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교통로(交通路)
발해의 주요 교통로에는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일본도, 신라도의 5대간선 국도를 건설했다. 당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조공도, 당으로 가는 육로인 영주도 서쪽의 거란국으로 가는 거란도,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와 신라로 가는 신라도가 있었다.
1. 거란도(契丹道)
발해에서 서쪽 거란국으로 가는 육로이다. 부여국(농안)은 거란과 접경지역에 있어 거란국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부여를 통과해야갈 수 있었다. 발해의 상경에서 출발해 장광재 고개를 지나 국경의 부여부를 통과한 다음 천산산맥을 넘어 거란국의 수도인 임황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2. 영주도(營州道)
발해의 수도인 상경에서 당나라의 영주로 가는 육로다. 현재 중국 요녕성에 있는 모양을 당나라시대에는 영주로 불렀는데 이곳에는 발해국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당나라 조정을 대표하는 평로절도사(총독)가 주재했다. 발해국에 대한 당나라 왕의 명령이 영주의 평로절도사에게 전달되면 영주도를 통해 발해에 전달되거나 영주의 당나라 관리들이 발해로 들어갔다.
이 영주도는 당나라와 발해간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정치도로의 성격을 띠었다. 영주도는 상경에서 중경(현덕부)을 거처 현덕부의 중경(돈화)를 거처 화전·휘남·해남·신성(무순)·심양·흑산·북진을 통과해 영주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를 넘어 당나라 수도 장안(서안)으로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상과 같은 육로로 발해와 영주간을 오갔으나 거란과 돌궐족 때문에 영주도가 자주 차단되어 후기에 들어와서는 압록강을 거치는 해로인 조공도를 이용했다.
3. 조공도(朝貢道)
발해의 3경인 상경(용천부)·중경(현덕부)·동경(용원부)으로부터 압록강과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의 등주(연대 근방)로 상륙해 육로를 통해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으로 가는 길이다. 조공도는 육로와 해로를 거치게 되어 있는데 육로는 수도인 사영을 출발해 돈화·대포채화를 지나 무송을 거쳐 압록강의 임강진 근방에 있는 신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 다른 육로는 상경을 출발해 오아청가야 하류를 지나 연길·용정을 거쳐 중경 화룡의 서고성을 통과해 압록강 압록부의 서경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한 용원부의 동경(훈춘)에서 당나라로 가려면 두만강을 타고 남강산맥을 넘어 부르하통하를 따라 연길과 용정을 지나 현덕부의 중경을 거처 안도·대포채하·무송을 통과, 압록부의 서경으로 갔다. 서경에서 당으로 길 때는 뱃길을 이용했다. 서경(중강진 근처)에서 강선을 타고 압록강으로 내려가 환주(지금의 집안)를 거쳐 압록강어귀인 박장구로 나와 돛 달린 해선으로 갈아타고 요동반도 해안을 따라 오골강(애하) 어귀를 지나 석인왕(석성도)와 행화포·도화초(대련)·여순을 거친 다음 오해호(발해만)를 건너 산동반도 북쪽 연안의 대사도(묘도열도)를 지나 등주로 상륙한 후 육로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것이다. 이 해로는 발해 제일의 간선교통로였다.
조공도가 개통된 정확한 시기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발해 초기로 추정된다. 발해 5대 교통로 중 제일 먼저 개척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 건국이 당나라와 밀접한 정치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나라 앙의특사인 홍영경과 최흔이 발해로 파견되어 대조영을 발해의 왕으로 정식 책봉한 2년 후인 서기 714년, 이 두 사람이 발해에서 당나라로 귀국하던 길에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에 있던 황금산 기슭에다 조공도를 기념하는 우물 두 곳을 파고 조공도의 위치와 거리 그리고 경유지를 기록해 세운 비석이 후대에 와서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4. 신라도(新羅道)
발해의 4대 도시인 상경·동경·서경·중경에서 남경(함경도 부청근방)으로 가 신라로 들어가는 길이다. 발해에서 육로를 통해 신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남경을 통과해야 했다. 삼국사기와 당나라 사기인 고금군국지에는 ‘남경(부청 근방)은 니하(용훈강)를 경계로 신라와 접했고, 신라의 정천부(함남의 덕원)에서 책성부(훈춘)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5대 교통로를 만들면서 각 도로마다 일정한 간격에 역을 두고 오가는 관리와 사람들의 여행을 돕도록 역로 제도를 함께 시행했다. 신라도 중에 동경용원부가 있는 훈춘에서 발해의 남경 남해부와 접경하고 있는 신라의 접천부 덕원 사이 길에는 30회마다 1개 역씩 모두 39개 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두 도시를 연결하는 육로는 1천170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5. 일본도(日本道)
발해의 상경·중경·서경·남경에서 용원부의 동경(훈춘)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길인데 이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 두 길을 지나야 했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용원부의 동경(훈춘)이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 발해 내륙의 어느 곳에서나 일본에 가기 위해 배를 타려면 필히 동경으로 가야 했는데, 발해 전기(698∼755)에는 발해 내륙에서 화룡과 연길을 통해 동경으로, 후기(755∼926)에는 수도인 상경(용천부)에서 왕청과 도문을 통해 동경으로 들어갔다.
동경에서 일본으로 가는 뱃길도 전·후기가 다르다. 발해 전기에는 동경에서 출발해 두만강을 타고 내려와 현재의 크라스키노인 모구위(염주)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 중부 연안의 후쿠이·이나이시가와로 상륙하는 직항로를 택했다. 그러나 이 직항로는 험한 편이어서 표류가 잦았다. 따라서 후기 때는 계절풍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쉬운 남행항로를 개척해 이용했다. 바로 훈춘에서 염주(크라그티노)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한반도 해안으로 내려와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난 후 일보의 북규슈에 도착하는 ‘규슈항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