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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주간 행동 신앙 이야기 지상(紙上) 소개- 가상칠언을 중심으로! ◈
1언(월요일, 7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1언 찬송- ‘그때 그 무리들이’(호흡 12장)
1언 읽기- 백혜영님
1언 묵상- 다같이(반드시 용서받고 싶은 것을 떠올려 묵상하고 공유한다)
1언 나눔- 다같이&이기봉님
*복음이란 행복한 소식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문턱이나 구별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를 증거하는 말씀이 누가복음 2장 10절(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선 죄인입니다.(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 2:17)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그들(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복음)인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꼭 같이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믿음의 쌍둥이)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은 용서의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이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용서를 구하신 분입니다. 이는 용서에 단서가 붙으면 안 된다는 걸 뜻합니다. 뭘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조차 용서하시는 주님에게서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은, 1. 나의 무지를 깨닫는 것 2. 무지로부터 해방되는 것 3. 무지함을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해서 나온 행동은 무엇인가요?
*말씀 다지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벧전 4:8) 그러니 용서는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 커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확증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는다(강권한다)”(고후 5:14)고 했습니다. 강제가 아니라 강권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마주한 이들이 이제 그 사랑에 휘어 잡혀, 그 사랑으로 인해 살고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사랑해야 할 이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와 사랑의 수혜자여서, 사랑에 빚진 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1언 기도- 최경수님
2언(화요일, 7시):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 이다.”(누가복음 23:43)
*2언 찬송- ‘그의 나라 온 땅에’(호흡 22장)
2언 읽기- 한영순님
2언 묵상- 다같이(나에게 낙원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려 묵상하고 공유한다)
2언 나눔- 다같이&이기봉님
*주님도 진정(진실)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진정(진실)이란 말은, 내 말에는 거짓인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절대 참, 절대 의로움, 반드시 지켜질 약속이라는 뜻이죠.
2언의 배경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강도)와의 십자가상 대화입니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왜 주님의 십자가를 두 죄수 사이에 세웠느냐 하는 겁니다. 이는 당국자들의 고의적인 처사였습니다.
일반 죄수(강도)들과 예수의 십자가를 동일시하려는 의도적 행위를 통해 예수 십자가의 의미를 파괴하고, 수치심을 유도하려는 졸렬한 행동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주님은 이들의 졸렬함을 한 죄수와의 낙원 동행 약속으로 말소해 버립니다.
낙원이란 말은 ‘벽을 두른 정원’이란 뜻의 페르시아 말입니다. 왕은 자기 백성 중의 한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영광을 베풀고자 할 때, 그를 자기 정원의 길동무로 삼아서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하신 낙원 약속은 단지 천국에 가도록 해주겠다거나, 천국 문 입구까지 안내하겠다는 단순 의미가 아니라 그곳에서 같이 살겠다는 동행/동반/동거의 약속이었던 겁니다.
또 하나 이 약속이 주는 위대함은 ‘너무 때가 늦었기 때문에 주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보이신 겁니다. 세상의 다른 일에 관해선 늦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로 돌아가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는 걸 “내가 진정(진실)으로 네게 말한다.”는 말로 표현하신 겁니다. 생명의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걸 전해드립니다.
*말씀 다지기
주님은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요한복음 14:2) 하십니다. 그러니 낙원은 정해진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주님과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강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나는 둘 중의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강도가 아니니까 낙원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교만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2언 기도- 조정원님
3언(수요일, 7시):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3언 찬송-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호흡 70장)
3언 읽기- 조정원님
3언 묵상- 다같이(나였으면 어머니를 부탁하셨을까?에 대해 묵상하고 공유한다)
3언 나눔- 다같이&이기봉님
*이 말씀은 죽어가는 자식을 보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우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땅에서의 비슷한 이별의 슬픔과 아픔 가운데 처한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어머니가 아닌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여자여(woman)’란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마리아를 향해 이 표현을 쓰심으로, 아들 개인에게 부탁하여 생긴 첫 기적이 아니라 공생애를 통해 벌어지는 과정으로 전개하신 겁니다.
이처럼 기적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합작품(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기적- 물과 포도주, 명령과 순종, 질문(가진 것이 무엇이냐?)과 대답(오병이어입니다), 축사하는 분과 나눠주는 자)의 결과입니다.
고독한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작은 무리들(가족과 가족 이상의 관계/은혜)은 주님 곁을 끝까지 지켜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자리는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자리’이면서 ‘가장 깊고 진한 사랑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챙기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가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합니다. 요한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지만, 부담보다 큰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 만들어진 것이죠.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아무에게나 맡기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반응은 순종과 감사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의 주인공은 반드시 나여야 합니다.
(*묵상: 주님과 협연하는 사람인지, 나는 작은 무리 중 한 사람인지, 주님께서 일을 믿고 맡기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서로 생각합시다.)
*말씀 다지기
사람처럼 바뀌기 어려운 존재는 없다고 하지만, 주님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당신의 성품을 주신 것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바뀌기 어렵다는 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쉬운 걸 하고 만족해하지 않듯, 주님처럼 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감동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주님은 어려운 부탁을 제자에게 했고, 제자는 순종했습니다. 이런 관계에 필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3언 기도- 류규현님
4언(목요일, 7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시 21:1)
*4언 찬송- ‘약한 나로 강하게’(호흡 149장)
4언 읽기- 김경미님
4언 묵상- 다같이(나를 배반한 사람에게 나는 어찌 반응할까?)
4언 나눔- 다같이&이기봉님
*억울함은 우리 인생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죄 없는 사람이 아픔을 정죄를 당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이고, 힘의 논리입니다. 이 순간부터 세 시간 동안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절규를 통해 당신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계셨음을 증거합니다.이 순간의 핵심 언어는, 잠깐입니다. 세상은 잠깐만 승리하는 세력입니다.(시 21:1) 그리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 2:16)
나 대신 겪으신 모욕, 우리의 병(스스로 존재)을 낫게 하심입니다.(이사야 53:4-7)
(*묵상: 나와 같은 몸을 입으심, 잠깐 행복한 인생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하나로 화 해 시켜 주심의 의미를
생각합시다.)
*말씀 다지기
침묵으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신 주님의 마음을 함께 느껴보기.
4언 기도- 이영현님
5언(목요일, 7시):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
*5언 찬송- ‘목마른 사슴’(호흡 149장)
5언 읽기- 신양균님
5언 묵상- 다같이(나는 어떤 일과 사람 앞에서 목마르나요?)
5언 나눔- 다같이&이기봉님
*시 22:14-15절을 읽읍시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목이 마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누가 22:44)고 기록합니다. 또한 6차례의 심문을 받으시면서 받으신 정신적인 고통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시면서 흘리신 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까지도 목마르게 합니다. 우리의 목마름이 주님의 목마름이었습니다.
(*묵상: 나도 주님 때문에 목마른 적, 다른 사람의 목마름을 해결해 준 적이 있었나요?)
*말씀 다지기
목마름은 내가 다시 태어나려는 신호임을 깨닫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5언 기도- 한영순님
(*발 씻김 예전을 기도 후 갖습니다)
6언(금요일, 7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마태 27:50-큰소리로 외치시고)
*6언 찬송- ‘길’(호흡 32장)
6언 읽기- 류규현님
6언 묵상- 다같이(내가 들꽃공동체를 통해 이뤄내야 하는 걸 뭘까?)
6언 나눔- 다같이&이기봉님
*가장 참기 힘든 건 수치(羞恥)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겉옷을 넷으로 나눠 찢어 가지며 낄낄거리고, 속옷은 제비뽑아 이기는 사람이 갖자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는 심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장면을 보시는 어머니를 봐야 하는 주님의 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말씀, 즉 성경을 완성하시기 위한 주님의 순종(효도)은 이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시 69:19-21)
주님은 도대체 무얼 다 이루셨다고 하신 걸까요? 요한복음 6장 38-40절이 증거합니다.(나를 보내신 분의 뜻의 완성- 내게 주신 사람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과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것)
(*묵상: 나는 주님을 위해 수치를 견딜 수 있을까요?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릴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6언 기도- 백혜영님
7언(금요일, 7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누가복음 23:46)
*7언 찬송-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호흡 54장)
7언 읽기- 류규현님
7언 묵상- 다같이(나는 내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을까요?)
7언 나눔- 다같이&이기봉님
*정오(6시)에 빛이 사라지고 9시까지 어둠이 지배했습니다. 태양마저도 사람의 행위를 드러내지 않고, 어둠의 무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때 성전의 휘장이 정확히 두 조각으로 찢어집니다. 성전의 휘장은 지성소에 있는 것, 즉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에게만 허용되던 장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는 건, 주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임재의 길이 모두에게 활짝 열렸음을 뜻합니다. 지성소의 만인 개방으로 요한복음 14장 9절,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이 증명된 겁니다.
또 시편 31편 5절 말씀에 ‘아버지’가 더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종을 드러냄과 함께, 유대인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한 매일 매 순간의 기도를 재현하시면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의 품에서 잠든 아이였다는 걸 보여주신 것이죠.
(*묵상: 나에게 다 이룬 것이란 무엇일까? 나는 하나님의 아이로 살고 있는가?)
7언 기도- 이기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