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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보충자료 IX
민속 이슬람의 현상학과 선교적 제언
(2008, 미션저널 (GMS)에 기고)*
무슬림들의 영적 세계
많은 인류학자들이 종교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해 왔지만 아직까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종교”라는 용어 자체가 “타 문화의 어느 한가지 양상을 설명하기 위한 외부인의 개념”으로서 이 개념 자체가 내부자(emic)의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1] 대부분의 비서구 사람들은 소위 “자연”과 “초자연”의 세계를 서구인들처럼 확실히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는다.[2] 특별히 무슬림 사회에서 이러한 구분은 더더욱 어색하다. 무슬림 사회를 들여다 보면 이슬람의 우주관이나 종교적 가르침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타 다른 모든 문화가 형성되기 때문에 무슬림 사회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 우주는 꾸란의 “알-알라민”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인간세계와 초인간의 세계(혹은 미지의 세계, 아랍어로는 “ghaib”)라는 두 가지 신의 창조세계로 이해된다.[3] 하지만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꾸란 55:31에 나오는 ath-thaqalān이라고 하는 “두 세계”의 개념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 용어는 이슬람의 전통에서 말하는 세상, 즉, 인간과 진이라는 두 피조물로 구성된 이중적 세계에 대한 무슬림들의 이해를 잘 보여준다.[4] 그러므로 이슬람에서는 자연 세계와 초자연적 세계, 혹은 초인간적인 세계가 실제로는 맞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인간 세상을 영적 세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무슬림들이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현실은 인간의 행복을 시기하는 수많은 영적 존재들이나 악한 힘들이 존재하는 그러한 세계인 것이다. 이제 무슬림들이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 이러한 영적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5] 그런 후에 필자는 선교사들이 무슬림들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몇가지 중요한 기본적 이슈들을 논의하고자 한다.
공식 이슬람과 민속 이슬람
이슬람 공동체(움마)의 종교 현상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는 두 개의 종교문화적 양상으로 기술할 수 있다. 하나는 “공식 이슬람”이라는 것인데 이슬람의 이념적 측면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것은 종교의 “고급” 이슈들, 즉 존재론적 질문들이나 궁극적 실재들, 혹은 종교적 의무 등과 같은 내용들을 다룬다. 따라서 이슬람의 여섯 가지 믿음과 다섯 가지 기둥, 그리고 이슬람 신앙을 변호하는 무슬림들의 분투 (지하드), 또 그들의 선지자의 생애를 본받고자 하는 종교적 노력들과 같은 것들이 공식 이슬람의 특징이 된다. 이슬람의 이러한 고급 양상은 외부인들이 볼 때에 이슬람의 진면목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민 무슬림들은 실제로 이러한 이슬람의 정통적인 이념에 상응하지 않는 또다른 이슬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본다.
공식 이슬람과는 대조적으로 이슬람의 또 다른 얼굴이 있는데, 그것은 “대중 이슬람” 혹은 “민속 이슬람”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민속 이슬람이란 공식 이슬람에 의해서 인정된 그 어떤 이슬람의 형태가 아니라 보통 무슬림들 사이에서 대중적으로 공공연히 유행하게 된 믿음들이나 의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중에 많은 것들은 정통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본다. 그 가운데는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그 지역의 토속적인 전통에 기인한 것들도 많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비정통적인 관습들이나 이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슬람 지도자들도 암암리에 그것들을 묵과해주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민속 이슬람의 관습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진정 “이슬람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신조들이나 관습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이슬람의 전통인 하디쓰(또는 순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이 전적으로 비정통이며 심지어 미신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특별히 서구인들의 눈에), 사실 그것들은 이슬람의 전승들에 기인하며 따라서 무슬림들의 영성을 이루고 있는 무슬림 문화의 주요한 부분이 된다. 그러므로 민속 이슬람이란 무슬림 사회에 나타나는 저급 종교적 현상들을 가리키는데, 하디쓰 전통에 의해서 묵과되어 온 무슬림 전통들과 무슬림 문화 안으로 흡수되고 통합된 이슬람 이전의 토속적 관습들을 다 내포한다. 따라서, 어느 무슬림 문화권이든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종교문화적 요소들을 그 안에 지니게 되는데, 즉, 정통 이슬람적 요소와 하디쓰에 기초한 무슬림 전승들과 이슬람 이전의 토속 현지 전통들이 그것이다.
민속 이슬람은 공식 이슬람이 거의 다루어주지 않거나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일상의 문제들을 주로 다룬다. 이러한 민속 이슬람 현상은 무슬림들이 진정 그들의 종교에 의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 주변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영적 세계에 대해서 늘 두려움을 갖고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민속 이슬람은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의 “저급”적 양상과 관계가 있다. 민속 이슬람은 염려와 걱정과 의문들로 가득찬 무슬림들의 답답한 마음이 그 중심 자리이다. 반면에 공식 이슬람의 자리는 무슬림들의 지성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무슬림들의 마음을 제도화된 율법과 신학들, 그리고 공식화된 의식들로 묶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민속 이슬람 (대중 혹은 저급 이슬람)”과 “공식 이슬람 (정통 혹은 고급 이슬람)”이라고 하는 용어들은 무슬림 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이슬람의 역동적인 종교적 양상들을 기술해 주는 학문적인 표현들로서, 이 용어들을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서 혼합주의와 정통성을 구분짓는 그러한 차별과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비록 개인이나 사회의 문화적 특질들 때문에 얼마나 더 정통적이며 얼마나 더 민속적인가 하는 비율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무슬림들은 공식 이슬람과 민속 이슬람의 세계관을 다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6] 심지어 스스로 “정통”을 자처하는 무슬림들도 실상은 공식과 민속의 범주를 심각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슬람의 교의들과 민속적 전통들이 다 알라에 의해서 제정되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허락되었다고 믿든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슬람의 다양한 특질들은, 그것이 정통이건 대중적인 것이든, 서로 독립된 실체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실재, 곧 이슬람이라고 하는 실재 안에 있는 여러 다양한 양상들일 뿐이다. 문화인류학자 Peter Lienhardt가 지적했듯이 모든 무슬림 개개인의 마음 안에는 정통과 민속이 모두 다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7]
민속 이슬람의 세계관 구조
공식 이슬람과 민속 이슬람을 종교 현상의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기술한 바,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민속 이슬람의 세계관을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Paul Hiebert 교수의 종교구조 분석의 틀을 활용하고자 한다.[8] 그의 틀에 도움을 받아 민속 이슬람의 세계관을 요약하면 아래 그림 1과 같다. (주목할 것은 민속 이슬람의 우주관 역시 다른 기타 종교들의 우주관과 같이 인격적 존재들과 비인격적 영적 힘의 두 가지 존재론적 실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민속 이슬람 세계관에서 고급과 저급 양상 사이의 경계는, “비가시적 (또는 초자연적) 세계”와 “가시적 (또는 자연적) 세계”의 구분보다도 “저 세계”와 “이 세계”의 구분에 더 상응하고 있다. “이 세계”는 또 “경험 세계”와 통하는데, 즉, 민속 이슬람의 신념들과 의식들이 자리잡고 있는 세계이다. 이것은 저급 이슬람이란 민속 이슬람의 특질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뜻하며, 대부분 이 세상의 경험들과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 비가시적 세계 범주에 속한 인격적 존재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알라와 천사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 세계”의 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가시적 세계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경험하고 상관하며 조정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따라서, 민속 이슬람의 세계는 경험성이 그 특징이다. 무슬림들은 대부분 인간들을 괴롭히는 가시적 존재들과 비가시적 존재들로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으며, 셀 수 없는 영적 세력들에 의해서 늘 위협을 받고 사는 것이다.[9]
영적 존재들에 대한 민속 이슬람의 믿음
민속 이슬람에서 알라는 이 세상의 인간사를 위해 인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만큼 인격적이거나 친절한 신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무슬림 평민들의 심상에 박힌 알라의 이미지는 그가 갖고 있는 힘 그 자체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신이 하시는 일은 각 개인의 운명을 결정해주는 것인데, 그 운명의 내용을 인간들이 알 수가 없다. 신이 너무 멀리 계시기에 인간들의 일상 생활을 위협하는 이 땅의 문제들은 무슬림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죽은 성자들이나 조상들이나 이슬람의 진들, 혹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영들과 같이 그들의 우주관의 하위 부분에 나타나는 온갖 영적 존재들이 이 땅의 괴로운 문제들의 원인이라고 믿기에, 무슬림들은 삶의 안위를 위해서 이들을 직접 다루어야 하는 책임과 부담을 안고 산다. 이러한 영적 존재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들은 가시적 인간들처럼 경험될 수 있는 존재들이며 따라서 무거운 현실이다.
영적 존재들 가운데서도 진이 가장 두려운 존재로 보인다.[10] 진들은 무슬림 사회의 구성원의 하나로 여겨지며, 따라서 초자연적 내지는 비가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경험 세계의 범주로 구분된다. 그들은 지, 정, 의를 인간처럼 다 갖추고 있다.[11] 진에 대한 이러한 무슬림들의 믿음은 실제로 꾸란과 하디쓰에 근거한 이슬람의 전통적 가르침에 기인한다.[12] 이슬람의 정경적 전통에 의하면 진들은 인류에 상응하는 영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 ath-thaqalān이라고 하는 꾸란의 두 세계 개념에 잘 나타난다 (꾸란 55:31). 인간이 흙에서 창조된 반면 (꾸란 22:5) 진은 신에 의해서 불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꾸란 15:27; 55:15). 그러나 진은 인간을 향하여 악의와 적의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무슬림들에게는 악명 높은 존재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들은 또한 “샤야띤(악마들)”으로 불리우기도 한다.[13] 그들 가운데 어떤 진들은 무함마드의 꾸란 낭송에 반해서 이슬람으로 회심하기도 하였지만 (꾸란 72:1-15), 대부분은 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진들의 변덕스러움과 사악함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한다. 심지어 종교심이 있는 무슬림 진들이라 하더라도 이유 없이 질병이나 기타 온갖 문제들을 가져와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히 진은 “인간에게 공공연한 원수”이다 (꾸란 17:53). 그러므로 민속 이슬람에서 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며, 만일 사람들이 진에 집히게 되면 특정 의식을 통해서 달래주어야 한다.
* 미션저널은 그 명칭이 2008년부로 Global Mission Advance로 바뀌었음.
[1] Michael Lambek은 그가 편집한 책 A Reader in the Anthropology of Religion (Blackwell Publishers, 2002)의 서론 부분에서 Jonathan Smith의 “종교” 개념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인용하여 “종교”라는 용어 사용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2] Cf. Charles Kraft, Anthropology for Christian Witness (Maryknoll, NY: Orbis Books, 1996:197-198); Paul Hiebert, Daniel Shaw, and Tite Tiénou, Understanding Folk Relig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35).
[3] Tafsir Ibn Kathir (abridged, Vol.1, Riyadh, Saudi Arabia: Darussalam, 2000:73) 참조.
[4] Yusuf Ali는 이 단어를 “두 세계”로 번역하여, 인간 세계와 진의 세계를 의미하였다. Cyril Glassé 역시 이 단어를 형태를 가진 두 종의 피조물로 해석한다. (The concise Encyclopedia of Islam, NY: HarperCollins Publishers, 1989:211)
[5] 현상학은 주어진 사회의 문화적 특질들을 가능한 한 가장 객관적으로 내부자의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이 학문은 인류학자가 “한 문화의 사회적 구조를 형성해 주는 사고의 집합체”를 발견하도록 하는 방법론적 중립성을 추구한다. (Fiona Bowie, The Anthropology of Religion, Malden, MA: Blackwell Publishing, 2000:5). Russell Bernard’s Research Methods in Anthropology (Thousand Oaks, CA: Sage Publications, 1994:14-15) 역시 참조.
[6] 이것은 무슬림 치료자들이 치유 의식을 진행할 때에 전통적인 것과 이슬람적인을 얼마만큼의 배율도 섞거나 통합해서 시행하는가를 들여다 볼 때에 더욱 명확해진다. 예를 들면, 어떤 무슬림 치료자들은 진의 공격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할 대에 오직 이슬람의 형식만을 사용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꾸란 낭송이나 이슬람의 기도 의식들보다도 지역의 전통들을 더 사용한다. 이렇게 무슬림 치료자들 간에 민속 이슬람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이들 모두는 혼합주의에 물들지 않고 청교도적 이슬람을 지키는 다른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적법한 무슬림들로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진다.
[7] Peter Lienhardt의 The Medicine Man: Swifa ya Nguvumali.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8:38).
[8] Paul Hiebert, Anthropological Reflections on Missiological Issues (1994:194).
[9] Hiebert는 서양인들이 이 심리적 영적 세계를 배제한 오류에 대해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초자연적이지만 경험적인 영역을 “배제된 중간지대”라고 불렀다. 그의 책 Anthropological Reflections on Missiological Issues (1994) 가운데 나오는 그의 논문 논문 “The Flaw of the Excluded Middle” 참조.
[10] 표준 영어에서 jinni는 단수이고 jinn은 복수이다.
[11] 무슬림들의 견해에 의하면 진들도 몸을 가질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진의 몸은 무게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공기의 무게와 비슷할 것이라고 한다. Ahmad H. Sakr, Al-Jinn (Lombard, IL: Foundation for Islamic Knowledge, 1994:115) 참조. 따라서 진들은 인간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자식을 낳고 죽는다고 믿는다. 만일 진들이 몸이 없다면, 그들은 인간의 몸을 빌어 자신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이것은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영들림에 대한 무슬림들의 민속 이론이다.
[12] 필자의 저서 Islam among the Swahili in East Africa (Nairobi, Kenya: Acton Publishers, 2004) 제 5장에서 필자는 평민들의 진 경험과 아울러 진에 대한 이슬람 정경의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다음의 무슬림 학자들의 저서도 아울러 참조 바람. Abu Ameenah Bilal Philips, The Exorcist Tradition in Islaam (Sharjah, UAE: Dar al Fatah, 1997); Umar Sulaiman al-Ashqar, The World of the Jinn and Devils (Jamaal al-Din M. Zarabozo, trans. Boulder, CO: Al-Basheer Company, 1998)
[13] 진을 가리키는 무슬림들의 단어 사용이 때때로 혼돈스런 것을 본다. 의미를 명확히 하기위해서 주의할 것은, 해를 끼치며 악행을 하는 진들을 가리킬 때에는 “악마”의 뜻을 가진 샤야띤 (단수는 샤이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샤야띤이란 말은 다른 종류의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하고 있는 진들”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Kim 2004:82).
민속 이슬람의 의식 및 풍습들
대부분의 영적인 존재들과 힘들은 무슬림 개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된다. 영적 세계에 대한 끔찍한 경험들 때문에 무슬림들은 적의가 가득한 주변 환경들을 다룰 수 있는 영적 사역자 혹은 치료자의 도움을 절실히 느낀다. 때때로 이러한 영적 치료자들은 심지어 “정통”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이 치료자들은 마치 지역 사회의 건강 증진을 위하여 의사들이 의술을 제공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전문적 치료 기술을 사회에 유료로 제공한다.
영적 치료자들 가운데도 차이가 있는데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만일 어느 치료자의 종교성이 지역 전통보다도 정통 이슬람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면, 그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꾸란을 사용하여 진때문에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자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치료자는 보통 꾸란 36장인 “야신” 장을 낭독하면서 환자를 괴롭혀 온 진을 퇴치하려 한다. 이런 경우에 치료자는 병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진을 향하여 권위 있는 목소리로 야단치면서 병의 원인을 갖고 환자를 떠나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만일 치료자의 종교성이 이슬람의 정통에서 좀 많이 떨어져 있다면, 그는 자기 지역의 비이슬람적인 전통들을 많이 사용할 것이다. 즉, 전통 북과 같은 타악기 등을 사용하고 전통 춤을 추면서 병을 가져다 준 영들을 다루고자 할 것이다. 물론 치료 의식 가운데 adhan (기도초청), du‘ā (개인기도), takbir (알라의 위대하심을 고백), Sufi들의 dhikr 의식 등과 같이 정통 이슬람의 요소들도 사용하지만 치료를 유도하는 마술적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1] 그러나 꾸란의 구절을 사용해서 악령을 퇴치하려 하든지 하니면 민속적 의식을 통해서 영들을 달래려 하든지 간에, 치료나 퇴마의 효과는 거의 일시적일 뿐이다.
영적 치료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외에, 보통 무슬림들은 또한 온갖 종류의 다른 관습들을 행한다. 이런 것들을 계속 행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가족들과 공동체를 사악한 영들과 다른이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종종 죽은 성자들의 사당이다 묘를 찾아가서 복을 빌고 보호를 요청한다. 그들은 죽은 성자들에게 제사의식을 잘 드리면 그들이 산자들에게 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알라의 유일성(타우히드)에 대한 신앙을 높이도록 의도된 5행과 같은 정통 제도들조차도 민속 무슬림들에게는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특정한 시간이나 날자나 요일이나 달이나 계절들을 아주 특별한 영적 의미나 효력을 갖고 있다고 믿기도 한다. 어느 행사를 위해서 특정한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하면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장소들과 방향들 역시 영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므로 어떤 무슬림들은 특별한 행사를 할 때에는 민속 전승에 따라 거기에 맞는 장소와 방향을 찾는데 신중을 기하기도 한다.[2] 따라서 민속적인 무슬림들은 그들을 해하고자 하는 영적 환경들로부터 자신들의 복지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규칙들을 조심스레 지킨다. 이러한 민속 이슬람의 세계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보통 무슬림들의 마음이 온갖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며,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며, 알지 못하는 적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들은 또한 보이지 않는 영계와 진들과 조상의 영들을 두려워 하며, 이땅에서의 질병의 위험들을 두려워 한다.
몇가지 선교적 제언들
앞에서 기술한 민속 이슬람의 현상학에 기초하여 필자는 다양한 무슬림 문화권에서 사역하는 타문화권 선교사들(혹은 선교사 후보생들)을 위하여 몇가지 중요한 선교적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민속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역할 때에 꼭 필요한 선교의 기본들로서 더 많은 실제적 기술들을 개발하기 전에 반드시 유념해야 할 이슈들이라 생각되어 여기서 언급한다.
선교사의 동정 깊은 따뜻한 가슴
첫번재 논의 사항은 이슬람과 무슬림들에 대한 선교사의 시각에 관한 것이다. 과거 대부분의 선교적 노력들은 무슬림들의 마음보다는 이슬람의 교리적 내용들에 더 초점을 맞추었었다. 우리는 “저들의 잘못들을 고쳐주자”는 차원에서 선교를 생각해 왔던 경향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상당히 많은 선교사들이 (한인 선교사들도 많이 포함해서) 기독교 선교를 이러한 전통적인 마음자세로써 이해하는 것을 종종 본다. 어떤 선교단체들은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이슬람의 강력을 무너뜨리자”는 이념 아래 많은 단기 선교봉사자들을 내보낸다. 그리고 단기 봉사자들은 종종 무슬림들이 볼 때에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의식들을 한다. (즉, 모스크를 돌며 기도한다든지 모스크 앞에서 무슬림들에게 모독이 될만한 노래들을 한다든지 등등). 그러나 대부분의 단기 봉사자들은 실제로 그 지역의 무슬림들이 자신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으며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단기 봉사자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무슬림이라는 사람들보다도 이슬람의 영이나 이념이 그들의 선교의 대상인 듯하다. 이러한 전투적 혹은 거센 접근방법은 하나님의 선교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데에 기인한다고 보인다. 하나님의 선교의 초점은 문화적 제도나 종교적 이념들보다도 “사람들” 자체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분은 인간들의 죄때문에만 오신 것이 아니다.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아픈자들을 고치기 위한 의사로서도 오셨다 (마태복음 9:12-1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과 잘못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장차 당신이 만드실 거룩한 자녀의 모습을 이미 보시고 일하신 것이다. 바로 우리를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시각이,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끊임없는 그분의 사랑이, 결국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든 것이다.[3] 이렇게 애정어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관점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하여야 하고, 또 특별히 무슬림 세계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견지해야 할 선교적 시각이다. 이러한 신적 시각에 기초하여 무슬림들을 향하여 조건 없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다가갈 때에 (종교적 이념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과 의미 깊은 친분을 순전하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 의미 깊은 관계 속에서 예수의 복음은 그들에게도 의미 있게 전달될 것이다.
선교사의 필수 기술로서의 민속학적 조사법
두번째 논의점은 선교학적 기술에 관한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전제할 때에 (마태복음 22:39; 마가복음 12:33), 무슬림 전도와 연관해서 자연스레 제기되는 문제는, “그렇다면 우리와 삶이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다른 무슬림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해”라고 하는 차원이다. 무슬림들의 삶의 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순전하게 사랑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타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뼈아픈 노력을 수반하게 된다.[4]
기독교의 사랑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건강한 동정심을 갖게 한다. 이러한 사랑의 동정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본보기가 있기에 우리도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향하여 가지셨던 자애로운 동정심을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5] 타인들을 향한 이러한 동정어린 사랑을 가질 때에 우리는 또한 그들의 감정조차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이렇게 동정과 동감을 갖고 다른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들의 문화적 신념들과 가치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의 구조들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충분히 알게 될 때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해하기가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그들을 알고자 하는 희생적인 많은 노력이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타문화권 선교사에게 있어 문화 이해를 위한 전문적 기술은 필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인으로서 선교사는 내부인들의 문화적 의미들을 분석하는 데에 필요한 선교학적인 도구로서의 문화인류학적인 기술, 즉 소위 민속학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6] 유진 니다의 고전적인 조언은 아직도 심오한 진리이다. “좋은 선교사는 항상 종은 인류학자였다.”[7] 필자는 종종 선교사들 가운데 존재하는 위험을 하나 목격해 왔다. 그것은 자신의 문화적 신념이나 가치들에 근거해서 너무 성급하게 다른 문화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고자 하는 성향이다. 자기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에 대한 부정확한 평가는 매우 부적절한 선교적 접근을 하도록 인도할 가능성이 많다. 그럴 경우에 외부자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사역을 구상하였다 할지라도 불행히도 그 사역이 복음 전달에 도리어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대로, 보통 무슬림들은 영적 존재들과 힘들이 가득한 그런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는 그들의 모습이 고등 교육을 받은 선교사들에게는 어쩌면 어리석거나 미신으로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의 종교적 딜레마나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일상의 문제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의를 갖고 그러한 문제들을 관찰하며 연구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갖고 접근할 때에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의 종교와 문화가 (즉, 그들의 이슬람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삶의 문제들을 심오하게 해결해 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있을 때에 비로소 선교사들은 복음을 어떻게 무슬림들과 잘 나눌 수 있을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적극 추천하는 것은 모든 선교사들이 끊임없이 전문적인 인류학 훈련을 통해서 민속학적 연구 기술을 개발하고 진전시키는 것이다. 민속학지 연구를 통해서 무슬림들의 영적인 필요들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면 선교사들은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민속적인 무슬림 사회에서 이제 어떻게 복음을 상황화할 것인지에 대한 사역의 다음 단계를 보게 될 것이다.[8]
선교사의 사역 도구로서의 치유 능력
필자가 끝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 사역에 관한 제언이다. 민속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영적 문제들이 많은 무슬림들을 도울 수 있도록 영적인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민속학적 연구를 통해서 특정 지역의 무슬림 사회를 문화인류학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되면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의 삶의 문제들을 더욱 면밀히 볼 수 있으며 그들의 힘겨운 마음을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선교사들은 그들의 영적 문제들을, 특별히 진이나 영적 세력들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의 문제들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할 수 있다면 선교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민속 무슬림들의 영적 세계에 대한 신학적, 사역적 훈련을 충분히 받을 필요가 있다.[9]
민속 무슬림 사회에서의 전도 사역에 관한 최근의 조사들을 보면, 상당수의 무슬림들이 예수님과의 기적적인 만남을 통해서 회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례도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꿈이나 치료를 통한 사례들을 많이 본다.[10] John Travis의 보고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기도 사역을 통해서 무슬림들이 회심하는 사례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Sundanese 무슬림들 가운데서 사용되고 있는 세 가지 종류의 기도 사역을 언급한다. 하나는 영적 묶임을 파하는 기도이고, 또 하나는 신체 및 감정의 치유를 위한 기도이며, 세번째로는 축사하는 기도이다.[11]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속 무슬림들이 (즉 “보통” 무슬림들이) 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에 자신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깊이 이해해 주는 선교사 친구들에게 기도를 요청한다는 사실이다.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의 기도 요청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여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선교사들은 무슬림 문화 이해를 바탕으로 사역의 기술들을 잘 발휘하여 조심스럽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 그 결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들이 일어난 것을 많은 이들이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적지 않은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 이웃이나 선교사들과 친구됨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통한 이적들을 통해서, 꾸준하게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고 있다. 증언들을 분석해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우정과 그들의 치유 기도의 조합이야말로 무슬림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민속 무슬림들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란 애정과 친절함으로 충만하고 또 삶의 문제들이 많은 무슬림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는 그러한 선교사이다.
후기
필자는 앞에서 민속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일반적 특질들을 기술하였고, 이러한 무슬림들 가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가져야 할 기본적 조건들에 관련하여 몇가지 제언을 하였다. 오늘날 영적인 이슈들이 무슬림들의 관심을 더욱 끄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러한 때에 필자가 언급한대로 가슴과 기술과 능력을 겸비한 선교사들이 더욱 많이 배출되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잘 준비된 선교사란 예수께서 가지셨던 것처럼 민속 무슬림들을 향하여 동정 어린 애정을 품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슬림들의 마음과 가슴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훌륭한 인류학자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기도 사역을 통하여 민속 무슬림들이 다양하게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치유해줄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능력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다. 필자는 우리의 교회들과 신학교들과 선교사 훈련원들이 이렇게 잘 준비되고 영적으로 무장된 선교사들을 더욱 많이 배출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병들게 하거나 신들리게 하는 영들에게 이렇게 접근하는 것을 어떤 인류학자들은 “adorc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Luc de Heusch’s Why Marry Her? Society and Symbolic Structures (Janet Lloyd, tran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156) 참조.
[2] 필자가 1997-8년 현장 조사를 할 때에, 탄자니아 동해안 지역에서 스와힐리 전통 치료사들이 특정한 장소나 나무들이나 방향들을 영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그 중 몇 사람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3] 이것은 선교의 동기에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서, 이에 대해서 더 많은 논의들을 깊이 있게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상 다음의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4] 필자가 지난 수년간 신대원과 선교사 훈련원 등에서 기독교 복음 증거를 위한 문화 인류학 강의를 해 오는 가운데, 신학적으로와 인류학적으로 “다른이들을 이해하기”에 대해서 가르치는 기관들이 너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신학교육 기관은 문헌학, 본문학, 조직신학, 해석학, 역사학 등이 매우 탁월한 반면, 인간 이해에 관한 과목들의 수가 너무 적은 것을 보았다.
[5] 히브리서 4:15; 베드로 전서 3:8-9); 빌립보서 2:1-8.
[6] Ethnography는 민속학 연구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문화 연구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민속학 연구 혹은 “민속학지”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기에 필자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인류학의 현장 연구 방법으로서, 인류학 연구가는 이를 통하여 어느 주어진 사회의 사회문화적 구조들과 사회 관계들, 문화적 믿음들과 의미들을 알게되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인 사람들을 배우게 된다. 선교사들 훈련을 위해서 필자는 Charles Kraft의 Anthropology for Christian Witness (Maryknoll, 1996)과 James Spradley의 Ethnographic Interview 및 Participant Observation (Orlando, FL: Holt, Rinehart and Winston, 1979 and 1980 respectively)를 사용해 왔다.
[7] Eugine Nida, Customs and Cultures: Anthropology for Christian Missions.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81, original in 1954, p. xi.
[8] 본 고에서는 지면의 한계로 이 중요한 상황화의 이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독자들이 최근에 출판된 Charles Kraft가 편집하고 저술한 Appropriate Christianity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2005)를 읽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9] 필자는 현재 섬기고 있는 네그스트 대학원에서 선교사와 목회자들을 위해서 “능력 대결 (Power Encounter)”이라는 과목을 수년간 가르쳐 왔다. 이 과목에서는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개혁신학적으로 이해하고 또 복음의 능력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며, 실제적인 사역을 훈련한다.
[10] 필자의 학생들 가운데 이디오피아 출신의 한 여학생은 수년 전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자기를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는가를 간증하였다. Woodberry, J. Dudley, Russell G. Shubin, and G. Marks가 공저한 “Why Muslims Follow Jesus: The Results of a Recent Survey of Converts from Islam”를 참조 바람. (Christianity Today의 2007년 10월 호,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07/october/42.80.html 에서 볼 수 있음.) “주목할 것은 실례로 뽑은 750명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민속 무슬림들인데 이들은 영적 능력과 축복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다. 또 중요한 사실은 꾸란에 의하면 예수는 문둥병과 소경을 고쳤으며 죽은 자를 살려낸 선지자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11] Caleb Chul-Soo Kim, John Travis, Anna Travis 들이 공저한 “Relevant Responses to Folk Muslims” (Dudley Woodberry 편집한 From Seed to Fruit: Global Trends, Fruitful Practices, and Emergin Issues among Muslims, William Carey Library에서 2008년에 출판될 예정)을 참조 바람. John Travis는 그의 박사 논문(2008)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치유 기도를 통해서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한 많은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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