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친절하다
“사랑은 친절합니다.”(1코린 13,4)
사랑은 남을 친절하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친절한 배려는 아주 소박하고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대개 일 중심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잘 못합니다.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다 힘들고 쓸쓸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말 한 마디, 말 없는 친절, 포근한 미소를 못내 그리워합니다. 예수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항상 친절하셨고 따뜻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친절함과 배려를 흘려보냅시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1코린 13,5)
당시 코린토 교회 내에서는 은총과 사랑으로 구원받았다고 하여, 신자들끼리 서로에게 너무 무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코린토의 여성 신자들은 당시 남성들의 권위주의 문화에 눌려 있다가, 갑자기 교회에서 자유의 복음을 가르치니까 그것을 남용해서 가정에서 남편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강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데 혼자 일어서서 큰소리로 떠드는 경우도 있었고, 항상 남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종종 신앙을 빙자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친교 속에 무례함을 나타내는 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품어줍니다.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려 하지 말고, 남을 자꾸 가르치려 하지 말고 일단은 그냥 품으십시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천지창조 전에,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감돌고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암탉이 달걀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달걀은 딱딱한 것입니다.
딱딱한 사람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부터 품으십시오. 가장 힘든 것을 하면 그 다음은 쉬워집니다. 혼란과 공허와 어둠이 가득 찬 천지를 하느님의 영이 품으시니까 빛, 질서, 창조가 생겼습니다. 지치고 상한 영혼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따지지 않고 품어주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을까요? 흙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씨앗을 품어서 꽃이 피게 하고, 나무가 자라게 하며,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
인간을 평가하거나 단죄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되지도 않고 속만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있는 그대로 품으려고 해보십시오. 힘들어도 하느님의 힘을 청하면서 해보십시오. 교회는 하느님 사랑을 가슴 깊이 빨아들여서 이 미움으로 혼탁한 세상에 내보내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사랑만이 이 비뚤어진 세상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사랑은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을 버린 인간의 본능은 자기중심주의입니다. 어떤 위대한 이상을 위해, 남을 위해 사는 척하지만 실은 다 자기 이익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주의를 포기합니다. 그렇게 될 때,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나옵니다.
첫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는 특히 내가 받은 축복,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는 의미가 강합니다. 소위 ‘능력이 있다, 뭔가 이루었다’ 하는 사람들의 경우, 성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집중적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평생 체질로 굳어져버리면 많이 가지고도 나누지 못하는 이기주의자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참된 사랑은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사랑하고자 하면 줄 게 항상 있습니다. 없어서 못 주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못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주셨습니다. 사랑히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내다’는 원어의 뜻은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를 향해 갑작스럽게 자기의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상황이 자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은 내 속에 이미 쌓여 있는 증오와 열등감과 상처들이 어떤 상황에 의해서 불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이미 화낼 준비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되면 폭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잘 내는 근본적 이유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기 권리포기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 시간, 내 재산, 내 자존심에 대한 권리 등에 엄청 예민합니다. 요즘 경적을 막 울리거나 끼어드는 차들에 대한 보복운전이 만연한 까닭은 자기 권리가 침해당해서 화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당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남김없이 포기하셨습니다. 사랑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게 합니다. 권리를 포기하고 나면 화낼 일이 없어집니다.
첫댓글 아멘~
인간을 평가하거나 단죄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되지도 않고 속만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있는 그대로 품으려고 해보십시오. 힘들어도 하느님의 힘을 청하면서 해보십시오.
교회는 하느님 사랑을 가슴 깊이 빨아들여서 이 미움으로 혼탁한 세상에 내보내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사랑만이 이 비뚤어진 세상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우리는 보통 상황이 자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은 내 속에 이미 쌓여 있는 증오와 열등감과 상처들이 어떤 상황에 의해서 불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이미 화낼 준비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되면 폭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당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남김없이 포기하셨습니다. 사랑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게 합니다. 권리를 포기하고 나면 화낼 일이 없어집니다.
갈길이 너무나 멀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계속 훈련하며 예수님 손잡고 기쁘게 걸어나가겠습니다.
모든 말씀에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