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艸丁 金相沃論 - 모래알 한 알의 詩學
1. 머리말
초정 김상옥(1920-2004)은 1939년『문장』 제1권 9호(10월호)에 가람 이병기에 의하여 「봉선화」가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한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등단 이력에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미는 사례가 매우 많았던 일제강점기의 문학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좀 더 섬세하고 엄밀하게 말하면 초정의 등단 연도는 그보다 약간 더 빠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문장』에 추천되기 1년 전인 1938년 10월 동인지 『맥(貘)』 3호에 자유시 「모래알」을 발표하였고, 이 작품이 바로 초정의 등단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초정이 일제강점기 통영지역 문인들의 작품 활동 상황을 소개한 어떤 글에서 자신이 '맥' 동인에 참여함으로써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1)는 점도 깊이 음미해볼 만한 사항이다. 더구나 초정이 19세의 소년기에 발표한 「모래알」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삶의 방향과 시세계를 예감케 한다는 점에서 누님에 대한 그리움을 아기자기하고 애틋하게 노래한 「봉선화」와는 무게감이 전혀 다른 작품이다. 이러한 몇 가지 측면에서 초정의 등단작을 「봉선화」로 보기보다는 「모래알」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작품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본디 너 어느 海中의 크나큰 바위로
波濤의 毒牙에 깨물린 千劫의 가진 風霜을
이제 여기서 다시금 回想하누나.
저 밀려오는 潮水의 咆哮!
反抗도 없으나 屈從 또한 없었거니,
몸은 닳고 쓸리어 적어만 가도
너 마음 限 없이 限 없이 넓어만 져,
그리고 또 알았노니
쓸모 없이 肉重한 體軀는 모조리 모조리 내던지고
오직 참된 靈魂만을 가지려는
오오 너의 意圖여.
-「모래알」 전문
이 「모래알」은 약간의 퇴고를 거쳐 1949년 성문사에서 간행한 초정의 세 번째 시집 『異端의 詩』에 「모래 한 알」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는데2), 보다시피 이 작품은 작중 화자가 바닷가에 있는 모래알 한 알을 바라보는 데서 시상이 시작된다. 작품은 모래알이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의 궤적을 회상하거나, 작중 화자가 모래알의 삶의 궤적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떤 경우든 작자의 감정이 모래알에 짙게 이입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모래알의 현재 상태는 작은 모래알 하나에 불과하지만, 원래는 바닷속에 있었던 거대한 바위였다. 바닷속의 거대한 바위가 “천겁의 가진 풍상”을 거센 “파도의 독아”와 격렬하게 부딪히는 동안 깎이고 깎여 하나의 모래알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파도가 험상궂은 얼굴로 포효하며 바위에게 냅다 들이닥칠 때마다, 그 거대한 바위는 밀려오는 파도와 들입다 맞장을 뜨며 격렬하게 반항을 해보지는 못했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 수단이 없는 바위에게는 거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바위가 으르렁거리는 파도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굴종을 했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굴종은커녕 포효하는 파도에 닳고 휩쓸려가서 체구가 한 없이 적어져3) 가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오히려 “한없이 한없이 넓어”져 갔다. 한없이 적어져 가는 동안에 오히려 한없이 넓어져 갔다니, 역설이라도 이만저만한 역설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적어짐은 포효하는 파도에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깎여나간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밀려오는 파도를 역이용하여 “쓸모없이 육중한 체구는 모조리 모조리 내던지고/ 오직 참된 영혼만을 가지려는” 바위 자신의 치밀한 의도의 결과였다. 독자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반전에 뇌리에서 난데없이 우르르 쾅쾅 천둥 번개가 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상하게 주목되는 것은 초정이 최초로 발표한 이 「모래알」이 단순히 모래알 그 자체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모래알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이 작품의 모래알 속에 작자와 같은 인물로 보아도 무방한 화자의 감정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작자와 작중 화자, 그리고 모래알은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지닌 거의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모래알은 작자나 작중 화자의 정서적 등가물에 해당된다.
이렇게 볼 때 「모래알」은 일차적으로 19세의 소년이었던 초정이 지나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지은 작품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을 한다면, 결과적으로 전 생애에 걸친 초정의 삶은 「모래알」에서 노래한 모래알 한 알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고, 그가 평생에 걸쳐 창작한 시들도 넓은 범주에서 ‘모래알 한 알의 시학’을 추구한 결과였다고 말할 만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시에 대한 부단한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4)이 뒤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짤막한 글은 바로 이러한 견지에서 초정의 삶과 시세계를 ‘모래알 한 알의 삶’ · ‘모래알 한 알의 시학’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그의 삶과 시세계를 보다 깊이 있게 음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집필되었다. 게다가 이 글에서 인용하는 초정의 글들 가운데는 오래도록 묻혀서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여러 편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글이 초정 연구의 텍스트를 확대하는데도 약간의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2. 모래알 한 알의 시학
(1)
초정은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조건과 개인적 상황 속에서 고뇌에 찬 삶을 살았던 한 역사적 인간이다. 초정이 고뇌에 찬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타고난 가정 형편 자체가 극도로 어려웠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입증할 필요도 없겠지만,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초정의 일화 한 대목을 그 증거로 들어 두기로 한다.
나는 어려서 시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서 내게 그림을 그리는 물감을 당해 줄 만한 힘이 없었다. 물감이 없는 나는 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다가, 그 연필로 동시를 써본 것이 시를 쓰게 된 첫 동기였다...... 다만 그림을 그릴 때도 물감이 없어 뜻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던 어린 날의 나는, 그림으로 말하려던 그 물줄기를 억지로 가로막았었다. 그랬더니 물줄기는 없어지지 않고, 옆으로 비어져 흘러나온 것이 바로 시로 향해 흐르게 된 것이라 믿는다.5)
보다시피 초정은 어릴 때 시보다 그림을 그리기를 더 좋아했지만, 막상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그림으로 향하는 물줄기를 억지로 틀어막았고, 물감이 없어서 연필로 그림을 그리다가 바로 그 연필로 동시를 쓴 것이 동기가 되어 시인이 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뼈저린 가난과 함께 그를 총체적 고난의 깊은 수렁으로 빠뜨린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인은 그가 “生理的으로 타고난 듯한 열렬한 민족주의자”6)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초정은 청소년기에 이미 「무궁화」란 제목의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7)를 발표했고, 이 작품으로 불온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요시찰 인물의 목록에 올랐다. 초정 자신의 표현대로 “때가 일제시대였던 만큼 장차 고생할 터를 일찌감치 닦은 셈”8)이었다.
그 후 초정은 무려 세 번에 걸쳐 日警에 체포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경의 추격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서울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때가 대부분의 문인들이 친일파로 돌변하여 일제의 나팔수가 되어버렸던 일제강점기 말이라는 점에서, 초정의 이와 같은 고난에 찬 이력은 우리를 아연 숙연하게 한다. 그러나 초정이 여러 번 투옥의 고난을 겪은 것은 일제의 폭압에 대해 처절하게 저항하고 온몸으로 투쟁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사상이 불량하기 때문에 언제 돌발적인 사건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 판단에 따른 일제의 선제 조치의 결과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는 피비린내 나는 무장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투옥된 것이 아니라, 독립투쟁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잠재적인 이유로 투옥되었던 것이다. 이점은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동시를 통해서도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만세를 부르면
잡아간다고
입속으로 만세를
불러왔었네
속옷 안에 꿰어맨
오랜 태극기
만져보면 가슴을
덮고 있었네 9)
- 「3·1절」
작품의 제목에 ‘해방 익년(翌年) 3월 1일’, 그러니까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3월 1일에 지었다는 주석이 붙어 있는 「3·1절」이라는 동시다. 보다시피 화자는 “만세를 부르면/ 잡아간다고/ 입속으로 만세를/ 불러왔”고, 푸른 하늘에 마음껏 태극기를 휘날려보지 못하고 “속옷 안에 꿰어 맨/ 오랜 태극기”를 남모르게 만져보면서 일제강점기를 보낸 사람이다. 과거 회상에서 끝이 난 작품이지만,\ 이제 해방된 공간에서 3·1절을 맞이했으니,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마음껏 만세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이 言外에 짙게 깔려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작품이 일제강점기에 실제로 있었던 초정의 개인적인 체험을 노래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우리 민족이 지녔던 보편적 정서를 초정이 대신하여 노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가 없는 가슴 뭉클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드러난 정서가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면서 처절하게 저항을 했던 무장 독립투쟁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10대 소년 시절에 「청자부」, 「백자부」 등 우리 문화재를 소재로 한 다수의 시조를 지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十代少年 시절에 지은 「靑瓷賦」, 「白瓷賦」라는 시조 형식의 시를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때 ―지금을 거슬러 三十年을 훨씬 넘는 옛날―에도 나는 이미 우리 陶瓷 아니 우리 문화재에 대하여 나대로 사무치는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청자부」 생략)/ 이것은 예의 「청자부」라는 3행 연작의 시다. 그때 일제는 大東亞共榮圈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피 비린 전쟁을 서두르기에 한창이었다. 이 시 속에 한 귀절도 日帝를 바로 대놓고 욕한 것은 없으나, 우리의 옛스런 자취를 思慕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同化政策을 은연중에 항거한 것이라고나 할까. / 속담에 “하던 지랄도 멍석 펴면 아니한다”는 말이 있듯이, 일제가 그렇게도 우리 문화를 깔아뭉개려고 하지 아니했던들 내가 이렇게 병들도록 우리 것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지녔을까? 하고 내 스스로 의심해보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길이 다 다르겠지만 나는,...... 되려 흙 묻은 도자의 파편을 들여다보고 촛불같이 꺼져가는 겨레의 눈길과 손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미 문자로서 문자의 구실을 잃었던 지금의 ‘한글’로서 발표할 기약조차 없는 노래를 써서 측은한 삶의 보람으로 삼았었다. 10)
초정이 일제강점기 10대 소년 시절11)에 우리 문화재에 대한 “병이 들도록” “사무치는 애정”을 바탕으로 쓴 「청자부」, 「백자부」 등 다수의 문화재 소재 작품들에는 실제로 “일제를 바로 대놓고 욕한” 것은 단 한 구절도 없다. 그러나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선언하고 內鮮一體의 동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전쟁을 서두르고 있던 시대에, 초정이 ‘우리의 옛스런 자취’를 사모하고 노래한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한 “은연중의 항거”였다. 그것은 일제가 동화정책의 기치 아래 “우리 문화를 깔아뭉개려고” 갖은 애를 다 쓴 데 대한 초정 나름의 대응 방식이었던 것이다. “촛불같이 꺼져가는 겨레의 눈길과 손길을 더듬”으면서, 일제의 말살 정책으로 “문자의 구실을 잃었던” ‘한글’을 수단으로 하여 “발표할 기약조차 없는 노래를 써서 측은한 삶의 보람으로 삼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말에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가졌던 시인을 찾아보기 극히 어렵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재를 노래함으로써 일제의 동화정책에 “은연중에 항거”했던 초정의 현실인식과 작가 정신에 대해서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에 이 작품들이 교과서에 두루 수록되어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고취하고 국민 정서를 함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도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한글 말살 정책 때문에 “발표할 기약조차 못 하다가”, 해방 후에 간행된 『초적』을 통해서 겨우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이 작품들에서 저항시로서의 실질적인 역할 같은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만세를 부르면/ 잡아간다고/ 입속으로 만세를” 부르고, “속옷 안에 꿰어맨/ 오랜 태극기”를 만져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점은 초정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낸날 나는 이 겨레와 이 疆土를 이 글과 이 말을 마음으로 사랑하였으되 그의 밤은 屈辱을 씻기에 憤怒보다 슬픔이 앞을 가리고 抗爭보다 怨望으로 살아 이제 이렇게 오늘을 만나니 가슴을 이개는 기쁨보다 도리어 恨되고 마음이 허전해짐을 느끼옵니다// 진실로 지낸날의 그 사랑이 입에 붙은 사랑이 아니면 내 너무 미지근하고 行動함이 없었음을 나는 이제사 뉘우치고 스스로 五臟을 찢고 싶은 그러한 불같은 미움을 禁하지 못하옵니다//오늘 이 冊을 냄은 ―아직 一部의 作品(新詩)이 따로 남았으나― 다만 흘러간 그 切痛한 忍辱의 날을 맑히고자 함이언만 이 詩의 어느 구석엔지 실오래기만 하되 그래도 염통에서 터져나온 피매친 사랑이 숨겨 있음을 믿사옵고 이를 或是 찾아 읽으시고 느껴주시는 이 계시다면 나는 이 우에 더 큰 榮光이 없겠나이다12)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봄13)에 초정이 쓴 『초적』의 발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체포를 당해 투옥되었고, 일본 경찰의 추격에 쫓겨 전국을 떠돌다가 해방을 맞은 시인이라면 자신의 이력에 대해 드높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이 글에는 자부나 긍지 대신에 “절통할 인욕의 날들”에 대한 절절한 반성과 아픈 참회가 가득하다. 실로 무서운 자기 성찰, 자기 반성이 아닐 수 없다. 해방 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는 상황에서, 참회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초정의 절절한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은 정말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염통에서 터져나온 피매친 사랑”을 가슴에 품고 “切痛한 忍辱의 날”을 살았던 양심적이고 고뇌에 찬 지식인 초정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난날의 자신의 삶은 참회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치욕을 안겨준 일제에 대한 불같은 분노보다 슬픔이 앞을 가리고, 뜨거운 저항보다 일제에 대한 원망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이했는데도 “가슴을 이개는 기쁨보다 도리어 恨되고 마음이 허전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민족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 미지근하고 行動함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五臟을 찢고 싶은 그러한 불같은 미움을 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초정이 주위 사람들에게 의열단의 단원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경찰들과 대치하다 자살로 삶을 마무리했던 김상옥 열사와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이 송구스럽고 민망하다고 술회14)하곤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초정은 일제강점기 동안 밀어닥친 일제의 쓰나미 앞에서도 단 한 번도 굴종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에게 대놓고 뜨겁고 격렬하게 온몸으로 저항을 한 것도 아니었다.15) 따라서 초정의 삶과 행동방식은 밀려오는 파도의 포효 속에서 제대로 반항도 해보지 못했지만 결코 굴종도 한 적도 없었다는 작품 「모래알」의 바닷속 바위와 다를 바가 없다. 초정이 동화정책의 기치 아래 우리 것을 깔아뭉개려는 일제의 난폭한 쓰나미에 대응하여 그의 영혼의 정수인 『초적』을 남긴 것도 바닷속의 거대한 바위가 의도적으로 파도를 역이용하여 ‘참된 영혼’의 농축물인 모래알 하나로 가다듬어간 것과 같은 견지에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2)
초정의 삶이 그러하듯이 초정의 시도 ‘모래알 하나의 시학’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그가 시 창작 과정에서 “쓸모없이 肉重한 體軀”를 내던지기 위하여 평생에 걸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점은 초정이 만년에 새 시집이나 시 전집을 간행하는 대신 『향기 남은 가을』, 『느티나무의 말』 등 시선집만을 연달아 간행했다는 사실에서 그 대강을 엿볼 수 있다. 시선집만을 간행했다는 것은 자신의 작품을 모두 모으는 데 마음을 쏟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 가운데 군더더기를 버리는 데 마음을 쏟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선집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을 골고루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간행된 시집에 수록된 적이 없는 최근 작품을 중심으로 수록한 것16)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된다. 게다가 54세 때인 1973년에 간행된 『삼행시』 이전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 단 한편도 없다는 것은 크게 주목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시가 점점 더 좋아져서 ‘참된 영혼’을 담은 시의 정수에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인식의 소산으로 생각되며, “최근에 쓴 작품일수록 마음에 드는 것이 많다”는 초정의 언표도 이러한 견지에서 이해된다.17)
그러나 초정이 “쓸모없이 肉重한 體軀”를 내던지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가 60년에 걸친 문학 활동을 결산하던 시점인 1998년에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여 간행한 사실상의 ‘마지막 시선집’18)『느티나무의 말』이다. 다 알다시피 『느티나무의 말』은 오직 이 한 권만을 60년 시작 활동의 기념으로 남기고 나머지 모든 시집을 “폐기”19) 한다고 공개적으로 언표를 하고 간행한 시선집이다. 웬만한 대가들은 방대한 분량의 전집을 간행하곤 하던 나이에, 아주 단촐하고 얄팍하게 간행된 이 시선집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그동안 발표했던 무수한 작품들 가운데 72편의 단시조와 1편의 자유시, 1편의 사설시조 등 딱 74편20)만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간행한 『고원의 곡』(1948년), 『이단의 시』(1949년), 『의상』(1953년) 『목석의 노래』(1956년), 『묵을 갈다가』(1980년) 등 5권의 자유시집과 『석류꽃』(1952), 『꽃 속에 묻힌 집』(1958년) 등 두 권의 동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사실상 모두 ‘폐기’된 것이다.
초정의 서릿발 같은 엄정한 잣대는 시조에도 가차 없이 적용되어 시조집 『초적』에 수록된 작품들까지 모조리 폐기되었다. 다 알다시피 『초적』은 우리 시조사의 역사적 전개에서 비상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시집 가운데 하나로서, 이미 그 위치가 확고부동하게 자리매김되어 있다. 더구나 총수록 작품 40편 가운데 무려 10편에 달하는 작품이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국정 교과서에 교대로 수록됨으로써, 그를 일약 유명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시집이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애착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이 작품들을 모두 과감하게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초정에게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초적』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스무 살 안팎의 청소년기에 지은 작품으로서,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냉정하게 보면 크게 평가할 게 못 된다”는 것이 폐기의 사유였다. 게다가 『느티나무의 말』에는 序詩로 쓰인 자유시 한 수와 아주 짤막한 사설시조 한 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시조만 수록되어 있으므로 초정이 중년기에 쓴 주옥같은 연시조들도 모조리 된서리를 맞았다.21) 그러므로 마지막 시선집인『느티나무의 말』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길이가 극히 짧아서 쓸모없는 군더더기가 달라붙을 여지가 없다. 요컨대 『느티나무의 말』은 전 작품을 망라한 거대한 전집 대신에 얄팍한 시선집을 간행하면서 물리적인 분량이 긴 작품을 제외하고 정수 가운데서도 각별한 농축물에 해당되는 짧은 작품만 모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대한 바위가 “쓸모없이 肉重한 體軀”를 “모조리 모조리 내던”진 결과 “오직 참된 靈魂만을 가”진 모래알이 되었다는 초정의 등단작 「모래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초정의 개작 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된다.
① 바람벽에 마른 시래기/ 바람 닿는 소리// 戶口調査 오는 날/ 짚단 부스럭거리는 소리//껍질 까진 電氣줄/ 날짐승 지지는 소리//털릴 것 한톨 없어도/ 밤손님 개짖는 소리// 철 가고 다 쇠잔해진/ 귓전에 남은 소리.
-「귓전에 남은 소리」22) 전문
② 바람벽/ 마른 씨래기/ 바람 닿는 소리.// 戶口調査/ 오던 날/ 짚단 부스럭거리는 소리// 털릴 것/ 한 톨 없어도/ 밤손님 개 짖는 소리.
- 「짚단 부스럭거리는 소리」 23)전문
③ 돌을 봅니다./ 가만히 돌을 보면/ 돌은 어깨를 움직입니다.// 이끼 속에서/ 주름진 옷자락,/ 돌은 무릎을 움직입니다.// 바람에 연꽃이/ 나부끼듯/ 입언저리 미소를 머금습니다.// 돌을 봅니다./ 이윽고 돌은/ 실눈을 내려감습니다.// 어느새 여름이 가고/ 몇 번이나/ 유서를 고쳐 쓰고/ 다시 서늘한 가을이 옵니다.
- 「돌1.」 24)전문
④ 이끼 속/ 주름진 옷자락/ 어깨를 추스립니다.// 바람에/ 연꽃이 벙글듯/ 입 언저리 미소를 머금습니다./ 이윽고/ 유서를 고쳐 쓰고/ 또 서늘한 가을이 옵니다.
- 「돌」 25)전문
⑤ 허구헌 날, 서울의 구정물을 다 받아내리던 淸溪川 六街. 그 냇바닥을 覆蓋한 시멘트 위로 高架道路가 놓이고, 그걸 또 받쳐든 우람한 橋脚. 그 橋脚의 틈서리에 한 포기 강아지풀이 먼지 묻은 바람을 맞아 나부끼고 있었다. 시멘트 아스팔트로 덮인 서울은 풀씨 하나 묻힐 곳도 없는데, 이 橋脚의 강아지풀은 온갖 가냘프고 질긴 목숨들을 스스로 代身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와 떨어진 씨앗이던가 ? 이 강아지풀은 또 좁쌀보다 작은 그의 씨앗을 실오리 같은 줄기 끝, 흰 茶褐色 털 속에 달고 있었다.
- 「代役의 풀」 26)전문
⑥ 이토록/ 척박한 땅에/ 강아지풀 나부끼네// 줄기는/ 이미 시들고/ 좁쌀보다 작은 씨알// 목숨은/ 애처롭고녀/ 이 씨알 속에 잠자네.
- 「강아지 풀」 27)전문
보다시피 ②, ④, ⑥은 원작인 ①, ③, ⑤를 개작한 것이다. 원작과 개작을 비교해보면, 초정은 없어도 무방한 군더더기들을 과감하게 생략·압축하고 ⑥의 경우처럼 극도로 단순화하여 시적 긴장감과 정서적 밀도를 최대한 높여나가는 한편, 여백과 여백 사이의 침묵의 의미를 더욱더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작품의 물리적인 분량이 크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원작의 자유시들이 모두 단시조 형식으로 개작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정의 마지막 시선집인『느티나무의 말』에는 단 두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시조만을 수록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28) 이렇게 볼 때 대략 60년에 걸쳐 창작된 초정의 시들은 궁극적으로 거듭된 다이어트를 통해 시조의 원형질인 단시조를 향하여 부단하게 움직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초정 시의 이와 같은 운동 방향 역시 거대한 바위가 “쓸모없이 肉重한 體軀”를 모조리 내던진 결과 “오직 참된 靈魂만을 가”진 모래알이 되었다는 초정의 등단작 「모래알」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
줄잡아 60년에 걸쳐 창작된 초정의 시가 군더더기를 모두 제거하고 단시조를 향하여 부단하게 움직여 왔다는 것은 그의 미의식의 부단한 변모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60년에 걸쳐 일어난 변모의 세부적인 곡절을 이 자리에서 자세하게 논할 수는 없지만, 변모의 거시적인 방향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기 위해 백자를 노래한 작품 2편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① 찬 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달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아래 비진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틈에 不老草 돋아나고
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ㅅ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 「白磁賦」 29)전문
② 상머리
돋아온 달무리
시정은 까마아득하다.
어떤 기교
어떤 품위도
아예 가까이 오지 말라.
저 적막
범할 수 없어
꽃도 차마 못 꽂는다.
- 「백자」30) 전문
①은 초정이 10대의 소년 시절에 창작하여 1947년에 간행된 첫 시집 『초적』 통해서 처음 발표한 「백자부」이고, ②는 고희 기념 시선집인 『향기 남은 가을』에 최초로 수록되었다가 약간의 퇴고를 거쳐 1998년에 간행된 『느티나무의 말』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도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①과 ②가 표현 기법이나 미의식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인데,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소재로 선택된 백자의 차이다.
①의 소재로 선택된 백자는 화원이 격조 높은 솜씨로 십장생을 그려놓은 조그만 술병이다.31) 조그만 술병에다 배경이 되는 산수를 그리고 그 속에다 십장생을 모두 들여놓자면 병 전체가 각종 그림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을 터다. 그러나 ②의 소재로 선택된 백자는 달항아리이기 때문에 일체의 그림이 사라져버린 총체적 여백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①의 백자는 격조 높은 각종 그림으로 아름답겠지만, ②의 백자는 과감하고 대담한 생략으로 매우 단순하고 평범하다. 이 달항아리에는 市井的 삶의 희로애락이 싹 가셔버려 꽃으로도 범할 수 없는 드높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을 뿐이다. 초정의 초기 시인 ①과 후기 시인 ②사이의 이와 같은 美感의 차이를 두고, 미감이 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택된 백자가 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재로 삼은 백자가 달라져서 미감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미감이 달라졌기 때문에 선택한 백자가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32)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작품의 물리적인 분량의 차이인데, 보다시피 ①은 네 수의 연시조로 구성되어 있다. 술병에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십장생의 모습을 낱낱이 묘사하고, 거기에 따른 화자의 정서를 비교적 자세하게 진술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고, 할 말이 많다 보니 길이가 자연스럽게 길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다. 반면에 ②는 달랑 단시조 한 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렇다 할 설명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된 백자가 여백밖에 없는 달항아리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초정이 달항아리 같은 백자를 두고 열렬하게 찬양한 장문의 산문들을 보면, 작품의 소재가 된 달항아리 하나를 두고도 할 말이 많았을 게 뻔하다. 그러니까 이 시는 할 말이 없어서 짧아진 작품이 아니라 “같은 값이면 시는 짧을수록 좋다. 뜻깊은 시는 말을 아낀다”33)고 한 초정의 언어미학에 따라 짧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시라고 보는 것이 옳다. 요컨대 ①이 언어를 통해서 꼼꼼하게 이모저모를 설명한 시라면, ②는 가급적 언어를 대담하게 줄이고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과 침묵으로 하여금 대신 말하게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가 「祭器」라는 작품에서 ‘詩도 받들면/ 문자에/ 매이지 않는다’34)고 노래한 것도 이러한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밖에도 이 두 작품 사이에는 소소하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적지 않다. 우선 ①에서는 사전에 의도적으로 설정해 놓은 문학적 장치가 금방 눈에 띈다. 한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先景後情의 구도를 두 번 반복하는 치밀한 짜임새, 매 수의 종장 마지막 음보에서 일사불란하게 구사한 脚韻 등이 그것이다.35) 하지만 ②에서는 그런 작위적인 의도가 개입할 여지 자체가 없다. 게다가 ①에서 볼 수 있는 정격 시조의 능수능란한 리듬도 사라지고 없으며, 오히려 정격의 세련된 리듬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①의 경우에는 작품 속에다 어떤 가르침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이 감지되지만,36) ②에서는 그런 가르침을 담으려는 의도 같은 것도 찾을 수 없다. 셋째 수의 불과 마흔세 자 속에 바위(돌), 불로초, 구름(채운), 물(시냇물), 사슴 등 십장생을 무려 다섯 개나 밀어 넣고도 전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고도의 언어 기교 같은 것도 발휘될 여지 자체가 없다. ‘불’과 ‘얼음’의 대조를 통해서 도공의 빼어난 기교와 백자의 드높은 품위를, ‘티끌’과 ‘흠’이라는 시어를 구사하여 백자가 천의무봉의 완벽한 예술임을 강조하는 모습도 ②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떤 기교/ 어떤 품위도/ 아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다. ①이 기교와 품위를 교묘한 언어를 동원하여 애써 강조하고 있다면, ②는 기교와 품위를 아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기교와 품위를 넘어선 어떤 드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①은 그림과 설명과 기교와 품위와 찬미와 의도와 가르침 등으로 가득 차 있고, ②는 그런 요소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극히 단순한 가운데 여백과 침묵과 적막으로 가득 차 있다. “암자는 비어 있는데/ 빈 것이 가득 찼다”는 초정의 시구37)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60년에 걸쳐 일어난 변모의 세부적인 곡절을 백자를 소재로 한 이 두 편의 시만으로 충분히 밝혔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한계를 무릅쓰고 試論 삼아 말해본다면, 초정의 미의식은 그가 열렬하게 찬미했던 달항아리 같은 이조 백자의 단순미38)를 최종적인 귀착점으로 하여 부단하게 움직여 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초정이 후기로 올수록 과감한 생략을 통하여 말을 줄이고 절정에 달했던 기교와 작위를 지워 얼핏 보면 평범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無味의 미학39)을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40) 이렇게 볼 때 초정의 초기 시와 후기 시 사이의 미의식의 변화도 결국 “몸은 닳고 쓸리어 적어만 가도” 마음은 “한 없이 한 없이 넓어”져 갔던 초정의 등단작 『모래알』의 주제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맺음말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것처럼 초정이 19세의 소년 시절에 최초로 발표한 사실상의 등단작 「모래알」은 단순히 모래알 그 자체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모래알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요컨대 이 작품의 작자와 작중 화자, 그리고 모래알은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지닌 거의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모래알은 작자나 작중 화자의 정서적 등가물에 해당된다. 이렇게 볼 때 「모래알」은 일차적으로 19세의 소년이었던 초정이 지나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지은 작품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삶과 문학의 방향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가설 아래 검토해본 결과, 초정의 생애는 “밀려오는 潮水의 咆哮”에 대하여 “反抗도 없으나 屈從 또한 없었”다는 「모래알」 속의 거대한 바위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초정이 동화정책의 기치 아래 우리 것을 깔아뭉개려는 일제의 난폭한 쓰나미에 대응하여 그의 영혼의 정수인 『초적』을 남긴 것도 바닷속의 바위가 파도를 역이용하여 참된 영혼의 농축물인 모래알 하나를 가다듬어간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초정이 줄잡아 60년에 걸친 창작 생활을 마감하는 마당에 시전집을 내는 대신 얄팍한 시선집을 간행하면서, 나머지 작품들을 모두 ‘폐기’한 것도 거대한 바위가 “오직 참된 靈魂만을 가”진 작은 모래알이 되기 위한 의도로 “쓸모없이 肉重한 體軀”를 “모조리 모조리 내던”졌다는 「모래알」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초정의 개작의 방향이 군더더기를 덜어낸 짧은 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나, 60년에 걸쳐 창작된 그의 시들이 궁극적으로 시조의 원형질인 단시조를 향하여 부단하게 움직여 왔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초정의 초기 시가 그림과 설명과 기교와 품위와 찬미와 의도와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에, 후기 시에서는 그런 요소 대신에 여백과 침묵으로 더 큰 세계를 담아내려고 노력한 것도 결국 “몸은 닳고 쓸리어 적어만 가도” 마음은 “한 없이 한 없이 넓어”져 갔던 초정의 등단작 『모래알』의 언표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정은 일찍이 일생 동안 백자와 함께 산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10대 소년 시절에 「백자부」를 지은 것이 “내 운명을 점치는 부적과도 같다”고 술회한 바 있다. 41)물론 試論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더 철저하게 검증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초정이 10대 소년 시절에 지은 「모래알」이야말로 그의 삶과 시세계의 변모 양상을 점치는 부적이었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초정의 삶과 시의 운동 방향이 우연히 등단작인 「모래알」의 세계와 부합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兩者가 기이할 정도로 부합하게 된 것은 10대 소년 시절에 「모래알」을 쓰면서 설정한 삶과 문학의 기본 방향을 오래도록 염두에 두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적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부단한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이 뒤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1) 김상옥, 「문학풍토기-동향의 선배와 후배를 말한다」, 『현대문학』 1966년 5월호, 282쪽 참조.
2) 참고로 『異端의 詩』에 수록된 「모래 한 알」의 전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본디 너 어느 바닷속 크나큰 바위로/ 파도의 毒牙에 깨물린 千劫의 갖은 風霜을/ 이제 여기서 다시금 회상하누나.//저 밀려오는 潮水의 咆哮!/ 반항도 없 으나 굴종 또한 없었거니//몸은 닳고 쓸리어 작아만 가도/너 마음 한없이 한없이 넓어만 져//그리고 또 알았노니//쓸모없이 육중한 체구는 모조리 모조리 내던지고//오직 참된 영혼만을 가지려는/오오 너의 意圖여!
3) 맞춤법상 ‘적어져’가 아니라 ‘작아져’로 써야 맞겠지만 시의 원문의 표현을 존중하여 그것을 따르기로 한다. 이하 같음.
4)초정이 한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 얼마나 준엄하게 성찰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다음 글들을 들 수가 있다.
김상옥, 「哭申石艸先生」, 동아일보 1975년 2월 26일 자.
김상옥, 「최소한의 염치」, 조선일보 1975년 9월 27일자.
5) 김상옥, 「내가 影響 받은 작가—시보다 서화와 도자」, 『현대문학』 1968년 8월호, 48쪽.
6) 김동리, 「草笛의 악보」, 민중일보 1947년 8월 20일자.
7) 초정은 『芽』라는 동인지에 「무궁화」라는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를 발표했다고 회 고한 바 있고(이청, 「시인 김상옥, 생애를 건 ‘한국의 미’ 탐험」, 『그 뜨겁고 아픈 경치』, 초정기 념사업회, 고요아침, 2005, 274쪽), 초정의 연보에는 『아』에 「무궁화」를 발표한 시점을 초정의 나이 17세 때인 1936년으로 기록하고 있다(「연보」, 『김상옥 시전집』, 창비, 2005, 651쪽). 그러 나 동인지 『아』는 1938년 7월에 창간되어 같은 해 9월에 제2호로 종간되었다. 그러므로 『아』 에 「무궁화」가 실렸다면 그 게재 시기는 1938년으로 판단되나, 『芽』의 전모가 학계에 공개된 적이 없으므로 실제로 『芽』에 『무궁화』가 실렸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8) 이청, 「시인 김상옥, 생애를 건 ‘한국의 미’ 탐험」, 『월간조선』, 1996년 6월호.(초정기념사업 회, 『그 뜨겁고 아픈 경치』, 고요아침, 2005, 274쪽)
9) 김상옥, 「3·1절」, 『석류꽃』, 현대사, 1952. 90쪽.
10) 김상옥, 「골동품 수집」, 『현대문학』 1969년 12월호, 314쪽.
11) 1947년에 간행된 초정의 첫 시집 『초적』의 제3부에는 「청자부」, 「백자부」 등 우리 문화재 나 우리 고유문화를 소재로 한 13편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 는데, 전체 수록 작품 40편 가운 데 거의 1/3에 해당한다. 『초적』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해방 전에 창작된 것이나 일제 의 한글 말살 정책으로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해방 후에 간행된 『초적』을 통하여 빛 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1939년 『문장』에 실린 「봉선화」, 같은 해 동아일보에 당선된 「낙엽」 등과 내용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작품의 창작 시 기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초정 자신도 그 창작 시기를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 확실 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회고의 내용이 상호 모순되기도 한다. 인용한 글에서 도 초정은 「청자부」, 「백자부」 등의 창작 시기를 10대 소년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다, 글을 쓰던 시점인 1968년을 기준으로 하여 “30년을 훨씬 넘는 옛날”에 지었다고 했으므로 10대 소년 시절에 지은 것이 맞다. 그러나 인용문에 등장하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이 1940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20대 초반에 지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 다. 일제의 동화정책은 그들이 대동아공영권을 외치기 이전에도 계속되어온 현상이므로, 착 각하고 썼을 가능성도 있다
12) 김상옥, 『초적』, 수향서관, 1947.
13) 초정의 첫 시집 『초적』은 1947년 4월 15일 간행되었다. 그러나 초정이 『초적』의 발문을 쓴 것은 병술년(1946년) 봄이었고, 가람 이병기가 『초적』의 서문을 쓴 것은 1946년 3월 7일이 었다. 그러고 보면 『초적』은 원래 1946년에 간행할 예정이었으나 1년 정도 미루어진 것으 로 판단된다.
14) 이러한 술회를 초정으로부터 두어 번 들은 적이 있는데, 김보한도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김보한, 『초정 김상옥의 삶과 문학에 나타난 ‘백자예술’ 세계 연구』, 통영문인협회, 2020, 7쪽). 한편 초정은 평소 “나는 독립투사도 애국지사도 아니었다. 이 땅의 젊은이로서 시대 의 아픔을 함께했을 뿐이다.”(김상옥, 「초정 김상옥 선생과의 반세기」, 『그 뜨겁고 아픈 경 치』, 고요아침, 1995, 225쪽)라고 말하기도 했다. 필자가 초정에게 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 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도 같은 요지로 대답을 한 적이 있다.
15) 지면의 한계로 인하여 이 자리에서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부당한 정치 권력과 문 단 권력에 대응하는 초정의 해방 후의 삶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초정의 해방 후 의 삶에 대해서는 지면을 달리하여 서술할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6) 시선집 『향기 남은 가을』에 수록된 103편의 최초 수록 시집을 조사해 보면 『초적』 12편, 『衣裳』 1편, 『木石의 노래』 2편, 『삼행시』 26편, 『묵을 갈다 가』 20편이다. 따라서 『향기 남 은 가을』에 최초로 수록된 신작이 103편 가운데 42편이나 된다. 시선집 『느티나무의 말』에 수록된 74편의 최초 수록 시집을 조사해보면 『삼행시』 12편, 『묵을 갈다가』 5편, 『향기 남 은 가을』 20편이다. 따라서 『느티나무의 말』에 처음 수록된 신작이 74편 가운데 절반에 해 당되는 37편이나 된다.
17) 김승욱, 「古稀 기념 시화집 낸 김상옥 씨」, 동아일보, 1989년 5월 4일자. 여기서 말하는 고 희 기념 시화집은 1989년에 간행된 『향기 남은 가을』이다.
18) 『느티나무의 말』이 간행된 뒤에도 초정의 시선집이 세 권 더 간행되었다. 그러나 별세한 후 에 간행된 『김상옥시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과 『백 자부』(시인생각, 2013)는 물론이 고, 별세하기 전에 간행된 『촉촉한 눈길』(태학사, 2001)도 출판사의 기획에 따른 시리즈 형 식의 간행물이기 때문에 초정의 생각이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초정의 생각이 제대로 반영된 마지막 시선집은 『느티나무의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19) 김상옥, 『느티나무의 말』, 상서각, 1998. 이 시집의 표지 사진 밑에 이런 내용이 서술되어 있음.
20) 「느티나무의 말」처럼 시조의 형식을 의식하고 쓴 것이지만 시조의 형식에서 크게 일탈된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갈래별 작품 수가 약간 달라질 수도 있다. 여기서는 일단 이런 작품들을 시조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21)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이종문, 「초정의 작가 정신, 완벽 을 향한 그 뜨거운 몸부림」, 『오늘의 시조』 2021년 하반기호.
22) 김상옥,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44쪽.
23) 김상옥, 「느티나무의 말』, 상서각, 1998, 105쪽.
24) 김상옥,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108-109쪽.
25) 김상옥, 「느티나무의 말』, 상서각, 1998, 54쪽.
26) 김상옥, 『묵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29쪽.
27) 김상옥,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82쪽.
28) 그렇다고 하여 초정의 개작이 모두 자유시를 단시조로 바꾸는 형태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귀여운 채귀」, 「안개」, 「가지 않는 시계」의 경우처럼 산문시를 사설시조 형태로 개작하는 가 하면, 「關係」처럼 산문시를 사설시조 2편으로 개작하기도 했고, 「早春-聖少年 말세리노」 처럼 상당한 분량의 자유시를 단시조인 「고아 말세리노1」과 「고아 말세리노2」로 분리하여 2편의 시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착한 魔法」, 「밤비 소리」처럼 두 수의 연시조를 단시조로 개작하기도 했고, 「꿈의 蓮못」처럼 두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를 분리하여 두 편의 단시조를 만들기도 했다. 「슬기로운 꽃나무」처럼 상당한 분량의 사설시조의 시어를 여기저기서 채록 하여 「還生」이라는 새로운 단시조를 만들기도 했다. 「빈 궤짝」처럼 극히 이례적으로 단시조 를 산문시로 개작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초정은 전반적으로 산문시를 포함한 자유시를 사설시조나 단시조로 개작하는 한편 연시조를 단시조로 개작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시 선집인 『느티나무의 말』에 거의 대부분 단시조만 수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초정 시의 전체 적 운동 방향이 결국 단시조를 향해 귀착되고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29) 김상옥, 『초적』, 수향서원, 1947.
30) 김상옥, 「느티나무의 말』, 상서각, 1998, 42쪽.
31) 김상옥, 「詩와 長生文甁」, 『시와 도자』, 아자방, 1975, 197-201쪽 참조.
32) 실제로 초정이 10대 소년기에 지은 「백자부」, 「청자부」 같은 작품의 소재가 되는 도자기에 는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후기로 올수록 그림이 없는 달항아리 같은 단순 백자 를 소재로 삼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33) 김상옥, 『느티나무의 말』, 상서각, 1998, 8쪽. 이 글귀는 『느티나무의 말』의 序詩인 「祭器」 앞면 여백에 수록되어 있는데, 心然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사실상 초정의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34) 김상옥, 「제기」, 『느티나무의 말』, 상서각, 1998, 9쪽.
35) 드노다’ 같은 생경한 신조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2·3·4수의 마지막 음보를 고 전적 격조가 느껴지는 의고투의 영탄형으로 마무리한 데서도 어떤 의도성이 느껴진다.
36) 예컨대 “찬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라는 구절에서는 겨울에도 푸른 소나무를 통 해서 드높은 절개를 드러내놓고 강조하고 있고, “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라 는 구절에서는 바로 그 순박함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삶에 대하여 은연중에 각성의 일침을 놓고 있다.
37) 김상옥, 「가을 그림자」,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26쪽.
38) 초정은 이조 백자의 단순미에 대해서 “단조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단조로운 것이지만, 단 순하다는 것은 모든 군더더기를, 아니 모든 설명적인 요소를 다 제거한 뒤에 얻어낼 수 있 는 ‘省略의 美’다”라고 말한 바 있다.(김상옥, 「시와 도자」, 『시와 도자』. 아자방, 1975, 58 쪽 참조.
39) 초정의 마지막 시선집인 『느티나무의 말』에 수록된 작품들이 지닌 이와 같은 특징에 대해 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하게 논한 바 있다. 이종문, 「초정의 시세계, 그 無味의 미학과 存在에 대한 사랑」, 『대구시조』 2집, 대구시조 시인협회, 1998.
40) 초정의 다음과 같은 글도 같은 맥락에서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자극적이고 격정적인 요즈음엔 뜻밖에도 ‘평범’이란 그야말로 하나의 평범한 어휘에 새삼스레 무한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 / 사실 웬만한 천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 식하고 비범하기란 쉬워도 의식하고 평범해질 수 있는 일이란 진실로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 / 동양의 바이블이라는 『論語』 첫 章 學而篇에 보면 “때로 배우고 익히면 얼마나 즐 거우랴. 벗이 있어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얼마나 반가우랴.” 하였다. / 얼핏 읽어보면 그저 맹물같이 심심하고 無味한 말씀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심심하고 무미한’ 말, 이 지극히 평 범한 말씀은 어떠한 ‘비범’보다도 오히려 上座에 앉아야 할 그런 ‘평범’인 것이다(김상옥, 「이달의 화제-平凡에의 魅力」, 『현대문학』, 1967년 5월호, 51쪽)
41) 김상옥, 「골동품 수집」, 『현대문학』 1969년 12월호, 314쪽.
이종문
시조시인. 계명대 명예교수.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이영도문학상 수상. 시조집『봄날도 환한 봄날』『정말 꿈틀, 하지 뭐니』『묵값은 내가 낼게』『그때가 생각나서 웃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