜곡이 “학문”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확산되어왔지만, 루터에 대한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와 자료는 크게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루터에 대해 편파적인 2차자료들을 주의하면서 루터의 원전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16세기 서유럽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해하고,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전개된 루터의 정치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되고 정치사상을 피력하게 된 과정을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루터 정치사상의 특징과 연구의 유의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어서 루터 정치사상의 근본이 되는 그리스도교적 기초를 논의하고, 루터 정치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왕국론”을 ‘정치의 독립과 한계’와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끝으로 루터의 정치사상이 현대에 갖는 의미를 제시해보기로 한다.
2. 루터의 종교개혁과 정치사상
ㄱ. 루터의 생애와 “반(反)성직자주의”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마르틴 루터는 현실적 이익과 경제적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보면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었다. 농촌 출신의 광부로서 자수성가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사람들의 존경까지 받고 있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정평 있는 시민 가문 린데만(Lindemann) 출신인 어머니 마르가레테(Margarete) 루터가 경건하고 엄격하게 훈육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철저히 절약해서 아들 마르틴을 대학에 보냈을 때는 부모로서 기대가 없을 수 없었다. 1501년 봄에 에르푸르트 대학 인문학부에 입학한 루터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듯 1505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시 유망한 직업인 법률가가 되기 위해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은 7월 2일, 부모를 방문하고 대학으로 돌아가다가 여름 뇌우를 만난 루터는 바로 옆에 벼락이 치는 와중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이던 “성 안나”를 부르며, “도와주소서.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하고 절규하였다. 결국 루터는 아버지와 상의하지 않고 법학을 포기하였고, 수도사가 되기 위해 7월 17일에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Augustinereremitenkloster)으로 들어갔다. 1506년에 수도사로 서원을 한 루터는 1507년 4월에 사제로 서품을 받고 5월에 첫 미사를 행하였다.
이어서 루터는 1508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하면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후 루터는 수도원의 문제로 로마로 여행할 기회가 생겨 “성지들”을 순례하며 로마 카톨릭 중심부의 부패하고 타락한 실상을 일부 체험하고 돌아왔다. 1512년 10월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가 되어 성서를 강의한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市)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고, 여러 수도원의 많은 행정적인 일까지도 관장하게 되었다.
법률가의 길을 버렸다고 해도, 수도사나 교수도 꽤 괜찮고 평탄한 길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평탄한 길을 걷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삶을 살았다. 루터는 엄청나게 많은 베스트셀러를 썼기 때문에, 저자로서 권리를 주장하였다면 대단한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돈에 관심이 없었다. 루터는 어마어마한 인세를 제안받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저 주어야 한다면서 거절하였다. 더구나 루터는 자신의 조언이나 도움을 받고자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하며 도왔으므로, 루터의 봉급과 선제후 현자(賢者) 프리드리히의 보조금만으로는 생활을 해나갈 수 없었다.
수도사 시절의 마르틴 루터
루터의 부인(Katharina von Bora)은 자식들을 키우면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으며 하숙을 쳤다. 경제적으로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루터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현명하였다고 할 수 없다. 루터는 자신을 적대시한 로마 카톨릭 지지자들과 논쟁한 것은 물론, 자신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때는 서슴없이 비판하고 논쟁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거절하고 선을 그었다. 카톨릭 교회에 실망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는 수많은 추종자들로 새롭게 큰 교회를 조직하고 교황과 같은 수장(首長)으로 군림할 수 있었지만, 루터는 자그만 교회의 설교자와 대학교수로 남았다.
정치적으로도 루터는 현실적이거나 현명하지 못하였다. 1521년 교황이 루터를 파문한 후 황제가 루터에 대한 법의 보호를 박탈하고 카톨릭 제후들은 루터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지만, 루터는 자신을 무력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았다. 루터를 보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 세력인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목숨을 위해서 아첨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지만, 오히려 루터는 선제후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고 생각할 때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인 루터는 선제후의 성물(聖物) 사업도 감히 비판하였다.
당시 치명적인 페스트가 여러 차례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비텐베르크를 떠나는 가운데 현자 프리드리히와 친지들도 루터가 피신하기를 원했지만,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남아 강의와 설교를 하면서 남은 사람들을 돌보았다.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스펠트의 백작 형제들의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를 떠났던 루터는 평화로운 해결을 중재했지만, 자신은 1546년 2월 18일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다.
루터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비판받고 조롱받는 가운데 “반(反)성직자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聖職)”들이 공공연히 매매되고,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사생아를 두고 공공연한 이중생활을 하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교서를 반포하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이 신도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일반적 분위기와 비교하면, 루터의 일생에서 대단히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면이 눈에 뜨일 수 있겠다. 그러나 루터에게 도덕과 양심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복음의 재발견과 종교개혁으로 이끈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고민이었다.
ㄴ. 복음의 재발견과 현실 비판
루터에게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고민은,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정의로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義)”(〈로마서〉 1장 17절)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직결되었다. 루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고민하며 수도사로서 당시 카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철저한 고행을 하고 고해 성사 등 성사(聖事)에 참가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스 철학이나 로마 카톨릭의 신학, 교회의 “성사”라고 하는 의식이나 교회에서 권하는 금욕, 고행, 명상, 사색 등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의(義)”의 문제는 하나님과 성령, 그리고 성서에 의해 해결되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같이 인간의 능동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앙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실 때”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을 수 있는 “수동적인 의”라는 것을 루터가 “하나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해결되었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인간)의 공적”이나 선행(善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해결되었다. “성령”이 루터에게 “성서를 계시”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고, 루터는 “완전히 새롭게 다시 태어나, 열린 문을 통해서 천국으로 들어간 것을 느꼈다.” 성서 전체가 “전혀 다른 얼굴로” 루터에게 나타났고, 루터는 성서를 새롭게 읽었다.
일반적으로 루터의 “탑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에는, 루터가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다시 발견하고 종교개혁적 인식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과 인식은 본질적으로 루터 개인의 신앙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체험과 인식이라고 해도, 순전히 개인의 차원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한 것에 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개인이 현실에서 복 받고 내세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믿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복음에 따라 살면서 성서 강의와 설교, 저술 등을 통해서 새 복음을 전파하였다. 루터의 새로운 복음 또는 신앙이 교회나 대학 같은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며 현실과 거리를 두었다면, 루터는 단순히 말 잘하는 설교자나 강의 잘하는 교수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새롭게 읽기 시작한 성서를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는 침묵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루터는 면죄부 등 로마 카톨릭의 제도와 관행과 전통, 신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를 비롯한 현실에 대해 성서를 바탕으로 토론을 제안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며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ㄷ. 《95개 논제》와 정치사상의 형성
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Leo) 10세(재위 1513~1521)는, 나이 20대 초반의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가 이미 막데부르크의 대주교이면서 할버슈타트의 주교였지만, 또 마인쯔의 대주교까지 겸하는 것을 허용하는 승인서를 교부하면서, 마인쯔의 대주교직 임명 대가로 14,000굴덴과, 교회법상에 금지된 겸직을 허용하는 대가로 10,000굴덴을 즉각 지불할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알브레히트가 금융 가문인 푸거(Fugger) 가(家)로부터 부족한 금액을 대출받아 지불하도록 중개한 뒤, 푸거가의 대리인이 테쩰(Johann Tetzel, 1465?~1519)과 같은 면죄부 판매 설교가와 함께 면죄부를 팔아, 매일 면죄부 판매액의 절반은 알브레히트의 대출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는 데 즉시 사용하고, 절반은 성 베드로 성당 건립 자금 명목으로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루터는 이러한 내막은 몰랐으나, 면죄부 판매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긋나는 점을 비판하며 토론을 제의하였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태복음〉 4장 17절)고 말씀하신 것 등은,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신 것이다”로 시작되는 《95개 논제(95개조 반박문)》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문에 게시하고,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도 편지와 함께 《95개 논제》를 보냈다.
95개조 반박문
27(2). (면죄부) 궤에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은 연옥 밖으로 튀어오른다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교리가 아닌) 인간의 교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82(7). ……교황이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거룩하지 못한 돈 때문에, 즉 가장 하찮은 이유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을 연옥에서 구해낸다면, 왜 교황은 가장 거룩한 사랑과 (연옥에서 구해져야 하는) 영혼들의 가장 긴박한 필요 때문에, 즉 가장 중요한 이유 때문에 영혼들을 모두 연옥에서 구해내지는 않는가?
86(11). ……오늘날 교황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크라수스보다 훨씬 더 부자인데, 왜 교황은 가난한 신자들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돈으로 베드로 성당 하나조차 짓지 않는가?
Luther’s Works, D. Martin Luthers Werke : Kritische Gesamtausgabe, Schriften
루터는 성서에 근거하여 면죄부 설교자 내지 면죄부 상인들의 논리를 반박하고 교황에게 의문을 제시하며 토론을 제안한 것이지만, 대주교 알브레히트와 교황 레오 등은 교황과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루터를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Jan Hus, 1371?~1415)처럼 이단으로 몰아 제거해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95개 논제》가 마침 발명된 활판 인쇄술로 대량으로 인쇄되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루터를 지지하게 되었고, 독일 제후들 중에서도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가 적지 않게 되어, 교황과 카톨릭 제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간단히 처치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의 파문을 받고 “이단”이라는 비난과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 카톨릭의 신학적 공격과 다양한 박해를 견디어냈다. 이 과정에서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더 본질적인 문제들을 파악하게 되었고,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올바른 의미의 교회가 아니며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1520년에는 일반적으로 루터 종교개혁의 3대 문서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도교계의 개선에 관하여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교회의 바빌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이 발행되고, 이른바 루터의 복음 또는 종교개혁의 3대 명제인,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믿음만(sola fide)”],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최고의 기준이다”[“성서만(sola scriptura)”], “모든 신자들이 다 하나님의 제사장(또는 사제)이다”(만인제사장주의 또는 만인사제주의)가 확고하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후스처럼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나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하다가 희생되었지만, 루터는 그러한 외면적인 부패타락을 비판한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부패타락의 근원이자 로마 카톨릭의 존립근거들을 비판하였다. 루터는 ‘행위에 의한 구원’ 사상 등 스콜라 철학과 신학, 성서에 앞선다는 교회와 전통과 교회법, 각종 의식(성사), 교황제도와 사제제도 등을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한 것이다.
나아가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적 명제 내지 자신이 다시 발견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를 포함한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루터는 구체적인 정치 현실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과 성서에 따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였고, 해결을 위해 황제와 제후 등 통치자들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루터의 정치 현실 인식이 깊어지는 가운데 루터의 정치사상이 형성되었으며, 정치에 관한 주요 저술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95개 논제》 이후 루터는 교황과 황제로 대표되는 지배체제의 두 축을 모두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였다. 루터는 혁명을 의도하지도 않았고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과정을 거쳐 교황과 황제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protestieren)’하고 참된 교회를 찾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들의 교회와 국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루터의 성서에 근거한 주장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를 포함한 전 중세의 정치적 체제까지 뿌리부터 개혁시켜, 유럽의 종교적·정치적 지도가 바뀌게 된 것이다.
ㄹ. 루터 정치사상의 특징과 연구의 유의점
루터는 정치와 종교, 사회, 경제, 문화, 교육,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1883년 이후 100년이 넘게 루터의 저작을 망라하여 발행해온 바이마르판 루터전집[D. Martin Luthers Werke : Kritische Gesamtausgabe(Weimar)]은 100권을 넘어선 지 오래다. 대략 60,000쪽이 넘는 양으로 추산되고 있다. 학자라도 일생을 모두 바쳐야 읽을 수 있는 양이고, 읽다보면 루터에 대해 독자적인 글을 쓸 시간이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원전보다는 2차 자료에 의존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그 결과 편견과 왜곡이 심한 2차 자료에 의지함으로써 루터를 오해한 견해나 저술들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루터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루터의 원전을 중심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터는 칼뱅(Jean Calvin)의 《기독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처럼 자신의 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정치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루터는 성서를 주해하면서 정치사상을 피력하고, 적대자에게 대항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루터의 정치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루터가 당시 시국과 관련해 쓴 작은 책자들뿐만 아니라, 신학 논문, 성서 주해서, 설교집, 그리고 찬송가까지도 함께 연구해야 한다.
루터는 이러한 저술들을 자신 앞에 닥쳐오는 긴박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썼다.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함께, 반드시 그 저술들이 쓰인 역사적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루터의 정치사상에는 “변증법적인 논리 전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 그리스도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 자유와 예속” 등, “서로 분명히 구분되면서도 서로 관계되는 양극단” 사이에 있는 “대립명제적인 긴장 관계”를 이해해서 루터의 정치사상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파악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근본적으로 루터의 정치사상은 루터의 종교관 즉 그리스도교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과 실존적 만남을 통해 복음을 다시 발견한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정신을 정치의 영역에까지 적용하려 한 것이 루터의 정치사상이었다. 루터의 정치사상은 루터의 정치에 대한 사색이나 이론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다. 또한 루터는 자신이나 특정 계급의 정치적 이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거나 정치사상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루터는 정치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적이며 신학적”으로 접근하여, 모든 정치적 문제를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라는 더 큰 문제의 여러 국면으로 보았다. 루터의 정치사상은 그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의 연장인 동시에 바로 그것 자체이다.
성서, 특히 바울의 서신들이 전하는 순수한 그리스도교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염원을 가진 루터는 정치에 관한 문제를 결정할 때, 성서 특히 신약 성서의 권위에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세상적인 정치사상가들의 저술은 무관한 것으로 무시하였다. 동시에 루터는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긴장 속에서 당시 정치의 현실을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루터의 정치사상은 그리스도교적 기초를 가지고 있고, 이 기초는 바로 루터의 정치사상의 핵심적 요소이자 특징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정치사상은 루터의 신앙 또는 그리스도교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루터 정치사상의 그리스도교적 기초를 하나님, 성서,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그리고 종말론을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3. 루터 정치사상의 그리스도교적 기초
ㄱ. 현대인의 신과 루터의 하나님, 그리고 정치
현대의 연구자는 자신의 신(神) 개념 또는 현대에 유행하는 신 개념과 정치관으로 루터의 하나님과 연결된 정치사상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현대의 신 이해가 루터의 하나님 이해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적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신은 실재적인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이다. 주로 경험보다는 사색의 결과로 이해하는 추상적인 신은, 철학이나 신학의 이름으로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종잇장이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신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삶과 무관하고 정치의 현실에 대해서도 무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신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무신론자(無神論者)들과 마찬가지로 신을 배제한다.
그러나 루터의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는 “인격적” 존재이다. 루터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도 아니고, 비인격적인 운명도 아니며, 숙명론의 무관심한 신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항상 우리 인간들을 사랑과 선으로 대하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항상 일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며 모든 것을 주관한다. 세계와 역사를 다스리고 각 개인의 삶을 주관하며, 정치 현실도 실제적 능력을 가지고 지배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필요하고, 우리가 정치 문제를 생각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한다.
둘째, 많은 현대인들이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 “기복(祈福)주의”에 빠져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의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이, 물질의 복(福) 또는 현세적 축복을 내려준다는 부(富)의 신 즉 맘몬(Mammon)을 섬기는 현상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맘몬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다(〈마태복음〉 6장 24절).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실제로는 부 숭배, 물신(物神) 숭배 즉 “맘몬 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특정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현세적 이익을 빌어주는 무당의 수준으로 이해한 것, 또는 하나님과 맘몬을 혼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맘몬 숭배에 빠져 있는 “신도들”은 공공의 영역인 정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정의나 사회 정의보다는 자신들의 현세적 축복을 위한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신도들” 또는 “우리 교회”만의 배타적이고 특권적인 이익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교회”의 권위로 주장하며, 정치적 압력을 넣고 실력 행사까지 하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공평무사한 민주주의 정부보다는 자신들에게 현실적 특혜를 주는 독재 정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경우가 많고, 독선적인 “선민(選民)의식”을 가지고 폭행, 살인, 전쟁조차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세상에서 부(富)와 맘몬만큼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루터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주린 자”에게 복이 있고, 부자에게 화(禍)가 있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이다. 루터의 하나님은 “신자들”만의 신이나 특정 종교 집단의 신이 아니라, 온 인류의 “아버지 하나님”이다. 신자들에게 특권적으로 물질의 복을 약속하는 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이다(〈누가복음〉 6장 20절~21, 24절. 〈마태복음〉 6장 9절 ; 16장 24절). 하나님과 맘몬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으므로 두 주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이 바로 나의 신”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나의 소유 전체와 그리스도 중 하나만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릴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악마의 “파렴치한 병”에 걸린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하나님은 정치에 대해서도 정의와 사랑을 요구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도 희생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돈이든 쾌락이든, 인기든 명예든, “맘몬” 때문에 자신의 이웃과 사회에 대한 의무를 올바로 완수하지 못하는 자는, 평민이든 제후든, 설교자든 정치가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다.
셋째, 정치적 이익 또는 국가의 이익과 그리스도교를 결합시킴으로써, 온 우주와 전 인류의 하나님을 특정 정권이나 국가의 이기주의에 봉사하는 신으로 격하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제3제국”의 “독일 기독교”나, 일본 제국주의의 “일본적 기독교”, 강제로 통합된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등은 과거의 예이고, “미국 종교” 또는 “공민 종교”(또는 “시민 종교”) 등은 현재의 예이다.
그러나 루터의 하나님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민족, 국가 등의 이기적·정치적·경제적 욕구를 배타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신이 아니다. 루터의 하나님은 개인이나 집단의 무당도 아니고, 민족이나 국가의 신도 아니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정치가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정치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정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지, 하나님이 정치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가나 종교가나, 황제나 교황이나, 제후나 농민이나,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자신의 이기적·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1525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정치적 요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며 무력으로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철저히 반대하였다. 무력을 가진 기사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루터를 지지하며 독일 민족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연결시키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루터는 지지를 거절하고 반대하였다.
넷째, 현대인들이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이신론(理神論, deism)적 사유에 의하면, 신은 이 세상을 처음 움직이게 하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에게 세상을 맡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와 산업사회, 그리고 자본주의가 원하는 신이다. 그들은 세상에 계속 개입하는 신을 견딜 수가 없다. “상인이나 사업가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신”은 현대 자본주의의 온갖 폐해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 개념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로부터 멀리 떼어놓고자 하는 “속세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루터의 하나님은 이신론적 사유가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 모든 일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루터의 하나님은 모든 “이 세상의 일에 능동적으로, 결정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입한다”. 정치든 종교든, 이 땅 위에 일어나는 일치고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지 않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관할한다. 하나님이 뜻하지 않으면 나뭇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세상에 통치자들을 세우고 그들을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간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통치자들은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정치와 종교 등 모든 것의 미래도 지배한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인간과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황제든 교황이든 겁낼 필요가 없고, 단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다섯째, 많은 현대인들은 신을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통해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정치 현실에서도 인간이 판단하고 노력함으로써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정치적 이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을, 모든 인간적 차원과 사유를 초월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하나님은 “육체를 초월하고, 정신을 초월하고, 우리가 말하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다”. 정치의 현실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와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최상의 정치적 목표와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루터는 정치나 종교의 현실에서 “먼저 인간과 인간의 가능성을 보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을 형이상학적 미봉책으로서 보는 것”을 부정한다.
ㄴ. 성서와 이성, 그리고 정치
루터의 하나님은 세상과 떨어져 멀리 있지도 않고 홀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인 동시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의 저자는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며,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인간의 말이나 제도와 관습 등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성서를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만(sola scriptura)”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요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 등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직자, 교황, 교회, 공의회, 교회법, 전통, 교리 같은, 인간 또는 인간의 제도와 관습 등이 그리스도교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항상 교회, 교황, 공의회 등 무엇보다 앞서며 훨씬 중요하며 절대적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중심인 성서는 성서 스스로를 해석하며 올바른 종교와 정치의 역할을 규정해준다. 교회나 교황이 성서를 해석하고 종교와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의 모든 교리와 제도와 관행은 성서에 비추어 검토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교회나 수도원, 또는 강단 등 특수한 영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서는 종교와 정치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 오도되고 부패한 현실을 개혁하여야 한다. 성서는 그리스도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종교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루터의 새로운 성서관은 카톨릭 체제를 돌파하는 개혁으로 연결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오컴(William of Ockhamm, 1285?~1349)은 루터보다 앞서서 성서를 근거로 하여 카톨릭 교회를 철저히 비판했지만, 오컴에게 성서는 현실의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교회의 법에 불과하였다. 성서를 법으로 보았던 유명론자나, 성서를 학문적 연구를 위한 자료로 보는 인문주의자들은 카톨릭 체제를 돌파할 수 없었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던 루터만이 카톨릭 체제를 돌파하고 종교와 정치 등에 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루터는 카톨릭 교회가 부패 타락하고 오류에 빠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버린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루터는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전통에서 떠나서, “성서에만 순종하기로 결심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올바른 모범을 따랐다. 루터처럼 했더라면 “교황은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기어다니는 해충 떼거리 같은 그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교회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며, “성서가 설교단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서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등 일반인들이 성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막았고, 교회의 성직자들도 라틴어로 번역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는 성서를 그리스어(신약)와 히브리어(구약) 원전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성서 원전에 근거한 설교와 강의를 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부딪히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인간의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에 근거하여 해결책을 모색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성서중심주의는, “성서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이 대중화되어버린 현대에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현대는 “완전히 성서가 상실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성서를 읽는다고 해도 성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루터의 성서중심주의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가르침이 정치와 종교 등 인간의 모든 현실에도 그대로 철저히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성서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는 많은 현대인의 성서 이해와 대조되고 있다.
악마가 예수를 시험하자 예수는 성서를 근거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즉시 악마는 성서를 이용하며 예수를 다시 시험하는 장면(〈마태복음〉 4장 1~11절)에서 볼 수 있듯이, 악마처럼 자신의 악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성서를 이용하는 ‘악마식 성서 이용’과, 예수처럼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성서를 이용하는 ‘예수식 성서 이용’이 정치에서도 대립되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정치적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악마식 성서 이용’이 있고, 정치 현실에도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고자 하는 ‘예수식 성서 이용’이 있다. 루터는 ‘악마식 성서 이용’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장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비판하였고, ‘예수식 성서 이용’에 기초한 정치사상을 전개하였다.
근대 이후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근대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이성이 아닌,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성서를 이해할 수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루터가 그리스도교계의 개혁을 호소하며 통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능력 또는 권력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첫째가고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이 다 우리 것이라고 할지라도, 거대한 힘이나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일을 시작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힘이나 이성을 신뢰하면서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한다는 것을 용인하실 수도 없고, 또 용인하시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들을 사정없이 짓밟아 버리신다.
Luther’s Works, D. Martin Luthers Werke : Kritische Gesamtausgabe, Schriften
ㄷ.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종말론, 그리고 정치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중시한 성서는 하나님의 적대자인 악마(사탄)를 실제적 존재로서 명시하고 있고, 임박한 종말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 등의 견해를 전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이 임박했음을 믿고 살았고, 서구인들에게 악마와 임박한 종말에 대한 인식은 보편적 사유의 하나가 되어왔다. 루터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마가 실제 존재하며 종말이 임박하였다고 믿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을 갈망하고 있었다. 1499년 튀빙엔의 한 대학교수는 1524년에 대홍수가 일어나 2월에는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1515년 빈의 한 점성술가는 일반인과 교회, 그리고 성직자와 귀족 사이의 분열이 우주의 재앙에 대한 강력한 표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러한 종말론의 배경 속에서 루터는 악마(사탄), 교황, “열광주의자들”, 투르크인들, 유대인들, 흑사병 등과 관련하여 종말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교황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은 종말의 징조라고 믿었다. 이미 1514년에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가 종말의 징조라고 결론을 내렸다. 1524년 이후에 유행했던 종말에 관한 상상들이 루터의 종말론적인 표징들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루터가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 같은 것을 과학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고 비윤리적인 미신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루터는 성서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예언을 근거로 자신이 살고 있는 종교개혁의 시대를 윤리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루터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그리스도, 그리고 교황의 시대로 이어진 세계의 역사는 종말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세계는 육천 년의 나이”가 들었으므로 “세계는 이제 파멸될 것”이다. 이 육천 년 동안 신자와 불신자, 하나님과 사탄, 참 교회와 거짓 교회(즉 로마 교회) 사이에 싸움이 있을 것이다. 교황과 같은 적그리스도가 종말 전에 출현하고,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후스 같은 예언자들이 출현하여 종말을 예언하고 복음은 회복될 것이다.
루터는 당시 오래된 프리드리히 황제 전설의 예언이,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성서를 보급할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 제도와 같은 것은 “오직 주 그리스도 자신께서만 그것을 죽이고 파괴하실 것”이며, 종말과 같은 우주적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오직 임박한 재림을 위해 “최후의 나팔 소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종말론은 악마 인식과 연결된다. 루터는 인간을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 한복판에 서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적하는 악마는 첫인간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항상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잘못된 교리와 이단의 뒤에는 악마가 있고, 악마는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악마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악마의 제도”인 교황 제도와 복음의 왜곡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악마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루터가 복음을 다시 발견한 것을 악마는 “참아내지” 못할 것이며, 다시 한번 무서운 힘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복음에 대항하여 모든 세력을 결집시킬 것이다.
루터의 악마 이해와 종말론 인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복잡한 논쟁이 있다. 코흘레우스처럼 루터를 악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코흘레우스의 주장에 근거하여 루터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을 납득시키기에는 객관적 타당성이 부족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루터가 중세 말의 “미신”을 넘어서지 못하였다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이나 종말론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예를 들어, 루터 당시 인문주의자의 대표격이었던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1469~1536), 자연과학적 혁명과 함께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온 코페르니쿠스(Nikolaus Kopernikus, 1473~1543), 예술가이자 자연과학자였던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악마의 실재를 믿고 악마의 활동에 관한 글을 썼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루터는 성서에 근거해서 악마와 종말론을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루터의 이해가 미신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다는 점만 감안해도, 루터는 중세 말의 보편적인 악마와 종말론 이해를 뛰어넘고 있고, 현대까지 지속되는 미신적 악마론이나 광신적 종말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루터가 당시 정치의 현실을 하나님에 대적하는 악마의 활동이 극심해진 종말론적 상황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정치사상은 이러한 루터의 인간 이해와 임박한 종말에 대한 인식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루터의 정치사상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두왕국론을 ‘정치의 독립과 한계’와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관점을 가지고 살펴보기로 한다.
4. 정치의 독립과 한계
ㄱ. “두왕국론”과 《세상의 통치에 관하여》(1523)
루터의 정치사상과 관련하여 “두 왕국”과 “두 통치(정부)”, “두왕국론(die Zwei-Reiche-Lehre)”과 “두통치(정부)론(die Zwei-Regimenten-Lehre)”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루터 정치사상의 핵심 또는 루터의 정치사상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두왕국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두왕국론”의 내용, 평가, 현실 적용 등에 대해서는 극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루터의 정치사상을 “두왕국론”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22년 독일의 신학자 바르트(Karl Barth)가 처음으로 사용한 이후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루터 자신은 “두왕국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루터가 자신의 정치사상을 체계화하여 저술하지 않았고, 그때그때 긴박한 상황에 따라 상이한 맥락에서 “왕국(Reich)”과 “통치(정부, Regiment)”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루터의 정치사상을 “두왕국론”으로써 일반화하는 문제는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두왕국론”의 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논문인 《세상의 통치에 관하여 : 어느 정도까지 복종해야 하는가》(1523)에 나타난 루터의 정치사상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루터는 1521년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고, “이단”으로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거나 루터가 다시 발견한 복음을 믿는 사람들도 로마 카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카톨릭측 세상 통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음 세 가지가 《세상의 통치에 관하여》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로 평가되고 있다. 첫째, 1522년 로마 카톨릭 제후들은 루터의 책을 금지하며, 루터의 책을 읽거나 토론하는 것을 금지하는 종교적 명령을 내렸다. 특히 작센의 게오르크 공작(Herzog Georg von Sachsen)은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서를 금지하고 루터의 책들을 압수하였다. 루터는 무수한 글을 썼지만, 이렇게 급박해진 세상 통치자들의 폭력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통치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쓴 것은 없었다.
둘째, 1522년 10월 루터는 바이마르에서 여러 번 설교하면서 영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설교에 감복한 작센의 요한 공작(Herzog Johann von Sachsen) 등이 설교 내용을 책으로 출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루터는, 설교 원고는 없지만 곧 써서 출판하게 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셋째,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고문이던 파일리취(Philipp von Feilitzsch)가 저명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쉬바르쩰베르크(Johann Freiherr von Schwarzenberg)의 저서에 대해 루터의 견해를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루터는 많은 면에서 쉬바르쩰베르크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세상의 통치에 관한 문제에서는 의견이 같지 않음을 밝히면서, 이 문제를 글로 쓰겠다고 하였다. 1522년 여름에 글을 구상한 루터는 1523년에 책으로 출판하였다.
ㄴ. 두 왕국과 두 통치(정부)
-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
현대적 의미의 “국가”나 “정부”의 개념이 통용되지 않은 때이므로, 루터는 “통치(자)(Oberkeit, Obrigkeit)”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다. 중세말의 교황주의자들은, 신이 로마의 주교인 교황에게 영적인 통치권뿐만 아니라 세상(세속)의 통치권까지 부여하였고, 교황은 세상 통치권만 황제와 세상(세속) 통치자들에게 위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교황과 카톨릭 교회는 황제 등 세상 통치자들과 대립 또는 충돌하거나, 협력 또는 야합하는 가운데 정치와 종교가 혼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세상의 법과 칼” 즉 “세상의 통치”가 “하나님의 뜻과 질서에 의해서 세상에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루터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이다.
세상의 통치에 근거가 되는 (성서의) 말씀들은 다음과 같다 : 〈로마서〉 (13장 1~2절) “사람은 누구나 통치자(또는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 모든 통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통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베드로 전서〉 2장 (13~14절), “최고 지배자인 왕에게나, 그가 악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선한 사람들을 칭찬하기 위해 보낸 관료들에게나, 모든 인간적 질서에 복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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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세상의 통치 즉 정치의 영역도 직접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워진 질서라는 것을 성서로써 입증하고 있다. 정치는 종교로부터 독립되는 것이며, 교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황이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권에 개입할 근거가 없다. 물론 루터가 근거하는 성서에는 그리스도의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복음〉 5장 39절)” 등과 같은 구절들이 있어서,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칼”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세상의 칼이 지배하는 “세상의 왕국”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왕국”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자손과 온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해야 한다. 첫째 부류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고 둘째 부류는 세상의 왕국에 속한다.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밑에 있는 참된 신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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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왕국(나라)”, 즉 “그리스도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밝힌 것처럼, “이 세상의 왕국(나라)이 아니다”(〈요한복음〉 18장 36~37절). 이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법이나 칼”이 필요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성령이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고, 누구나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의 불의와 죽음까지도 기꺼이 즐겁게 견뎌내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소송, 분쟁, 법정, 재판관, 형벌, 법 또는 칼”이 필요 없다. 따라서 세상의 법과 칼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할 일을 찾아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지시나 법이 없어도 좋은 나무의 본성상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 영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
문제는, 세상이 모두 악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수천 명 중에 겨우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 점이라고 루터는 지적한다. 모두가 “세례”를 받고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드물다. 나아가 “악에 대적하지 않고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은 더욱 적다.” 세상과 다수는 항상 비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비그리스도인들 속의 소수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세계와 하나님의 왕국 밖에 “세상의 통치”를 세우시고, 비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칼에 복종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마음대로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두 통치를 세우셨다. 영의 통치, 이것을 통해서 성령은 그리스도 아래 그리스도인들과 의로운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세상의 통치, 이것은 비그리스도인과 악한 사람들을 억제하여, 자신들의 의지에는 반하지만, 질서를 지키고 외적인 평화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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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영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는 모두 다 존속해야 한다. 세상의 통치만 있는 곳에서는 “완전한 위선이 불가피하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될 수 없다. 반면, 영의 통치만이 있는 곳에서는 악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게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을 것”이고,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성서가 명시한 것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항상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보다 많은 현실 속에서 “전 세계 또는 한 국가 또는 어떤 집단을 지배하는 그리스도교 통치”란 있을 수가 없다고 루터는 단언한다.
이러한 두 왕국과 두 통치를 근간으로 하는 루터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루터가 권위주의적인 지배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는 비난 같은 것은, 루터가 《세상의 통치에 관하여》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권위주의적인 지배자들(세상 통치자들)의 횡포 때문이라는 점과, 루터 자신이 이 글의 “주요 부분”이라면서 《세상의 통치에 관하여》의 제2부에서 세상 통치의 한계를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는 점과, 그리고 여러 곳에서 통치자를 비판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루터를 오해 또는 왜곡한 것이다.
ㄷ. 세상 통치의 한계와 통치자(제후) 비판
- 세상 통치의 한계
루터는 영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는 본질적으로 각각 다른 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114) 세상의 통치는 “이 세상의 생명, 재산, 그리고 외면적인 일들”에 적용되는 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통치가 영혼에 대한 법을 규정하고 적용하려 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을 침범하여, 인간의 영혼을 오도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제후들이나 주교들이 사람들에게 이것은 믿고 저것은 믿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보들”의 짓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교부(敎父), 공의회 등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지독한 바보짓”이다. 교회가 아니라 “악마의 사도들”의 짓이다. 왕이나 제후 그리고 신민(臣民)들은 특정한 신앙이나 종교를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훨씬 더 바보짓”이다. 국교(國敎)나 신정(神政) 정치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루터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영혼을 구할 수 있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관할하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개인적인 것이다. 신앙은 개인 양심의 문제이며, 개인이 스스로 책임을 지며 자유롭게 선택하는 문제이다.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영혼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인간이나 제도 또는 권력이 신앙을 만들어내거나 강요할 수 없다. 세상의 통치자가 개인 신앙의 문제를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정치권력이 종교의 문제를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카톨릭 통치자 같은 “이 눈멀고 가련한 인간들”이 신앙의 문제를 강요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위선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렇지만, 제후 같은 세상 통치자가 교황 측에 서서 로마 카톨릭만 믿고 루터의 책들은 제거하라고 명령한다면, 당신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경애하는 제후님, 저는 제후님께 육체와 재산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후님께서 제후님의 땅 위의 권한 범위 안에서 명령하시면 저는 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무엇을 믿으라든가, 어떤 책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신다면, 저는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Luther’s Works, D. Martin Luthers Werke : Kritische Gesamtausgabe, Schriften
루터는 세상 통치자가 넘어서는 안 되는 정치의 한계를 “육체와 재산”과 “땅 위의 권한 범위 안”으로 지적하면서, 카톨릭 측 세상 통치자들이 내린 명령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루터의 성서를 빼앗으려는 “폭군들”은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젖먹이들을 살해했던 폭군 “헤롯과 똑같이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자”들이다. 따라서 성서를 넘겨주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헤롯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다. 성서의 “단 한 쪽도 한 글자도” 넘겨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폭군들의 악행에 저항하면 안 된다. 인내해야 한다. 집을 수색당하고 책과 재산을 강제로 빼앗긴다면, 참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악한 명령을 승인하거나 복종해서는 안 된다.
- 통치자(제후) 비판과 농민전쟁 경고
루터는 세상 통치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루터의 적대자들이 비방하고 루터를 악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세상 통치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항상 “하나님의 명령”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적인 통치자들에게 항상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는 조치를 내릴 경우에는 복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상의 통치자들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존경해야 한다.
Luther’s Works, D. Martin Luthers Werke : Kritische Gesamtausgabe, Briefwechsel
루터는 통치자들은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며, 신민들은 통치자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지 않을 때만 복종해야 한다고 세상의 통치를 명백히 제한한다. 이러한 종교적 제한이 없다면, 정치권력의 지배는 전체주의적이 되어버린다. 루터 자신이 통치자들의 권고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았다. 루터는 주장을 취소하라는 교황을 비롯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명령과 강요에 굴복하지 않았고, 황제와 카톨릭 제후들의 살해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1521년 4월 18일 황제와 제후들, 그리고 교황의 사절을 비롯한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이 모였던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글을 취소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루터의 발언은 개인 양심의 자유 확립과 함께 통치자에 대한 루터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의 글에 대해 성서와 명확한 이성으로써 유죄임을 입증하지 않는 한(나는 교황이나 공의회 자체의 권위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잘못을 범하며, 서로 모순이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다르게 행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서 있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Luther’s Works, D. Martin Luthers Werke : Kritische Gesamtausgabe, Schriften
교황과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루터는 자신의 제후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권고나 명령에도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보름스 제국의회 발언 이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카톨릭 측 제후들 등의 살해 위협을 피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신하며 성서 번역과 저술을 하고 있을 때, 루터가 없던 비텐베르크에서는 종교개혁을 급진적으로 실천하려는 소요가 발생하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오지 말도록 만류하였지만,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비텐베르크로 가려 한다”는 편지를 선제후에게 보내고, 자신의 가공할 적대자인 게오르크 공작의 영지를 경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텐베르크로 가서 소요를 진정시켰다.
루터는 제후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후들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루터는 《세상의 통치에 관하여》를 제후인 요한 공작에게 헌정하면서도, 제후들 대부분이 “바보들”이고 “악당들”이라고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다.
세상의 시초부터 현명한 제후는 아주 희귀한 새와 같고, 경건한 제후는 훨씬 더 희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제후들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들이고, 가장 악한 악당들이다.……만약에 제후가 현명하거나 경건하거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가장 큰 기적의 하나이며, 그 나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가장 고귀한 증거이다.
Luther’s Works, D. Martin Luthers Werke : Kritische Gesamtausgabe, Schriften
이렇게 현명하고 경건한 제후가 드문 것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사악하기 때문이라고 루터는 보았다. 제후들은 “하나님의 교도관들이며 교수형 집행관들”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한 자들을 처벌하고 외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제후들을 사용한다. 사악한 세상은 현명하고 경건한 제후를 가질 “자격이 없다”. 따라서, 특히 영혼의 구원에 관련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제후들로부터 항상 최악을 예상해야지 거의 선(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제후들이 할 일은 팽개치고 춤, 사냥, 경주 등 세상의 쾌락에 빠지는 것을 비판한다. 더구나 세상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혹독히 부려 먹고 벗겨 먹으며”, 세금 위에 세금을 부과하고, 공물 위에 공물을 강요하여 착취하면서, “저기엔 곰을 풀어놓고 여기엔 늑대를 풀어놓지만”, 통치자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정의, 신의, 진리가 없다. 루터는 이처럼 정치 현실에 정의와 진리를 요구하면서, 세상 통치자들은 “도둑놈이나 악당보다 악하게” 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세상 통치는 “영적 폭군들”의 통치와 같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버렸다. 그들은 죄 위에 죄를 쌓아 하나님의 진노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결국 교황, 주교, 수도사들과 함께 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는 않고,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죄의 대가 때문에 복음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며 루터의 가르침을 비방한다.
이러한 루터의 제후 비판과 역사적 사실을 보면, 루터가 제후들에게 아첨하였다든지 제후의 “하인”에 불과하였다는 종파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비방들이 얼마나 사실을 왜곡한 적대자들의 공격인지 알 수 있다. 루터처럼 목숨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도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과 정의의 차원에서 교회든 국가든 영적 지도자들이든 정치 권력자들이든 비판을 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중세뿐만 아니라 국민이 계몽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져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확보되어 있다는 현대에도 찾기 어렵다.
루터는 제후들 비판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제후들에게 “치욕을 부으실 것”(〈시편〉 107장 40절)이라는 성서의 말씀에 유의하라고 주의시킨다. 루터는 억눌린 농민들이 봉기하여 농민전쟁과 같은 참사가 일어날 것을 예언적으로 경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제후를 “바보나 악당”으로 간주하고 있고, 제후들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극심해지고 있다. 제후들이 제후로서 행동하고 세련되고 이성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이 치욕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들의 폭정과 악행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고, 참을 수도 없으며, 참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제후들은 지혜로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관대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배우고 있다. 세상은 이미 “사람들을 짐승처럼 몰고 사냥할 수 있었던 예전 세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악행을 포기하고, 정의롭게 다스려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후들이 막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후들이 칼을 계속 휘두른다면, 누군가가 와서 강제로 칼을 칼집에 넣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예언적 경고는 특히 1525년의 농민전쟁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루터의 제후 비판과 경고는, 주로 제후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폭정과 악행을 그만두라는 요구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게 놔두라는 것, 즉 루터의 종교개혁을 막으려 하지 말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이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 신민과 제후가 정치에 어떠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보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5. 그리스도인과 정치
ㄱ. 영의 통치의 본질과 정치와 종교의 혼합 비판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영의 통치”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루터는 사제나 주교와 같은 성직자나 교직자들이 본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거나 통치 또는 강제하고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봉사와 행정을 위한 직책일 뿐이지, 군림하며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다. 사제나 주교도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높거나 나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다(〈누가복음〉 14장 10절).
바울과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남을 자신보다 높은 사람으로 여기고 스스로 낮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이다(〈로마서〉 12장 10절, 〈베드로전서〉 5장 5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은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뿐이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동등하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어느 누구도 높은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고, 될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러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는 통치자나 지배 체제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로마의 교황이 교황국(또는 교황령)의 통치자로서 세상 통치자들과 똑같이 거대한 궁성을 짓고 군대를 거느리고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면서 동맹을 맺고 전쟁과 정벌을 하며, 카톨릭의 “영의 통치자”들이 무력과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영의 통치”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세상의 통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는 “영의 통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다스리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무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리스도인들은 인도되고 이단을 극복하는 것이고,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신앙)이 생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지, 외적인 행위를 통제하는 무력이나 강제력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영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니라 세상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의 통치”를 받으며 외적인 행위가 질서와 평화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강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강요받지 않아도 스스로 선을 행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풍요한 “영의 통치” 안에 있다.
루터의 “자비롭지 못하신 주인들이신 교황과 주교들”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라고 있는 존재겠지만,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있다. “영의 통치자”라는 교황과 주교들은 이미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생명과 재산만을 다루는 세상의 법으로 성과 도시, 땅과 백성들을 외면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정반대로, 제후 같은 세상의 통치자들은 원래 땅과 백성들을 외면적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지만, 그 일은 하지 않고 내면적인 일인 영혼의 일에 대해 명령하고 있다.
주교들과 제후들은 “신발을 완전히 바꿔 신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할 주교들은 제후들을 통해서 무력으로 다스리고, 무력을 사용해서 범죄를 예방하며 세상을 다스려야 할 제후들은 스스로 죄를 지으며 범죄자들은 주교들을 통해 파문장을 발부하도록 한다. “영혼은 쇠로 다스리고 육체는 문자로 다스린다.” 그럼으로써 세상 제후들은 영적으로 다스리고, 영적인 제후들은 세상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루터는 “영의 통치”의 본질을 밝히면서 “영의 통치”의 명목 아래 정치와 종교가 혼용, 혼합되고 있는 정치와 종교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ㄴ. 그리스도인의 희생적 정치 참여
그리스도인들이 “영의 통치”를 받고 비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통치”를 받는다면, 그리스도인과 세상 통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 때문에 세상 통치의 칼과 법에 복종한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낫기 위해서 환자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음식이 필요해서 남을 먹이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자신에게 세상 통치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고 악한 사람들이 더 악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 통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세상 통치에 복종한다.
칼이란 평화를 유지하고 죄를 처벌하며 악한 자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온 세상에 제일 이롭고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통치 제도를 돕기 위해 아주 기꺼이 칼의 통치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고, 통치자들을 존경하며, 봉사하고, 돕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여, 통치 제도가 기능을 계속하고 존경과 두려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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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해 세상의 통치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교수형 집행관, 경찰, 재판관, 제후 또는 영주”가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직책을 맡아서, 필수적인 세상 통치가 경시되거나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와 네 이웃을 위해서” 유익하고 필수적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사랑으로 섬기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그리스도인이 하는 것처럼 통치자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나쁜 예”를 보여주게 된다. 따라서, 실제로는 복음이 그리스도인을,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만듦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거나 섬기기를 싫어하는 고집 센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반란을 선동하는 것처럼 나쁜 평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도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7장 27절).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희생 위에서 하나님이 세운 두 왕국은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방식으로써 두 가지 명제가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동시에 당신은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을, 외적으로는 세상의 왕국을 만족시킨다. 당신은 악과 불의를 참아낸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악과 불의를 처벌한다. 당신은 악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악에 저항한다. 한편에서 당신은 당신과 당신의 것을 고려한다. 다른 한편에서 당신은 당신의 이웃과 그의 것을 고려한다. 당신과 당신의 것과 관계되는 경우에는, 당신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으로 자신을 다스려 당신에 대한 불의를 참아낸다.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의 것과 관계되는 경우에는, 당신은 사랑에 따라 자신을 다스려 당신 이웃에 대한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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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나 자신의 일에 칼을 사용하거나 칼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악을 억제하고 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사용하고 칼에 호소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루터가 “세상의 통치”로 설명한 것은,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정치뿐만 아니라 법 등 국가의 질서, 사회 제도나 기관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과 정치’의 관계로 한정하여 요약해 본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종교집단의 특권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전 세계와 네 이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즉 ‘이웃사랑’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배척이나 멸시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의 대상이다. 종교가 다르고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가운데 질서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돕고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각자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은 많은 “믿는다”는 사람들을 비롯한 종교집단들이 이웃사랑은 차치하고 공공의 이익조차 무시한 채, 자신들만의 특권적 이기적 이익을 위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자신들만의 특권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정치인을 지지하고, 자신들에게 특혜를 주는 독재정권과 결탁되어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적극적인 봉사이다. 그리스도인은 심산유곡으로 숨거나 수도원이나 교회와 대학 등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를 개혁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하나님의 정의가 정치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관련되는 것은 희생적으로 인내하지만, 이웃에 대한 불의나 사회적 불의는 용서하지 않는다.
ㄷ. 그리스도인 통치자(제후)의 이상
루터는 칼을 사용하는 통치자의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제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이상적일 것으로 본다. 루터는 《세상의 통치에 관하여》 제3부에서 그리스도인 제후를 이상적인 통치자로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길을 안내하고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 통치자의 길은, 가려는 사람이 매우 적을 것이고 항상 어려움이 따르는 길이지만, 불가능한 길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 제후가 되려는 사람은 우선, 보통 세상 제후들처럼 섬김을 받고 무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삶이나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삶이나 행동은 저주받았기 때문이다.154) 또한 제후는 법을 칼처럼 손에 확고히 장악하고, 법이 항상 어떤 경우에나 적용되면서도, 이성이 최고의 법이 되고 법의 집행에서 주인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진실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첫째로 루터가 “진실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한 것은, 제후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제후는 항상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솔로몬 왕처럼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열왕기 상〉 3장 9절). 법률책과 같은 “죽은 책”이나 법률가 같은 “살아있는 머리”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매달려 모든 책과 선생들을 뛰어넘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 제후는 신민들을 고려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진실로 그들에게 헌신해야 한다. 제후들은 “이 땅과 백성들은 내 것이고,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 땅과 백성들의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유용하고 좋은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제후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신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다음과 같이 스스로 다짐하며 통치해야 한다.
“보라, 가장 높으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섬기기 위해 오신 것을. 그리스도는 나에게서 권력, 재산,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오직 내가 필요한 것만을 생각하시고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권력, 재산, 명예를 얻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셨다. 나도 똑같이 하겠다. 나는 나의 신민들에게서 나의 유익이 아니라 신민들의 유익을 구하겠다. 나는 나의 직책을 나의 신민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하겠다. 나는 신민들의 어려움을 듣고 그들을 보호하겠다. 나는 내가 아니라 신민들이 나의 통치에서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바로 그 목적만을 위해서 다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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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제후는 자문관들이나 관료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또한 그들을 적절히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아무리 높고 지혜롭고 성스럽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제후는 항상 말을 타고 영지를 돌면서 시찰해야 한다. “성령으로 가득 찬 선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제후의 영지와 백성들에 대해 진실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제후는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그가 언제까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머무를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마부가 직접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말이 달리게 하지만, 말을 자갈과 채찍으로 통제하면서 졸지 않는 것처럼, 제후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명을 충실히 완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후는 “살진 돼지”와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넷째, 제후는 악을 행한 자들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악을 행한 자를 처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서 행악자를 처벌해야 할 경우라도, 그 처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해악을 미치게 된다면, 예를 들어 전쟁이 발생하여 과부와 고아들이 생기게 된다면, 처벌하지 않거나 적절히 미루어야 한다.
루터가 다섯 번째로 제시한 보상(Restitution), 즉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물을 돌려주는 문제는 당시는 세상 통치자가 다루어야 할 문제였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반드시 정치의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랑의 법”에 따라 사회의 문제를 무난히 해결하는 그리스도인의 희생적인 삶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에 대한 루터의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루터는 보상의 문제에는 “사랑의 법”이 가장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루터에 의하면, 보상의 두 당사자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면 금방 해결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것을 갖고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당사자 중 하나만이 그리스도인이면, 역시 해결하기 쉽다. 보상받아야 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은 보상받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보상해야 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기꺼이 보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당사자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보상 문제는, 가난한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이어서 루터는 “모든 책의 법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이성”에서 나오는 모범적인 판단을 소개하면서, 성문법이 이성에 복종해야지, 이성이 문자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는, 이렇게 통치를 하면, 제후의 일들이 모두 잘 수행될 것이고, 하나님과 신민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 제후는 시기를 받고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고 한다. 즉 “십자가”가 그리스도인 통치자의 어깨에 지워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6. 루터 정치사상의 현대적 의의
루터의 정치사상을 현대에서 평가하고자 할 때, 학문과 이론이 발전한 현대에도 4백 년 내지 5백 년 후의 변화된 세계에까지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치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우선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 루터가 살던 중세는 아주 다르며, 루터의 정치사상은 현대의 “새로운 상황”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루터의 두왕국론으로 대표되는 정치사상을 현대의 변화된 세계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고 공과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나아가, 루터의 정치사상에는 항상 하나님과 성서, 그리고 “임박한 종말”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들을 무시할 경우, 두왕국론은 “대단히 위험한” 정치사상이 되기 쉽다.
또한 루터의 “두 왕국과 두 통치”를 현대의 “국가와 교회”에 무조건적으로 치환하여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루터는 중세 말의 제후 중심의 봉건 정치체제를 전제하고 성서에 근거하여 “통치자” 또는 “통치(Oberkeit·Obrigkeit)”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두 왕국과 두 통치를 구분한 것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나 현대의 국가는 대부분 봉건 정치체제가 아니며, 국민의 정치적 권리는 중세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세상의 통치”를 “국가”로 무조건적으로 치환할 수 없다.
또한 루터가 비판한 로마 카톨릭의 “교회(Kirche·church)”와 루터가 성서에 근거해 이해한 “참된 교회” 즉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Gemeinde· congregation·assembly)”는 전혀 다르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다양한 프로테스탄트들이 현실적으로 구현한 “교회”도 루터가 이해한 “참된 교회”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루터의 “영의 통치”를 무조건적으로 현대의 다양한 “교회”로 치환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유의하면서 루터의 정치사상이 현대에 시사하는 점을 제시해본다.
첫째, 루터는 자신이나 어떤 개인, 집단, 계급, 지역, 민족, 국가 등의 배타적 이익을 위해 사상이나 이론을 개발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루터는 정치와 종교라는 대단히 중요한 공공의 문제에 관련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기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성서에 비추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이것은 현대의 적지 않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사적·정치적 이익을 위해 대중들의 인기에 연연하거나 대중들을 기만하여 대중들 자신들에게도 해가 되는 방향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또한, 종교가 하나의 직업이 되고 수단이 되어서, 정의와 진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대중의 인기를 얻어 교세를 확장하고 경제적 수입을 늘리는 가운데 대중들을 오히려 종교적·현실적 타락과 멸망으로 이끌어가면서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정치적 압력까지 행사하는 타락한 종교가들에 대한 경고이다.
둘째, 루터는 정치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립하고, 정치에 명확한 목표와 한계를 설정하였으며, 정치가 그리스도교의 정의와 사랑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교회의 권력에서 독립한 세상 통치의 영역도 성서에 근거한 것임을 밝혔으며, 세상 통치의 권력 행사는 세상 통치에 권위를 부여한 성서의 정신에 따라 행해져야 할 것임을 명시하였다.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정치권력에 부여하고 권력의 실체와 합법성을 이해한 점에서 루터는 “현대 정치사상의 선구”라 할 것이다. 동시에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수도사들이나 지켜야 한다고 하던, 또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던 예수의 산상수훈을 모든 인간이 모든 영역에서 살아야 할 핵심적 원리로 복원시킴으로써, 예수의 산상수훈을 교회에서 해방시키고, 정치에 실제적으로 복음주의적인 인도주의를 제시한 것이다.
셋째, 루터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수도원, 교회, 대학 등과 같은 좁은 집단 내에 유폐되지 않고, 정치를 포함한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기능하고 실천되도록 확장시켰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정의와 사랑과 희생의 정신은 정치에도 기능하고 실천되어야 한다. 루터의 그리스도교는 현실의 세계와 담을 쌓은 개인과 소수의 무리 가운데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정치를 비롯한 인간의 현실 속에 뛰어 들어가 하나님의 뜻과 성서의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인 각자의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루터 종교개혁의 명제들은 일반적으로 종교의 영역이라고 알려진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의 영역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영역에 유효하게 적용되었다.
넷째, 루터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과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고, 이 구분을 넘어선 정치와 종교의 혼용이나 부당한 간섭, 정치와 종교의 야합, 정치의 종교 이용, 종교의 정치 이용 등을 철저히 반대하였다. 루터는, 로마 교황과 카톨릭 교회가 세상 통치에 부당하게 간섭할 뿐만 아니라, 법, 재판, 강제력 같은 세상 통치의 영역을 하나님의 교회에 도입하는 “목자인 체하지만 늑대들”이며, “그리스도로 존경받고자 하지만 적그리스도들”이라고 비판하였다. 동시에 루터는, 세상 통치자들이 외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정당한 의무를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문제를 법제화하는 것, 신민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것, 영적인 문제에 법의 강제력을 도입하는 것 등을, 아무리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성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반대하였다.
다섯째, 루터는 어떤 종교적 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용되는 “폭력”에 대해서 철저히 반대하였고, 종교나 정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종교개혁이라는 목표를 폭력적 수단으로 조속히 달성하려는 비텐베르크의 소요에 반대하였다. 또한 루터는 농민들의 봉기를, 자신들의 정치적 “이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반대하였다.
한편 루터는 뮌쩌가 농민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거짓 예언자”로서 악마의 일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뮌쩌도 자유롭게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확실한 자유주의”와 “관용의 시대”를 주장한 것이다. 루터는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찬성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 주장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체제까지 근본부터 개혁시켰다.
두 왕국과 두 통치를 중심한 루터의 정치사상은 칼뱅이나 위그노 같은 종교개혁의 다음 세대들에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루터의 정치사상을 무시하고 정치와 종교가 야합하거나 서로 이용한 사건들, 그리고 루터가 정치에 한정된 범위에서만 인정한 세상의 칼을 종교가 가지고 휘두르거나 이용한 사건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사를 피와 희생으로 얼룩지게 해왔다.
루터 자신이 교황의 파문과 황제의 법의 보호 박탈로 상징되는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루터의 종교개혁과 복음을 따른 프로테스탄트들(개신교도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제후들로부터 죽음, 투옥, 추방 등 핍박을 받았고, 결국은 신교와 구교 진영 사이의 전쟁으로 번졌으며, 30년 전쟁으로 독일은 황폐하게 되고 무고한 피가 흐르게 되었다. 이렇게 종교가 칼을 휘두르는 죄악은 프랑스에서도 대학살을 일으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1572년 8월 23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 카톨릭교도들은 대다수 위그노(프랑스 신교도) 지도자들을 “잠자리에서 그대로” 살해했고, 루브르에서도 궁정에서 잠자던 신교도들을 살해하였다. 다음날 아침 파리의 카톨릭교도들은 “마치 릴레이 경주라도 벌이듯” 또다시 잔인한 살인을 시작해서 며칠 동안 수천 명의 신교도들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참혹하게 살해”하여 파리의 거리를 피로 물들이고 세느 강을 시체로 쌓이게 하였다. 파리의 신교도 학살은 지방에도 전파되어 수만 명의 신교도들이 프랑스 전체를 휩쓴 “피에 굶주린 광란” 속에서 죽어갔다.
이러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소식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감사의 찬미를 드리며 환호”하고, 특별 감사 미사를 명령하고, 학살 장면을 그린 특별 기념 메달과 벽화를 만들게 하였다.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라며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웃으며” 자신의 주교에게 이 사건을 기념하도록 명령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현대의 위기를 돌파하고 21세기를 평화와 희망의 시대로 꽃피울 세계관과 정치사상을 결단해야 할 시기에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유럽의 정신적·종교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고, 루터의 정치사상은 중세 유럽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종교와 정치가 중세에서와 같이 현대에도 인간 실존의 양면으로서 변함없는 중대성을 갖고 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과 정치사상은 21세기에도 인류를 위한 평화와 희망의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