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愚山) 한유(韓愉)
樂民 장달수
산청군 단성면 백곡(栢谷) 마을은 원래 진주에 속해 있는데, 1914년 군면 통합 때 백곡면의 5개 동리가 산청군 단성면으로 편입되어 현재 호리, 당산리, 창촌리, 자양리, 백운리, 길리로 분리된 곳이다.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잣나무 마을답게 선비의 기풍이 배인 곳으로 옛날 남명선생의 제자 백곡(栢谷) 진극경(陳克敬)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지리산 남쪽에 위치한 백곡마을에 한말 단아한 선비가 살고 있으니, 바로 우산(愚山) 한유(韓愉)다. 우산의 학덕을 기리는 자양서당(紫陽書堂)을 찾아갔다. 산청군 단성면 칠정에서 백곡마을 방향으로 가니 옛 백곡 초등학교 자리에는 지리산 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서당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옛 서당 모습도 아니고 주위 민가에 둘러싸여 있어 마을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알기 힘들게 되어 있다. 자양서당에는 백운정사(白雲精舍)란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백운정사는 원래 단성군 백운리의 점촌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것으로 6·25 전쟁 이후에 소실되어 우산이 살았던 청주한씨의 세거지인 백곡마을로 옮기게 되어 현재의 자양서당이 되었다.
우산은 1868년 택동(擇東)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주 오현(五賢) 서원인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된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12세손이다. 조은은 남명선생의 제자인 황암 박제인(朴齊仁) 한강 정구(鄭逑)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관직을 멀리하고 은거하며 일생을 보낸 선비다. 이처럼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우산은 어려서부터 성품과 기상이 남달랐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 부모가 원하지 않으면 다시는 하지 않았으며, 총명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기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다. 마을의 선비들이 총명하다는 소문들 듣고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로부터 문장과 공업(功業)으로써 스스로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역사서에도 능통하여 지역 선비들이 탄복할 정도였으며, 일찍이 과거 준비를 하여 향시에는 뽑혔으나 대과에 오르지 못해 과거공부는 그만두고 성리학에 침잠하기 시작했다. 경서를 비롯한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으며 깨우치지 못하면 손에 놓지 않았으며, 심지어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한다. 일찍이 호남 기호학파의 대표 선비 노사 기정진의 문인인 월고 조성가가 우산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조카딸로 아내를 삼게 했다. 이로부터 우산은 월고에게서 학문의 방법을 배운다. 월고는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행장을 지을 정도로 호남 기호학맥의 정수를 계승한 선비였다. 우산에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기를 권했으며, 지행(知行)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월고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아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당시 기호학맥의 중심인물들인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 간재 전우 등을 따라 배웠다.
특히 간재 전우의 가르침은 각별했다. 간재는 우산의 뛰어난 자질을 늘 칭찬하였다. 그리고 당대 쉽게 볼 수 있는 선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며 수년 동안 왕래하며 마음이 서로 통했다 했다. 제자인 우산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내 뒤의 일을 희령(우산의 자)에게 부탁하려고 하였더니 뜻밖에도 장성한 나이에 문득 세상을 떠나 나로 하여금 무궁한 슬픔을 머금게 하는가”라 하며 애통해 마지않았다. 아들 한승(韓昇)은 단목 선비 창주가문의 담산 하우식의 사위였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담산은 우산이 세상을 떠난 후 백곡정사 건립 등 사돈의 학문을 기리는 일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할 수 있다. 우산의 학식은 그가 남긴 문집의 양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모두 31권 16책의 분량이다. 300여 편의 편지글은 최익현(崔益鉉)·전우·송병순(宋秉珣) 등 당시의 거유들과 성리학의 문제를 토론한 내용이 많아 한말의 유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심통성정신도(心統性情新圖)’ ‘심설(心說)’ ‘정설(情說)’ ‘기질지성변(氣質之性辨)’ ‘본심변(本心辨)’ ‘명덕변(明德辨)’ ‘양지변(良知辨)’등 성리학에 관한 논저가 많다. 심(心)·성(性) 문제와 이교·이단에 관한 비판 등 성리학의 주요 주제에 대한 글들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심학통편(心學通編)’ ‘율서고증(栗書考證)’ ‘우암사실(尤菴事實)’ ‘범학신편(範學新編)’ ‘중흥사의(中興私議)’ 등의 글도 실려 있는데 이중 ‘심학통편’은 심학에 관한 옛 선비들의 문구를 발췌하고 자신의 의견도 개진한 것으로 200여 조를 수록했다. 주자부터 이황·이이·기정진 등 중국과 한국의 학자를 망라했으며, 노자·왕수인(王守仁)·불교의 글도 모았다.
천인일리변(天人一理辨)에서는 당시 유학자들이 편견과 고집이 심하며 기괴하고 교묘한 것만 좋아한다 이들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고 불교·양명학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백곡지’ ‘평거지’ 등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생을 학문 정진에 심혈을 기울인 우산은 남명선생의 문집 중간의 일에 참여하는 등 남명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래서 남명선생이 노닐었던 백운동에 정사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시를 읊조리며 평생을 보내고자 했다. 면암 최익현이 지은 백운정사 기문에 “정제용, 하우식, 한유 세 사람이 남명이 노닐던 곳인 백운동에다가 초가 3칸을 짓고 동쪽의 것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여 강학의 공간으로 삼고 서쪽의 것은 관선실(觀善室)이라 하여 벗을 영접하는 장소로 삼았고 가운데 것은 남명을 기념하여 경의헌(敬義軒)이라고 하였다”고 한 것을 볼 때, 얼마나 남명선생을 흠모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우산은 결국 정사 건립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그 아우인 환(桓)이 형의 뜻을 계승하여 동지들과 더불어 마침내 완성을 했다 한다. 우산은 1911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자신의 뜻을 미쳐 펴 보지도 못하고 비교적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스승 간재가 애통하게 생각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우산의 학문을 기리고자 후세 사람들은 백운정사에 간재와 우산의 유상(遺像)을 보관하고 향사를 수년간 올렸으나 병화로 폐허가 되고 말아 현재의 자양서당을 다시 건립한 것이다. 진양속지 유행조에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한유(韓愉)의 자는 희령이요, 호는 우산(愚山)이며 본관이 청주(淸州)이니 문경공(文敬公)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이다. 널리 배워 경전의 의미에 정통했고 자기주장을 글로 펴내었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발휘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함께 백운정사(白雲精舍)에 모셔졌다. 문집(文集)이 있다. ‘단성 향교지’에도 유행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강우지역의 드러난 선비 우산 한유.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선비란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