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을 스캔하다 / 김춘기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고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바위에 어깨를 부딪고 비탈로 굴러내렸다. 발아래는 낭떠러지였다. 하산길을 조심하라는 통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긴장이 풀려버린 탓이다. 하루하루 무사히 지낼 수 있음이야말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일상의 소중함은 일상을 벗어났을 때 안다.
이튿날부터 팔, 다리, 엉덩이에 시꺼먼 멍이 들었다. 쑤시고 아팠으나 관심은 아들 결혼식 쪽으로 쏠렸다. 뼈를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힘줄이 끊어질 수도 있음을 몰랐다. 한 달 후에 혼주석에 앉을 몸인데 팔에 깁스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면 어쩔뻔했나. 4월에 다친 팔이 5월 말 잔치가 끝날 때까지 낫지 않았다. 그제야 병원을 찾아 초음파를 했다. 특별한 소견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건만 통증은 여전하다.
통증은 밤에 위력을 보인다. 쑤시고 시림은 설핏 든 잠을 토막 내어 뒤척임과 신음으로 버무리다가 눈물까지 불러낸다. 이전의 편하던 잠자리가 얼마나 고마웠던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몸의 건재함이 사실은 행운을 누려온 셈이다. 자주 아프다고 호소하던 지인의 모습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자신의 통증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걸 습관적으로 그러는 줄 알고 공감을 보내지 못했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따라서 약해졌다. 부항을 떠서 죽은 어혈을 뽑아내야 한다는 지인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평소 같으면 당치않다고 일축했을 말에 빠져들었다. 부항이 뭔지 모르면서 급한 마음에 내민 어깨와 등판이 시뻘겋다. 남편은 검증되지 않는 상식 이하의 행동으로 몰아붙인다. 가까운 이의 나무람은 마음에 통증 하나를 더 얹는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이 듣고 싶다. 시린 마음으로 전화기를 든다. 딸은 아프다는 내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제 아이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양 전화가 끊긴다. 순간 쏴-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벌판에 혼자 서 있다는 아득함에 싸인다. 섭섭함이 마음의 섬을 만든다. 넓은 바다에 오도카니 뜬 외로움이 되어 세상의 통증을 더듬어본다.
감각 있는 생물이라면 모두가 통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제 무심코 디딘 이의 발아래에는 풀벌레의 비명이 있었고, 오늘 지나가는 바퀴에 다리를 친 길고양이는 어느 구석진 자리에서 울고 있겠다. 구급차 안에는 일터에서 손을 다친 노동자의 신음이 있을 테고, 암 병동에는 진통제를 달고도 통증을 견디지 못해 머리를 박는 환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있다. 평화롭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이면에는 통증이 공존하고 있음이다.
어찌 몸의 통증만일까.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겠나. 너무나 힘이 들어 누구든 붙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과 같은 외로움과 억울함과 절박함으로 절규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 순간 한 사람만이라도 이야기를 들어주고, 토닥여 주고, 안아준다면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공감받지 못하는 통증, 무심한 눈길에 내쳐진 통증은 고독함이 더해지면서 부피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큰 병원을 찾은 날이다. 방사선실에서 X-레이를 찍고 MRI 촬영실로 들어갔다. 낯설은 길쭉한 전동테이블 위에 누워서 강한 자기장이 나오는 대형 튜브 모양의 스캐너 내부로 밀려들어 갔다. 스캐너는 한참 쿵쾅거리는 소음을 낸 후에 어깨통증을 스캔하기 시작한다. 최신형 기기의 신통함은 20여 분만에 통증의 근원을 알아낸다. 어깨 회전근개 파열이다. 어깨의 힘줄을 이어 붙여야 한다는 진단이 나오고 수술 일정이 잡혔다. 원래 엄살이 많은지라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심리적 공포까지 더해지면서 생각의 가지가 뻗는다.
나는 언제 타인의 통증을 진심으로 껴안아 위로한 적이 있었던가. 늘 자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날들이 부끄럽다. 입장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데, 오늘 편하다고 해서 내일도 그럴 것이란 보장이 없는 것이 세상 아니던가. 그날도 자칫 어깨가 아닌 머리를 다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예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모르면서 살아가고 운명은 순간적으로 갈릴 수 있음이다.
사고는 예고가 없다. 통증은 어느 날 일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세상 모든 통증을 다 껴안을 수는 없지만 가까운 이들의 아픔에는 귀 기울여야 하리라. 아프다고 말할 때는 괴로워서 하는 호소이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몸의 통증만 아니라 마음의 통증까지 스캔할 수 있는 센서와 감성을 길러 두면 주변의 큰 위로가 될 테다. 제 몸의 통증은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마음을 만난다면 통증을 견디는 힘이 될 것이다.
일상이 비상非常으로 뒤틀린 후에야 옳은 말도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은 하기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따뜻한 말로 약을 만들 수 있으면 최상의 말하기다. 말을 하는 데는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라 연습이 필요하다. 옳고 그름의 말이 아니라 위로와 공감의 말하기로 주변 사람들의 정서적 온도를 높일 수 있으면 족하다. 자신이 겪어봐야 남의 사정을 이해한다는 다수설처럼 이제야 타인의 아픔을 생각하게 되니 통증은 사람을 철들게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