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등나무 외 2편
기차표 끊고,
행선지 확인하고,
역사(驛舍) 앞 주차장 한구석에서
기차를 기다리자면
귀만 열어놓고 있으면 된다
메두사의 머리칼 춤추는 뱀들처럼
꿈틀거리고 휘어진 머리맡 등나무 아래
얌전히 무릎 꿇고 앉아 계시는
벤치 하나
등나무는 시간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와
시절을 눈여겨보란 듯
보랏빛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보라!
이 자리에다
나를 부려놓은 지 어언 삼십 년
얼마나 많은 울음소리 들었겠느냐
웃음과 울음이
한 몸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걸 아느냐
떠난다는 너를 기꺼이 보내주어야겠다
언젠가 돌아올 네가
내 등을 문질러 닦아
내 등이 너를 비추는 명경(明鏡)이 될 때까지
기다리마
그때까지는 보라! 만으로 나를 견디마
동백열사
눈알을 얻고
날개를 잃었다
작년과, 그 작년
겨울과,
또 겨울
떨어질 모가지라고
바람 삼킨 목덜미가 서늘해
남해의 목도리를
겨우내 둘렀다
목을 잃고
소리를 얻었다
겨울을 무사히 건넌
상춘객들의
뱃고동
나는 목도리를 끌러 던지고
내 안의 붉은 울음을 꺼내어
저들에게
기꺼이 보여주었다
애벌레의 시간
쉬었다 가셔도 돼요
누군가의 귓속말이라도 들었는지 할아버지가 길옆 나무 벤치에 앉아 손수건으로 깊은 주름이 진 얼굴의 땀을 닦는다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지팡이도 할머니 옆에 비스듬히 놓여 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한 편의 무언극이다
세상의 무수한 소리들에 오래 지친 할아버지의 귀는 이제 문을 닫았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걸어온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할아버지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발치로 하얀 손수건이 떨어진다
온몸이 파란 애벌레 한 마리가 곁에 조용히 내려와 있다
얼마나 더 걸어야 날개가 돋을지
나뭇잎만 한 하늘이 솔바람에 열리고 있다
<근작시>
베껴 쓰는 습관 외 1편
담장 없는 옆집
무당 할머니
지붕 위 낡은 깃발은 신통력의 은유인가
허리와 무릎을 앓고
보청기로 세상과 소통하나
유모차 밀 힘이 발바닥에 여즉 남아
고통의 어시스트로 집 앞 텃밭을 가꾼다
내 집 앞 텃밭에도 오이 모종 하나 심어주신다
내륙의 적설(積雪)이 다시
초록의 망망대해를 일굴 때까지
점 보러 오는 이 못 봤다
마당 구석 포도 넝쿨 아래
꼬리만 살아 있는 개 한 마리
애기 시절 신내림이라도 받았는지
마주칠 적마다 엉덩이 요령을 흔들어댄다
인생이 동그라미가 맞아요, 원이 맞아요?
지랄허네
푸성귀나 뽑아다 처먹어
할머니도 저와 인연인가요?
이년?
아마존강보다 긴 고무호스 끌고 나와
무당 할머니
아침을 시원스레 물 뿜으신다
텃밭의 장배기가 올해도 청청하시다
어린이 보호구역
물풀을 다치면 안 됩니다
길을 내어 길이 사라져버리다니요?
속도와
유속(流速)의 교차점
그 수직을 가로지르는 조약돌들이
건너편에 마침내 이를 때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야 합니다
오늘을 지나야 내일이 있지요
내일도 오늘이지요
최 준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 시 등단.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너 아직 거기서> <개> 등, 번역시<Orang Suci, Pohon Kelapa>.
[출처] 최준 시인 (2022년 겨울호)|작성자 시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