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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鄭道傳을 위한 변명’ 독서 후기
친구(강종원 인형)는 새로운 책, 유익한 책이면 자기 일처럼 윤독을 권장하시는 분이다.
지난 목요일(9일) 늦은 오후, 좋은 책을 내 서재 우편함에 넣어 두겠다고 해서 고마움을 전했다. 다음 날 아침 전남대 체육관을 경유해서 가져올 요량이었는데, 친구의 열성을 무시한 것 같아 밤중에 책을 섭렵하고 바로 독서. 틈틈이 읽다보니 일요일 6시에 완독했다.
정도전의 새로운 세상은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 초기 제도 문물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심지어 한양 천도와 한양왕궁설계, 명나라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요동을 탈환하려는 국방 의지도 불태웠다.
그러나 이성계의 죽음과 이방원의 계략에 희생되어 인생이 멈추었다. 소위 진보와 보수의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서점의 서평을 중심으로 ‘정도전을 위한 변명’독서 후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나 만고역적의 대명사가 된 불우한 영웅
삼봉 정도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기록
1997년 초판 출간 당시 ‘정도전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대중의 관심과 더불어 정도전 재조명 열풍의 첫 신호탄을 쏘아올린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 17년 만에 독자들을 찾아왔다.
당시 《말》지 기자였던 저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세대교체를 이루는 데 주인공 역할을 한 혁명가 정도전에게 마음을 빼앗겨 3년간 그의 삶과 사상을 추적한 끝에 이 책을 출간했다.
탐사 기자 특유의 취재 능력을 바탕으로 정도전에 관한 수많은 사료와 연구 성과를 섭렵해 재구성해낸 이 책은 그간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료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정도전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봉 정도전, 그는 누구인가?
고려 말의 구습을 청산하고 이성계와 더불어 새로운 조선을 건국함으로써 정치적 세대교체를 이룬 주역이 바로 정도전이다.
선비인가 하면 정략가였고, 유교 이론가인가 하면 군사 지휘자였으며, 동북아 정세의 변화를 거시적 안목으로 읽어내고 새로운 유교사상을 받아들인 사상가이자 정치가이자 시대의 혁명가였다.
‘나라는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은 먹을 것이 하늘’이며, ‘정치란 무릇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민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나라 조선의 문물제도를 만들었으며,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도심의 기본을 설계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과 성 안의 동네 이름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시와 음악과 병법에도 능통했으며, 《불씨잡변》, 《경제문감》, 《조선경국전》과 같은 수많은 저술을 남긴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러나 태조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500년간 만고역적의 대명사로 낙인찍혀왔다.
그는 왜 역적의 누명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이 책은 정도전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을 집요하게 파고든 기록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대신해 역사의 진실을 들려준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 1398년 8월 26일, 정도전이 생을 마감한 날로부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토대로 이어지는 그의 삶의 기록에는 난세를 이끌어간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특히 저자의 날카로운 역사 해석과 비평은 고려 말부터 조선 개국의 숨 가쁜 역사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놓았을 뿐 아니라 정몽주, 최영, 이성계, 이방원 등 그동안 하나의 이미지로만 다가왔던 역사적 인물들을 정도전의 굴곡 많은 생애와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인물들로 거듭나게 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꿈을 꾸었기에 동지에서 적으로 서로의 운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속 깊은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책은 난세의 시대에 민본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꾸고 설계한 혁명가 정도전의 생애를 복원함으로써 오늘날의 정치는 무릇 어떠해야 하는지, 철인정치란 무릇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목차
1막 두 고려인
천민의 피
청백리 아버지의 유산 | 승려와 노비의 핏줄
개혁파 정치학교 ‘이색 학당’
영주 산골에서 개경의 명문 사학으로 | 개혁과 자주의 파도
또 하나의 인물,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의 탁월한 선택 | 체두변발 자르고 고려의 장수가 되다
2막 난세와 영웅
개혁당의 출현
난세를 구할 풍운아| 마음을 같이하는 동지들
신돈의 비극
공민왕은 왜 노비의 자식을 파격 발탁했는가 | 개혁가에서 요승으로
성균관, 개혁 주체의 양성소
철학과 역사, 과학과 예술을 넘나들다 | 개경의 벗들을 그리워하다 | 명륜당의 치열한 세미나
3막 군자의 길
선배 정몽주
선배이자 동지이자 그리운 벗 | 정치 교과서 《맹자》를 탐독하다
정치는 군자의 소명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 정치란 내가 먼저 하기를 게을리 않는 것
명리인이냐 군자사냐
인생무상, 정치무상 | 하루를 살아도 높고 높은 구름처럼
4막 탁류에는 발끝조차 담그지 않는다
거꾸로 가는 역사의 시곗바늘
개혁군주 공민왕의 비참한 말로 | 비극의 여인, 반야 | 개혁당 최초의 연대, 친원 반대투쟁
재야 10년
유배지에서 만난 민초들 | 농사꾼과 벗하다
새벽닭이 좀처럼 울지 않으니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 | 유배당한 자의 고독
5막 하늘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보라
민초가 나라의 주인이다
어느 농부와 나눈 대화 | 지혜로운 민, 허울뿐인 선비
왜 의로운 자는 곤궁하고 불의한 자는 부귀한가
과연 정의는 존재하는가 | 문제는 인간이다 | 지란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시절
유배에서 풀려나다 | 철거민과 농부의 삶으로 | 지음을 찾아서
6막 개혁가에서 혁명가로
역성혁명을 꿈꾸며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민초들과 만나며 정도전은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을 피부로 실감하고, 정치란 결국 벼슬아치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가슴 깊이 깨우쳤다. - 본문 129~130쪽
임금은 존귀한 존재지만 그보다 더 존귀한 것은 천하 민심이다. 천하 민심을 얻지 못하는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민심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오직 백성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민심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씨다. 한없는 포용으로 구석구석 미치는 자애의 마음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않는 도덕과 양심의 정치다. 정도전이 세우고자 했던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였다. - 본문 152쪽
당시에 전제개혁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정도전 외에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만큼 철저히 가난한 농민의 입장에 서서 개혁안을 만든 사람은 없었다. 정도전의 개혁안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해 나라 안의 모든 농민에게 식구 수대로 분배하는 이른바 ‘계민수전(計民受田)’ 방식으로 철저한 개혁을 지향했다. (중략) 나라 안의 모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정도전의 발상은 조선 후기 실학파에 와서야 본격화되는 토지 사상으로, 시대를 초월한 진보적 의의를 띠고 있다. 또한 모든 토지를 국가에 귀속한다는 발상 역시 오늘날의 토지공개념에 비견되는 진보적 토지 사상이다. - 본문 192~193쪽
정도전은 불교의 윤회설과 인과응보설에 대해서도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을 가했다. 유가의 합리적 관점에서 볼 때 불가의 윤회설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또한 상대적으로 합리주의를 추구하던 유교 지식인들이 불교에 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 공격하기 쉬운 약점도 없었을 것이다. - 본문 210쪽
백성들의 고초를 직접 목격하고 스스로 체험한 정도전으로서는 비합리적인 풍수설에 얽매여 천도를 서둘러서 민생고를 가중시키는 것은 정치가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략) 상당수의 중신이 풍수나 비기에 연연할 때 정도전은 그 비과학성을 지적하면서 인본주의와 합리적 이성을 추구한 군계일학의 인물이었다. - 본문 292쪽
정도전이 다른 정치가들과 다른 면모가 있다면, 이처럼 이상의 가치를 알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또한 정도전이 다른 지식인들과 다른 면모가 있다면, 이상을 추구하되 백성의 실용에 도움이 되는 바를 추구함으로써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데 주력했다는 점이다. (중략)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을 책임져야 하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품어야 한다.” - 본문 304쪽
저자 : 조유식
저자 조유식은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말》지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인터넷 서점 알라딘 대표로 있다.
“정도전은 나의 스승이자 선배이자 친구였다. 때로는 그가 품은 이상에 공감하며 가슴 뛰었고, 때로는 그의 눈물에 함께 가슴을 쳤으며, 때로는 그가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한 권모술수에 실망하여 책장을 덮기도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특권마저 불의가 정의를 대신해 가로챘던 불운의 시대에 태어나, 현실과의 싸움에서도 역사의 법정에서도 모두 패한 사람이 있다면, 후세에 누가 그의 진실을 알아줄 것인가.”(조유식)
鄭道傳 傳記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서 고려 말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고려말의 활동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고려사>와 <태조실록>에는 '禹延'이라고 기록되었으나, '禹淵'이라는 설도 있다)의 딸이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자,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지방 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1370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상박사가 되고, 이어 예의정랑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위해 오자, 이를 반대하고 관련되는 업무를 거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1377년 고향으로 옮겨져 4년간 머물다가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1383년 함주(咸州) 막사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세상사를 논하고 그와 인연을 맺었다.
1384년 전교부령으로 있을 때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諡號)를 청했다. 이듬해 성균좨주(成均祭主)·지제교를 지내고, 1387년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조준(趙浚)·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개혁을 추진했는데, 전국의 토지를 공가(公家)에 귀속시켜 민구(民口)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려는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와 의견이 달라 멀리하게 되었다. 1389년 11월 이성계·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忠義君)과 윤충논도좌명공신(輪忠論道佐命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으며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1390년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가 명을 치려한다고 모함한 것을 변명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가 되어 이성계·조준과 함께 병권을 장악했다. 이어 개혁반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일환으로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 옹립의 죄를 물어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그해 9월 평양윤에 임명되었으나 반대세력들이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봉화로 유배당하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이 되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아왔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충의군에 봉해졌다.
조선개국과 개혁정치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개국직후 17조목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0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1393년(태조 2) 7월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여진족을 회유했으며,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 자료로 삼게 했다. 1394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를 찬진했다. 한편 태조가 세자로 책봉한 강비 소생 방석(芳碩)의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그해 〈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 高麗國史〉를, 6월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부병제도·감사 등의 임무와 실례를 논하고 방침을 제시한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찬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공료(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 표전문(表箋文)을 트집 잡아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했다. 1397년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화(禍)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방원의 난).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유(游)가 살해되고, 담(湛)은 집에서 자살했다.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정도전의 개혁사상은 고려말 국가적인 시련과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양인(良人)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건설과 자주국가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례(周禮)를 기본모델로 하여 성리학 사상을 받아들였다. 고려말 사회의 모순은 인간 상호간 증오심의 격화, 즉 윤리의 타락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윤리의 재건이 필요하며, 윤리를 실현하는 수단이 정치이고, 그 전제조건이 경제의 안정이었다. 그는 상하(上下)·존비(尊卑)·귀천(貴賤)의 명분이 바로 서고, 인간마다 자기의 분을 지키면 사회 질서가 확립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하질서의 확립을 위한 윤리도덕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다. 이를 위한 사상질서로서 성리학만이 유일한 정학(正學)이고 실학(實學)이라는 신념으로 불교가 현실을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종교이며 농장주의 공리(功利)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사상체계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인류를 금수로 몰아넣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도덕윤리의 실현과정으로서 정치는 인간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정치의 주체로 윤리도덕을 체득한 자를 설정했다.
그러한 자격자가 성리학자인 사(士)로서, 진정한 사는 윤리·도덕가일 뿐만 아니라 성리철학자여야 하고 천문·의학·지리·복서(卜筮) 등 기술적인 학문에도 능통해야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고 역사가이며,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는 고정된 세습신분이 아니라 자질이 뛰어난 자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아서 사가 될 수 있으며, 농사를 겸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역설했다. 통치체제로 민의 보호를 위해 지방토호에 의한 자의적인 지배를 배제하고 중앙정부에 의한 전국적 지배를 강화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했으며, 그 중심은 군주였다.
군주는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전국의 토지와 민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재상중심체제를 지향했으며, 통치자의 부정·독재를 막기 위해 감찰권과 언권(言權)의 강화를 중시했다. 통치윤리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형벌은 보조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본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부국강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병농일치를 통한 국방체제의 강화와 중앙군의 증대를 통한 수도치안의 강화를 지향했다.
이러한 체제의 확립은 경제생활의 안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물질적 기초로서 국가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업생산이 진흥되어야 하고, 또한 토지소유관계가 재조정되어야 했다. 고려말 사회적 모순의 가장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극단적인 불평등에 있으므로 먼저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삼대(三代)의 공전제(公田制)에 이상을 둔 철저한 전제개혁을 통한 계민수전(計民授田)에 의한 자작농의 창출과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부세의 공정과 부담 완화를 강조했다. 부세는 1/10세를 기준으로 법정세율 이상의 수취를 배격하고, 균등한 부세수취를 위하여 호적제도의 정비와 군현제도의 정비, 수령의 엄격한 선발 등을 요구했다. 빈민구제를 위한 정책으로서 의창(義倉) 및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제도가 도입되어야 하며, 전쟁이나 흉년을 대비하기 위하여 최소한 3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저서로는 앞에 언급된 책들 외에 〈경제의론 經濟議論〉·〈감사요약 監司要約〉·〈팔진36변도보 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 五行陣出奇圖〉·〈강무도 講武圖〉·〈진법 陣法〉·〈진맥도결 診脈圖訣〉·〈태을72국도 太乙七十二局圖〉·〈상명태을제산법 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으나 전하는 것은 거의 없고, 문집인 〈삼봉집〉에 일부 내용이 남아 있다.
(20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