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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유토피아(Utopia)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를 일컬으며, 흔히 이상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라는 소설 제목에서 유래했으며, 그리스어에서 ‘없다’라는 ‘우’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가 합쳐진 단어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이와 대립되는 단어로 부정적인 부분이 극단적으로 확대되어 초래될지도 모르는 사회를 뜻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단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유토피아’가 지금의 부정적인 상황과 대비되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그러한 사회가 도래한다 한들 과연 인간이 상상한 것처럼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으로 그려낸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 다름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한 이 책의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평소에 관심이 있던 주제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역자의 서문에 <걱정 마, 달링>이라는 영화를 소개하면서, 영화적 상상으로 그려낸 ‘중산층 가정의 유토피아’가 관객들에게 ‘무척 낯익으면서도 기묘하게 낯선 느낌’을 주는 이유를 서술하고 있다.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영화의 배경은 누군가 경험한 부정적인 현실을 기반으로 그와 반대되는 가정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분법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현상을 정반대로 바꾸면 긍정적 상황에 나타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동양에서는 도연명의 ‘도화원(桃花源)’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어부가 복사꽃잎이 흐르는 강을 거슬러 우연히 방문했던 이상향을 다시 발견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다시 발견할 수 없었다’는 설정은 단지 누군가의 상상으로 그려낸 세계이기에, 그것이 현실에서 재현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부정적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딱히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따라서 ‘현실의 부정’으로서 기획된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재현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상과는 다른 또 다른 ‘부정적 현상’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자만 그러한 상황을 상상하는 이에게만 이상향으로 다가오고,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최악의 현실인 ‘디스토피아’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30년대 독일의 나치즘이 당시 히틀러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기획이었으나, 그로 인해 파생된 학살과 전쟁은 인류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유토피아’로 그려진 세상이 다른 이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경비원을 두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도심의 대형 평수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유토피아’로 인식하겠지만, 그곳에 쉽게 출입할 수 없는 ‘외부인’들에게는 그저 ‘위화감’을 조성하는 장소로 인식될 것이라고 하겠다.
이 책에는 모두 9명의 저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 관한 생각들을 풀어내고 잇다고 할 것이다. 예컨대 프로이트에게는 현실을 반영하는 대상으로서 ‘꿈’을 해석하는 것으로 발현되고, 문학 작품 혹은 영화에서는 이상적인 세계로서 형상화되기도 한다. 플리톤의 ‘이데아’나 마르크스의 ‘공산사회’ 역시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관념이기에 그것이 철학적으로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현실에서 재현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종교’ 역시 힘겨운 현실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관념으로서의 ‘유토피아’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정신분석이론은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지치지 않는 열망에서 우리가 속한 이 불가피한 상징계를 뚫고 나갈 해방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역자의 서문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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