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모월 모일. 내내 흐리다 비 옴
벨라뎃다 자매 연락을 받고 ㅇ ㅇ 성모병원에 간 것은 축복이었다. 벨라뎃다 자매는 병원에서 오랫동안 환우들을 상대로 교리 봉사를 하고 있었다고 밝히며 퍽으나 쑥스러워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참 고운 분임에 틀림없다.
오후 4시, 병원 성당은 자그마했다. 한 수무 명은 들어갈 수 있으려나. 꽃병에 한 아름 들꽃이 꽂혀 있어 아늑한 성당 안을 화사한 분위기로 살아 움직이게 한다. 곧 이어 가지게 될 세례식의 축제 분위기에 썩 어울린다.
링거병을 매단 움직이는 봉을 밀면서 성당 안으로 들어서는 오늘의 주인공이 환한 미소를 띠고 축하객을 둘러본다. 자기를 축하해 주러 온 손님이 들어찬 것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 완연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흐뭇해하는 모습조차 안쓰러워 보인다.
환자복을 입은 두 명의 환우가 오늘 세례성사를 받는 주인공이다.
아녜스와 세실리아, 두 사람 다 백혈병과 자궁암이라는 중증의 암환자이다. 약물 투여 중이라 무척 힘든 시기인데도 화사한 미소를 띄고 축하해 주려고 온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아녜스는 빡빡민 민머리여서 더욱 얼굴이 파리해 보이지만.
'보살님이 의젓하시네' 하고 내가 벨라뎃다한테 속삭여 준다. 세실리아는 단말머리가 수수해 보이는 약간 퉁퉁한 체격으로 겉으로야 건강해보이지만 삼 개월을 넘기기 힘든다네.
어쨌건 두 분의 대모님이 하얀 미사포와 성물꾸러미를 들고 자리했고 병원의 자원봉사자들이 연 주황색 가운을 입은 채 자리했다. 역시 환자복을 입은 같은 병실의 동료 환우가 두어 사람, 수녀님 세 분, 유니폼이 각각인 간병사들과 환우 교리봉사자들이 자리한 아주 단출한 세례식이 시작되었다.
원목 베드로 신부님이 아주 밝은 얼굴로 세례식을 진행한다. 아마도 쓸쓸한 세례식이 되어 새영세자의 마음을 다칠까 염려하는지 내내 웃음을 띠고 말씀도 단단히 준비한 듯 재미난 이야기로 분위기를 띄운다. 각본을 짠 것처럼 우리도 웃음을 터뜨리며 화답한다.
"오늘 세례를 받는 아녜스와 세실리아 자매님은 패션 감각이 탁월한 거 같아요. 게다가 아네스님은 머리까지 민걸 보니 이게 첨단 유행인가 봐요? 어때요 멋지지 않나요?"
우리의 웃음과 박수를 유도하면서 세례는 진행 된다.
"아네스와 세실리아는 대답하세요.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게 힘을 주어 대답하는 장면에서 옆자리에 앉은 모니카의 뺨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흐른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가진 채 숨죽이며 살아온 환자의 모습은 어디 간 듯 영세자는 참 의젓했다.
"앞으로도 그들을 도와주기로 결심하셨습니까?" "도와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모님 둘은 아주 자그마한 체격으로 연세가 지긋해 보인다. 두 분 다 병원 간병사로서 아녜스와 세실리아에게 세례를 받기를 권유하였단다. 성당에 다니길 꾸준하게 권유한 덕에 벨라뎃다와 연결되어서 교리를 받고 세례성사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참 대견한 분들임에 틀림없다. 선교 일선에서 꾸준하게 하느님 사랑을 전하는 분들은 이렇게 세속적인 삶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일까? 그래서 그분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병원에서 간병사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고될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도 몸과 시간을 아껴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헌신을 보노라면 주님의 사랑은 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역시 주님의 가장 가까운 벗은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암환자는 그렇단다. 입원을 하여 약물 투여를 한 주간 또는 두 주간에 걸쳐서 받고는 퇴원한다. 그 동안 약물 투여로 상해진 몸을 집에서 다스리기를 두 주간하고서 원기를 차리면 다시 입원하여 약물 치료를 받게 된다. 또 퇴원하고 입원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는 것이 대개의 암환자들의 치료 과정이란다.
병원에서 환우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는 동안에 병원 자원봉사자든가 간병사들, 또는 병실을 다니며 영적인 상담을 해주는 수녀님을 통해 신앙에 귀의하기로 결심한 환우는 원목실에서 교리 봉사자한테 연결해 준다. 자원봉사자인 교리 봉사자가 병실에서든가 병원 복도, 또는 성당에서 주님 이야기와 성서, 성사 편을 가르치는 데 환자는 한 번에 대개 20분을 넘기지 못한다. 약물 투여 중이라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한 환우들은 20분이 넘게 주의를 집중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맞춤 교리라고 할까. 그렇다, 철저한 맞춤식 교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병원에서 교리 공부다.
사람이란 병에 걸리면 마음도 위축되어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약한 모습을 가지기 때문에 병원에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보람도 크다.
그러나 병원에서 교리를 한다고 다 세례식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원목신부님은 신앙생활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와 연결되어야 쉽게 냉담에 빠지지 않는다고, 가능하면 본당 꾸리아나 구역으로 연결해서 본당에서 세례를 받도록 애를 쓴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건강하게 퇴원할 수 없는 중증 환우에게는 병원에서 세례를 주기도 한다. 더욱이 아녜스와 세실리아처럼 돌봐 주는 가족이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당신이 직접 세례를 주신다.
왜 가족이 없을까? 남편은? 병원에서 봉사를 하다가 보면 이외로 가족과 단절된 환우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단다.
아녜스는 일찍이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둘이나 되는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느라 혼기를 놓친 혼자 몸이란다. 그럼 동생은? 하겠지만 동생 하나는 아주 똑똑하여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는데도 어머니를 돌보기는커녕 가족을 외면한다네. 평생 동생을 위해 헌신해온 보람도 없이 중병에 걸린 아녜스는 한동안 자포자기를 하고 퍽 힘들어했단다.
그럼 세실리아는? 세실리아는 물론 남편이 있단다. 그러나 오랫동안 암치료에 매달리느라 집안 살림은 거덜이 났고 그나마 치료를 받기 위해 이혼을 했다. 이혼을 하면 여자들은 대게 기초생활 보호자가 되어 병원비가 거의 들지 않는단다. 큰 병원의 중병환자들을 조사해보면 이혼한 기초생활 보호대상자가 이외로 많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에 목이 매인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벨라뎃다의 말을 듣다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 여기에 또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몇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두 사람을 잘 다독여가며 오늘에 이르게 한 벨라뎃다 자매는 쉼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앉아 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본당에서도 벌써 몇 해째 예비자 교리 봉사를 하고 있는 벨라뎃다가 내보낸 새영세자가 한 두 명이었을까. 그러나 병원에서 챙겨온 환우가 가지는 세례식은 남다른가 보다. 남 몰래 애틋한 정을 가지고 환우를 챙겨서 오늘에 이르게 한 벨라뎃다가 참 대견해 보인다.
아녜스와 세실리아가 세례식이 끝나고 받은 축하 꽃다발이 낯설어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기뻤을까. 평생 남에게 꽃다발을 받아보기라도 했을까? 세상에서 열리는 축제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을테지만 오늘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네스와 세실리아가 주인공이 아닌가? 내가 그랬다. 입이 귀 잡으러 간다고.
사진을 찍는데 신부님은 큰 동작으로 팔을 한껏 벌려서 새로이 태어난 새영세자를 껴안고서 파안대소를 하고 있다. 성물과 성경 선물을 받으면서 내내 즐거워하는 새영세자를 지켜보다가 나왔다. 평생 전장터를 누비던 내가 무장답지 못하게 눈가로 자꾸 손수건이 갈 게 뭐람.
왜 날 불렀을까? 아마 쓸쓸해 할까봐 자리라도 채워주었으면 했겠지 벨라뎃다가. 참 벨라뎃다와 나는 본당에서 예비자 교리 봉사를 한지 십여 년이 되었을 정도로 우정이 남달랐으니.
원목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수녀님이 들어오시면서 "세례식 때 뒤편에 혼자 앉아 있던 남자가 내내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수녀님, 그 남자 지금은?" "사진 찍을 때 보니 어느새 없던 걸요" 수녀님은 휭하니 나가고 벨라뎃다와 나는 식어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봤었다. 내가 눈물 닦는 거 벨라뎃다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성당 입구 쪽에 홀로 앉아 있던 입성이 남루해 보였던 그 남자를. 수녀님도 벨라뎃다도 나도 굳이 그 남자가 누구일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고 정체를 알아버릴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비가 오는 외로운 섬. 강변 쪽으로 난 길을 홀로 걸어가면서 우리의 인생은 왜 이리 싸아~한지, 나도 울고 하얀 억새도 바람에 날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오소서 주여, 너무 멀리 계시지 마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