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학생도 변했다
앞서 시대가 변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변한 그 시대에 따라서 학생들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 변화의 조짐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문예반 학생을 지도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립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학생들을 참가시켜달라는 주문입니다. 문예반 학생들을 지도하면 그런 공문이 전부 넘어와서 학생들을 대회에 내보내라는 은근한 압력이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대상이나 금상이라도 타면 학교에서 전교생이 보는 가운데 시상을 하지요.
그러다 보니 그런 대회에는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예컨대 민족의 비극인 6.25을 소재로 한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할아버지의 얘기를 꺼내서 당시의 아픔을 회상한 다음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힘써야겠다는 식의 수필을 쓰고 시를 짓지요. 그러면 이따금 운이 좋아서 상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행사가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주최 측에서도 내보내는 학교 측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학생들의 문예의식을 망가뜨리는 일이냐 하면, 그런 대회에 참가하면서 상 타기 위한 거짓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거짓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또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차례 상을 타면 그 학생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통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부리와 같은 것이어서 나중에는 문학이 일종의 거짓을 통해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점차 문학을 잊고 맙니다. 진실하지 않은 것에 평생을 매달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금방 지루해지고 또 남들이 봐주는 재미도 없으면 스스로 그 판을 떠납니다.
바로 이런 점을 중고등학교의 문예반에서 차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글로 적은 것이 문학임을 깨닫는 것이 청소년 때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를 보는 시각과 시를 평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은 대개 시를 감상하는 법입니다.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제천상고라는 학교에서 문예반을 지도할 적에,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먼저 본받을 만한 좋은 시집 목록을 30여권 골라주면서 구해 읽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학생들 개개인이 이 많은 시집을 사려면 용돈이 바닥날 것이니, 한 학생 당 한두 권씩 사서 동아리에 기증하고, 그렇게 해서 모은 시집을 서로 돌려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시를 가져와서 친구들과 돌려 읽으며 잘못 된 곳과 잘된 곳을 검토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시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이론서를 쉬운 것으로 골라서 소개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학생들은 잘 따라 주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날 학교에 남아서 학생들 스스로 창작한 시를 돌려 읽으며 잘못된 부분과 잘 된 부분을 지적하며 몇 달을 지내니, 학생들이 시를 보는 안목과 시 쓰는 능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마다 한 번씩 시민회관을 빌려서 시화전을 했습니다.
그때 학생들의 관심은 자신의 고민과 생활의 느낌을 시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타겠다던가 하는 다른 욕심은 있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대도시의 한 인문계고등학교로 전근을 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부탁으로 이미 있던 문예반을 기꺼이 맡았습니다. 그리고는 회장을 불러서 앞서 제천상고의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것을 그대로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달이 가고 2달이 가도록 어떻게 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장을 불러서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내가 요구한 사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학과 공부 때문에 바쁘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학생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굉장히 실망을 했지요. 과연 시대가 변했다더니 애들이 어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롭고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처한 환경이 10년 전과는 그 근본부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대학에서 내신 성적을 반영하여 수시로 신입생을 뽑는데, 그 내신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국 고교생들이 참여하는 백일장의 수상 경력이었던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대상을 타면 입학할 때 혜택을 주는 제도가 그 10년 사이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상을 한 번 타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고, 관심이 글쓰는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장에 온통 쏠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학생들에게는 원론에 가까운 나의 요구가 오히려 이상했던 것이지요. 문학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몇 달 후에 벌어질 백일장에서 상 타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하지요? 한 침대에서 잠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시 쓰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데, 학생들은 상 타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학생들의 이 같은 그릇된 열망을 채워줄 선생님조차도 일선 학교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국어선생님들도 문학을 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창작하는 법은 따로 배우지를 않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창작은 순전히 혼자서 궁리해야 할 몫이지요. 그러나 장래에 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해서 창작에 나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창작하는 분들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일선에서 애 타는 학생들을 위해서 누군가 그에 필요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몇 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재주 둔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는 나름대로 다 의도가 있습니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행사가 학생들에게 안겨주는 좌절감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대상은 한 명한테 돌아가는데 거기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1천명에 육박하거든요. 그러니 그 한 명 때문에 나머지 1천여 명이 재주 없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일장의 맹점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갖는 나쁜 점을 백일장 역시 그대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백일장은 시를 삶의 표현으로 놔두지 않고 이벤트로 만들어서 극소수에게 엄청난 영광을 돌리고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각 대학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계속 강행하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만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런 백일장에 응모하는 것을 보면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니까요.
그러나 먼 장래를 내다보고서 말하자면 그런 기획성 행사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서 시가 되어야지 어떤 행사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는 작전으로 시를 쓰는 것은, 오래 우려서 국물을 내려고 하지 않고 조미료를 부어서 맛을 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입맛을 확 당길지는 몰라도 몸에 좋을 리는 없겠지요.
새 학교에 와서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되자, 안타깝지만, 학생들이 시를 잘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해서 빨리 가려는 학생들에게 달리는 방법을 아예 안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학생들이 빨리 시 잘 쓰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둘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쁘더라도 원칙부터 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서 법칙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이라고 해서 그 원칙에서 벗어날 리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