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
나는 그저 이(蝨)를 죽였을 뿐이야.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를.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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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명으로 28세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다행히 사형 집행은 극적으로 취소되었으나, 그는 이후 4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다시 4년 동안을 시베리아에서 복무해야 했다. 감옥 생활 중에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다. 이 시절을 보낸 후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야말로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또한 초기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신과 구원의 문제가 이후 작품들에서 화두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전체 6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 이미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르고, 그 이후에는 그가 왜 그런 범죄를 감행했는지를 밝히는 과정이 이어진다. 작품에서는 특히 다른 누구보다 라스콜니코프 자신이 범죄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주로 그려진다. 그는 회피와 합리화를 거듭하며, 실제로 끝까지 자신의 범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오직 자신의 이론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 판단 착오를 했다는 것, 그것이다. 이 “고매한 살인자” 라스콜니코프는 그러나 “성스러운 매춘부” 소냐를 만나면서 고해성사에 가까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에게 없던 ‘삶’을, ‘이론’이 아닌 삶을 가져다준다.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그는 성경을 펼치지 못했고(않았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 혹은 구원을 얻었는지는 모호하다. 그러나 『죄와 벌』이 “한 청춘이 겪는 ‘환멸과 좌절’의 기록”이라면, 소설이 끝난 후 두 청춘, 라스콜니코프와 소냐에게는 환멸과 좌절을 넘어선 ‘삶’이 남아 있을 것이다.
상술하였듯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선고에 이은 8년간의 유형 생활 후 두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전작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싹튼 새로운 '인물 유형'과 소설 기법은 이 소설에서 만개하여,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심리를 낱낱이 파헤친다. 작가 스스로 『죄와 벌』은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밝혔듯, 죄와 속죄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이 팽팽하게 갈등하고 교차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 본인이 작가로서의 성숙기에 정점을 찍을 수 있게 했고, 그 후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고리키,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헨리 밀러, D. H. 로렌스와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줄거리
1860년대 후반 페테르부르크. 23세의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몇 달째 마치 '관'같이 비좁은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사이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구상한 계획에 따라, 그는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이복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내리쳐 살해한다. 그는 “그저 이[蝨]를 죽였을 뿐이야,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를.” 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성과 관념만이 가득했던 그의 마음속에는 예상하지 못한 불안감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다. 구체적 증거가 없음에도, 예심판사는 그의 심리를 꿰뚫으며 그를 압박해 온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그러나 그 누구보다 '순결한' 소냐를 만나면서 그는 점점 더 혼란을 느낀다.
작가 소개-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1821년 10월 30일 모스크바 마린스키 빈민 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의 길을 택한 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로 당시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1849년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을 띤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지만 극적인 순간에 사형 집행이 취소되어 유형을 떠나게 된다. 4년간의 감옥 생활과 4년간의 복무 이후, 잡지 《시대》를 창간함과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이정표가 된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를 발표했다. 이어, 지병인 간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187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 등 심리적, 철학적, 윤리적, 종교적 문제의식으로 점철된 걸작들을 남겼다. 1881년 1월 28일, 폐동맥 파열로 사망했으며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카야 대수도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작가 연보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 11월 11일) 모스크바 마린스키 빈민 병원의 군의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833~1837년 모스크바 기숙학교 수학.
1837년 1월 29일, 푸쉬킨이 당테스와의 결투에서 사망하자 몹시 흥분함. 2월 27일,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네차예바) 사망.
1838년 1월 16일,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 입학.
1839년 6월 8일, 아버지가 다로보예 영지의 농노들에 의해 피살.
1843년 8월 12일, 장교 수업 과정을 끝내고 공병국 제도실에서 근무하기 시작.
1844년 6~7월, 발자크의 『으제니 그랑데』 번역, 발표. 10월 19일 소위로 제대.
1845년 5월, 『가난한 사람들』 완성. 비평가 벨린스키, 시인 네크라소프를 비롯한 문학인들과 친교. 가을, 벨린스키 클럽에 출입하기 시작.
1846년 1월 15일, 《페테르부르크 모음집》에 『가난한 사람들』발표. 「분신」(2월), 「프로하르친 씨」(10월)를 《조국 수기》에 발표.
1847년 연초에 벨린스키와 사상적, 감정적 이유로 절연. 봄부터 페트라셰프스키의 ‘금요일’ 모임에 출입. 4~6월, 에세이 「페테르부르크 연대기」(총 4편)를 신문 《상트-페테르부르크 통보》에, 10~12월, 소설 「여주인」을 《조국 수기》에 발표.
1848년 5월, 벨린스키 사망. 「약한 마음」, 「폴준코프」, 「정직한 도둑」, 「크리스마스트리와 결혼식」, 「백야」, 「남의 아내와 침대 밑의 남편」 등의 단편을 《조국 수기》에 발표.
1849년 1~2월, 미완의 장편 『네토치카 네즈바노바』의 일부를 《조국 수기》에 발표. 4월 15일,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 낭독. 4월 23일,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감금됨. 9월 30일, 재판 시작, 11월 13일, 상기 편지 낭독 죄로 사형을 언도받음. 12월 22일,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칙령에 의해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강제 노동형으로 감형됨.
1850년 1월, 토볼스크 체류 중 12월 당원(제카브리스트)의 부인들의 방문을 받고, 이 중 폰비지나 부인에게서 성경을 건네받음. 1월 23일, 옴스크의 요새의 형장에 도착. 이후 1854년 2월까지 복역.
1854년 3월, 사병으로 강등되어 세미팔라친스크에 배치됨. 이곳의 세무관 이사예프와 안면을 트고 그의 아내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를 사랑하게 됨.
1855년 2월 18일, 니콜라이 1세 사망. 8월 4일, 이사예프 사망.
1857년 2월 6일, 미망인이 된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와 결혼. 8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구상, 일부 집필했던 「꼬마 영웅」을 《조국 수기》에 발표.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을 기록하기 시작.
1859년 3월 18일, 퇴역. 7월 2일 세미팔라친스크를 떠나 8월 19일 트베리 도착, 가을을 보냄. 11월, 페테르부르크 거주 허가를 얻고 12월, 10년만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옴. 『아저씨의 꿈』(3월), 『스체판치코보 마을 사람들』(11~12월)을 각각 《러시아의 말》과 《조국 수기》에 발표.
1860년 9월, 신문 《러시아 세계》에 『죽음의 집의 기록』 초반부 발표. 모스크바에서 첫 작품집(총 2권)이 출간됨.
1861년 1월,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 창간, 첫 호에 『상처 받은 사람들』 발표. 이때부터 1865년까지 아폴리나리야 수슬로바와 친교, 서신 교환 및 여행.
1862년 1월, 《시대》에 『죽음의 집의 기록』 후반부 발표. 6월, 첫 유럽 여행. 베를린,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쾰른, 파리 등을 돌고, 1846년부터 알고 지내던 사상가 겸 작가 게르첸,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등을런던에서 만남. 12월, 《시대》에 「악몽 같은 이야기」 발표.
1863년 2~3월, 《시대》에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연재. 5월, 《시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 정지 조치를 받음. 8월부터 10월까지 유럽 여행. 바덴바덴, 함부르크 등에서 도박으로 많은 돈을 잃음.
1864년 1월,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세기》 창간허가를 받음. 3월 21일, 《세기》 첫 호에 『지하로부터의 수기』 발표. 4월 15일, 아내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사망. 7월 10일, 형 미하일 사망. 9월 25일, 문우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사망. 잇따른 불행으로 인해 심리적,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림.
1865년 6월, 《세기》 2호에 고골의 「코」를 모델로 한 단편 「악어」 발표. 거의 직후, 《세기》지가 재정난으로 발행 중단됨.(통권 13호.) 여름, 출판업자 스첼로프스키와 1866년 11월 1일까지 특정 분량의 새 소설을 탈고하고 모든 작품을 양도하며 이를 어길 시 이후 모든 작품의 저작권을 넘긴다는 굴욕적인 계약을 체결. 그의 출판사에서 그동안의 작품을 모은 작품집이 나옴. 7월부터 10월까지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세 번째 유럽 여행을 떠남. 11월, 수슬로바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함.
1866년 1월, 《러시아 통보》에 『죄와 벌』 연재 시작, 12월에 완결. 모스크바와 그 근교 류블리노에 체류. 10월 4일부터 29일까지, 원고 마감일에 맞추기 위해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를 고용하여 『노름꾼』 전부와 『죄와 벌』 마지막 부분을 속기하게 함.
1867년 2월 15일,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 4월 14일, 유럽으로 떠나 각국을 돌며 이후 4년간 머무름. 그동안 드레스덴 미술관에서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바젤 미술관에서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음. 끊임없이 도박에 손을 대서 경제 사정이 매우 악화됨. 『백치』 집필 시작. 리가 방문, 바쿠닌의 강연을 들음.
1868년 2월 22일, 딸 소피야 출생, 석 달 후 사망. 가을, 밀라노를 거쳐 피렌체로 감. 《러시아 통보》에 『백치』 발표.
1869년 7월, 드레스덴으로 돌아옴. 9월 14일, 딸 류보비 출생. 11월, 모스크바에서 ‘네차예프 사건’ 발생, 『악령』의 소재가 됨.
1870년 《서광》에 초기작 「남의 아내와 침대 밑의 남편」을 토대로 한 『영원한 남편』 발표.
1871년 1월, 《러시아 통보》에 『악령』 연재 시작, 1872년 완결. 7월, 가족과 함께 드레스덴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옴. 7월 16일, 아들 표도르 출생.
1872년 5월, 가족과 함께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스타라야루사로 떠나 이곳에서 여름을 보냄.
1873년 메셰르스키 공작의 잡지 《시민》의 편집장이 됨과 동시에 「작가 일기」라는 지면을 마련하여 각종 시사 칼럼, 에세이, 단편소설 등을 싣기 시작.
1874년 봄, 메셰르스키 공작과의 마찰 및 건강상의 이유로 《시민》 편집 일을 그만둠. 4월, 《조국 수기》에 실을 장편소설을 부탁하기 위해 네크라소프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방문. 6월, 건강 악화로 요양차 독일의 엠스로 떠남.(1875년, 1876년, 1879년에도 한 차례씩 방문.) 8월, 스타라야 루사로 돌아와서 겨울 동안 『미성년』 집필.
1875년 1월, 『미성년』을 《조국 수기》에 발표하기 시작. 8월, 아들 알렉세이 출생.
1876년 1월, 《작가 일기》를 단행본 형태의 월간 잡지로 출간, 대성공을 거둠. 《작가 일기》 11월 호에 단편 「온순한 여자」 발표.
1877년 《작가 일기》 4월 호에 단편 「우스운 인간의 꿈」 발표. 12월 2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어문학 분과 위원으로 선출됨. 12월 27일, 네크라소프 사망, 30일,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문 낭독.
1878년 5월, 아들 알렉세이, 갑작스러운 간질 발작으로 사망. 철학자 블라지미르 솔로비요프와 함께 옵치나 푸스트인 수도원 방문.
1879년 《러시아 통보》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발표하기 시작.
1880년 5월 23일, 푸쉬킨 동상 제막식 행사 참석차 모스크바 도착. 6월 8일, 상기 행사 관련 모임에서 이른바 「푸쉬킨론」 낭독, 열광적인 반응을 얻음. 11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완결.
1881년 1월, 《작가 일기》 1881년 첫 호를 집필하기 시작. 1월 26일, 여동생이 찾아와 상속 문제로 다투고 간 뒤 각혈. 1월 28일 저녁 8시 38분, 폐동맥 파열로 사망. 2월 1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카야 대수도원 묘지에 묻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