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자갈밭에 자갈들이
배를 드러내놓고 누워있더라
높아가는 물소리에
귀 열고 뒤집어주길 기다리더라
물새들이 싸는 물똥을
오욕을 견디며
생각해보라 자갈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슬픔도 그렇다 슬픔이 제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가
손닿지 않는 어둠
하염없는 물소리
스스로 몸 뒤집지 못하는 것들
팔월 대낮에
흰 시간의 뼈를 말리고 있더라
붓꽃
찌그러진 세숫대야와 비누토막조차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때
버림받은 것은 버려져서
황홀한 외로움
문패 떼어낸 적요의 페이지에
붓꽃은 붓꽃이어서
다만 기록할 수밖에 없으니
하루하루 빼낸 날짜들 헛간에 쌓아두었던
구멍 숭숭 뚫린 검은 얼굴
줄어들며 남긴 검은 눈금에 기대
끼적거리노니
몽당빗자루 같은 이 몇 줄의 시를
족보에
빈 페이지밖에 없는 족보에
<대표시>
달의 뒤편
등 긁을 때 아무리 용써도 손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어’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
노래의 눈썹
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간 새의 자취, 쫓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나간다
밤에도 새들은
캄캄한 밤, 개울에 새들이 돌멩이처럼 앉아 있다 오리는 물 위에 백로는 물 아래
발 담그고, 가만히 물소리 듣고 있다
이 늦은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새들이 물속에 앉아 있는 이유가 단지 먹이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젊은 남편을 묻고 돌아온 날 몸에서 새어나오는 피 때문에
더 서러웠다는 사람처럼 우리에겐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어서
어둠에 몸 섞이고 있는 새들
높아가는 물소리에도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새들
무서운 새들 그리고
돌멩이
장옥관 시인
·1987년 계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달진문학상, 일연문학상, 노작문학상, 김종삼시문학상, 이용악문학상 등 수상
·전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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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비추는 눈, 검은 눈금
-장옥관의 최근 시를 읽고
김나영 평론가
거의 4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을 지닌 시인의 눈은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게 아니다. 그 눈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본다. 가령 달빛 외에는 어떤 조명장치도 없을 것만 같은 한밤의 물가에서 그 눈은 고요히 떠(서) 정지해 있는 새를 본다. 새는 물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헤엄치고 있으나 물 밖의 어둠과 고요 속에서 그것은 거의 돌멩이와 흡사해 보인다.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물이고 어둠이고 그리하여 유구한 시간이며, 부동하는 것은 새와 돌처럼 보이지만 시인의 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연유를 지닌 낱개의 존재성을 포착한다. 다시 말해 그의 눈에 물가에 놓인 돌멩이들은 그저 수동적인 무명의 대상이 아니라 “물새들이 싸는 물똥을/ 오욕을 견디며”(「자갈밭에 자갈들이」) 어떤 지극한 견딤으로, 그 속내를 쉽게 알 수 없을 자발성으로 거기에 있음을 본다.
캄캄한 밤, 개울에 새들이 돌멩이처럼 앉아 있다 오리는 물 위에 백로는 물 아래
발 담그고, 가만히 물 소리 듣고 있다
이 늦은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새들이 물 속에 앉아 있는 이유가 단지 먹이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중략)
어둠에 몸 섞이고 있는 새들
높아가는 물소리에도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새들
무서운 새들 그리고
돌멩이
-「밤에도 새들은」 부분
얼핏 평범해 보이는 하나의 장면을 공들여서 그리는 장옥관의 시 앞에서 우리는 잠시 “캄캄한 밤”, 속수무책으로 들려오는 “물소리”에 휩쓸리는 자신을 애써 지키며 “앉아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처지였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이 늦은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있었던 바로 그 이유, 무엇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그런 연유를 그의 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어서”라고 쓴다. 거기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를 엄습하는 거대한 시간성에 저항하기 위해 겉으로 보았을 때는 거의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가장 절박하게 살아내고 있었던 어떤 순간을, ‘알 수 없는 이유’를 속단하거나 함부로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해보는 것이다.
장옥관의 시에 작은 새와 돌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일까. 새는 알에서 깨어나와, 돌멩이는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거기에 있다. 이 잠시의 사소한 포착에 우주적인 포용이 깃들어 있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언제나 알 수 없지만, 바로 그 알 수 없음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캄캄한 밤 우리의 시야에는 흐르는 물소리 가운데 겨우 무엇의 일부가 드문드문 놓여 있지만, 자신의 전 생애를 비추어 그 부분들을 통합해보는 유심함 내지는 간곡한 태도로써 유구한 어둠과 물과 누군가의 간곡한 심정이 일체가 되어 인간 보편의 심상을 알게 된다.
오래전부터 장옥관의 시에서 개별적 존재는 온몸으로 자신이 ‘거기에 있음’을 감각해왔다. 또한 그러한 사정에 관해서는 거의 전우주적인 인과를 담아내는 장면으로 포착한다. 달리 말해 그의 시에서 시간성은 주로 현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그 현재는 현재 외의 시간에 대한 사유와 감각으로부터 결정된다. 그럼에도 그 시의 장면들은 그 무엇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단지 그 자체로 주목될 사건이며, 이전과 이후를 해명하고 예측하는 일은 ‘지금 여기 있음’을 말하는 데 소용되지 않는 사실을 공들여 그린다. 때문일까. 장옥관의 시를 읽으면 자신의 숨에만 집중하며 극도로 고요한 상태를 지향하는 명상의 시간에 도달하게 되는 것만 같다. 고요히 팽창하고 수축하며 나를 잊음으로써 비로소 드넓은 미지 가운데 나로 존재하는 일 말이다.
오키나와 해변에서 흰 빛 하나를 주웠다 도무지 하양이라 부를 수 없는 하양이었다
당신은 이게 바다의 뼈라고 일러주었다
일렁이는 거품이 굳어 생긴 것이라 했다
눈물이 끓어 굳은 것이라
했다 그 열대의 빛에 눈먼 나는 감정도 때론 만질 수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하지만 그 빛 아래선 무엇이든 다 휘발된다는 걸
밝을수록 더 어둡다는 걸
물이 얼마나 딱딱한지 위험한지 찔려본 사람만 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당신 떠나고
사탕수수 이파리 검은 물 아래
축축하고 어두운 골짜기
헤매던 짐승이 흰 뼈 하나로 여기 누웠는가 싶었다
눈부신 시간의 뼈
일렁대며
생멸, 생멸,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흰 빛 하나」 전문
최근의 시집(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에 수록된 이 시는 장옥관 시의 척추를 감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축축하고 어둡게 일렁이는 감정이 있고 희고 눈부시게 굳어버린 감정이 또 있다. “검은 물”과 “흰 뼈”의 선후 내지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어떤 감정이 분명한 원인으로 발생했다고 해명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하듯이 말이다. 장옥관 시의 화자는 지침 없이 운동하는 것(파도)과 정지된 시간을 증명하는 것(뼈)이 궁극에서는 만나고, 그 경계에서는 둘의 속성을 뒤바꿔 볼 수도 있게 된다는 경험을 말한다. 이러한 경험은 누구나에게 있을 것이다. 말하기 어렵지만 생과 멸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맞붙어 있다는 것을 체감한 시간은 모두에게 있다. 어제 다정했던 이가 오늘 떠나버리고, 그 관계의 빛과 온기를 되새길수록 남은 처지는 어둡고 차갑게 느껴지던 일처럼. 비단 나와 당신이라 호명하며 다정함을 주고받던 관계의 생멸에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극단의 순간이 공존하는 것을 감각하는 일은 실상 우리 삶의 군데군데 딱딱하고 위험하게 놓여 별안간 우리를 찌른다. 장옥관의 시는 바로 그런 자리에서 쓰이고 지워진다. 어두운 물가를 “헤매던 짐승이 흰 뼈 하나로 여기 누웠는가 싶었다”는 각성의 순간, 무위(無爲)가 최대치의 행위가 되는 자리에서 그의 말이 생멸한다.
“생각해보라 자갈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자갈밭에 자갈들이」) 하고 묻는 목소리는 시인에게서 우리에게로 전달되지만 그 전달에 소용된 무수한 때와 자리를 지워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갈들’의 처지를 보았고 그 봄은 어느 지면이 밭인 듯 자갈과 자갈이라는 말을 뿌려두게 했고 자갈을 둘러싼 시인과 우리들 각자 저마다 흩어져 있었을 시선들이 한 편의 시라는 하나의 순간으로 피어나게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옥관의 시가 돌멩이처럼 덩어리진 시간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어쩌면 태초에 있었을 생명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을 그것, 열과 힘을 감내하며 숱한 순간을 견뎠을 몸,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가장 크고 오랜 움직임을 자체에 내장한 그 돌멩이들.
한편으로는 돌멩이를 보면서 어떤 기다림과 남겨짐에 관해 쓰는 것은 구태와 의연을 감내하는 일이어서 그렇게 쓰인 문장이 기다리고 남겨지는 일에 대해서 상상해보게도 된다. 바꿔 말해 흰 뼈를 드러내놓고 말리는 일, 가장 속에 있는 것을 가장 겉에 내놓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한 사람의 눈에 들어온 그 몸들에 깃든 시간을 통과해서 장옥관의 시가 그려 보이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감정이다. 수천 수만 년 알을 깨고 새가 태어나고 거대한 바위가 자갈이 되었을 고요하고도 유구한 흐름 속에서도 깨지거나 닳지 않은 게 있다면 아마도 가장 개별적이어서 가장 보편적인 슬픔 같은 게 아닐까. 모든 개별을 아우르는 보편, 차돌처럼 단단하게 응축되어 무겁게 모두의 내면에 박히고 가라앉아 있을 그것. 때로 장옥관 시는 슬픔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돌을 보는 게 아니라 돌을 보다가 슬퍼진 일에 대해서 쓰는 듯한데 그것은 아마도 진실로 그것의 자리에서, 돌이 되어 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천 년을 살아 온 돌의 슬픔이, 혹은 돌처럼 도처에 처연히 널린 무명의 슬픔들이 어둠과 물소리가 되어 시인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돋게 해서 비로소 슬픔이라 쓸 수 있는 감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 보편의 감정은 막연한 우주 속에 나를 홀로 있게 하여, 나로 하여금 나를 바로 보게 한다. 이 슬픔은 자신의 슬픔을 정확히 확인하게 한다. 때문에 이 슬픔은 “황홀한”(「붓꽃」) 것이다.
마침내 장옥관의 시에 주어 없는 문장이 쓰일 때, “구멍 숭숭 뚫린 검은 얼굴”은 그동안 우리가 시라고 불렀던 것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찌그러진 세숫대야, 비누토막, 몽당 빗자루가 자체에 기록한 검은 눈금들은 무엇보다 지금 여기를 조명하는 빛이 된다. 찌그러지고 토막나고 닳은 경계로써 현재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그 눈이 있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이 내심 든든하다. 그 시의 검은 글자들은 오래 선명한 눈금이 되어 거듭 또 다른 현재를 비출 것이다.
김나영 평론가
약력 :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졸업.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등단.
평론집 <말과 말 아닌 것>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