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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역사' 시리즈 가운데 마지막 편으로써, 책의 부제는 ‘근대 세계의 악마’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메피스토펠레스>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를 지칭하는데, 괴테 이전의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내용을 다룬 작품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 작품들 역시 독일에서 전래되던 민간전승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되었는데, 그 이야기들에서 인간에게 젊음을 주고 영혼을 사는 존재로서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 제목으로 보건대, 저자는 서양사에서 종교개혁 이후 현재까지를 대표하는 악마의 전형으로 메피스토펠레스를 내세우고 있다고 하겠다.
유럽의 역사에서 종교개혁 이후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이념으로서의 종교적 권위는 이전 시기에 비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서양에서 기독교가 지니는 문화적 위치는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다양한 사상들이 합리주의를 내세운 철학적 사조들로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이념들을 잠식해가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존재 또한 비기독교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 근대 이후의 악마는 배제나 타기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누군가에게 숭배받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 축구 대표팀의 응원단을 ‘붉은 악마’라고 지칭하며, 이밖에도 악마를 숭배하는 문화는 다양하게 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도 ‘악’이라는 항목에서 어린 딸을 잔인하게 살해한 부모에 관한 기사를 다루면서, 악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악마’라는 인격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금 지구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전쟁과 인종간의 갈등, 그리고 종교를 둘러싼 대립 등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한꺼번에 지구 전체를 폭파하고도 남을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를 활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한동안 몇몇 나라들을 ‘악의 축’이라고 명명하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미국의 명분은 과연 선한 것이었을까?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대체로 그 명분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이해관계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신교와 구교 사이의 신학적 견해가 초래되었고, 점차적으로 비기독교적이고 세속적인 견해가 오히려 더 견고한 위치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른바 르네상스라고 지칭되는 인문주의의 발흥은 기존의 기독교적 절대적 이념에 회의를 불어넣고, 기존의 권력들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 한하는 종교의 힘을 빌어 ‘마녀사냥’이라는 광풍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근대의 문학 작품에서는 기존에 배제되고 터부시되던 사탄 혹은 악마적인 캐릭터에 며력적인 요소를 부여하고, 때로는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의 ‘위선과 맞서 싸우는 개인주의자인 악마는 성인이나 순교자로 추앙받’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다. 블레이크를 비롯한 낭만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이러한 경향은 현저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괴테의 <파우스트>나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에서 이들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게 되었다.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악마는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라기보다 문학 작품에 다양한 의미를 지닌 존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선과 악’의 문제를 도덕적인 평가의 대상이 아닌, 이전보다 모호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그래서 저자는 ‘악마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 사람의 세계관에 달려있다.’라고 강조한다.
이제 ‘신은 악마만큼이나 비과학적인 개념’으로 치부되고 있기에,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며 ‘군비 경쟁’에 몰두하는 강대국들의 행태를 결코 바람직하다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악마라는 존재의 실재성을 따지기보다,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긍정뿐이고, 악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선뿐이며, 사랑만이 증오를 제압한다’는 관점을 지니면서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저자 역시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악마는 그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든 결여된 비실재이며, 부정된 부정이며, 사랑의 빛으로 어둠 속을 환히 비추는 은하계의 의미 그 속으로 파열된 무의미’라고 단언한다. ‘더 큰 악을 가지고 악에 대응할 수는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관점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면, 대립과 갈등이 아닌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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