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와(晦窩) 조병희(曺秉憙)
樂民 장달수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희(朱熹)는 유학의 기본 책인 사서(四書)에 쉽게 주를 달아 우리나라 유학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의 학문을 ‘주자학’이라고 할 만큼 중국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은 주희를 주자(朱子)라고 부르며, 그의 학문 본받고자 했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은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회옹(晦翁)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을 즐겨 했다. 고려 후기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이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회헌은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직접 필사해 성리학의 보급에 힘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튼 주자의 호인 ‘회(晦)’ 자를 우리나라 선비들은 자신의 호로 삼아 그를 본받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명선생 11세손인 진주선비 회와(晦窩) 조병희(曺秉憙)도 주자의 학문을 본받고자 자신의 호로 ‘회’자를 썼다. 조병희가 회와(晦窩)로 호를 삼은 것은 집안의 내력도 많이 작용했다. 우선 남명선생의 자손이란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남명선생은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열심히 읽고 경(敬)과 의(義)를 학문 요체로 삼았다. 또 회와의 고조부인 통덕랑 윤현(允賢)은 호를 ‘주일헌(主一軒)’으로 삼을 만큼 주자학에 심취했으며, 주자절요(朱子書節要)를 정성껏 필사해 보관하며 자손들에게 삼가 이를 지킬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학을 전통으로 이어온 회와는 당연히 주자의 가르침을 평생 학문 요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곧 선조인 남명선생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회와는 1880년 진주 원당리에서 의순(義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명선생의 후손으로 선대는 덕산에 살았는데, 증조부 학진(鶴振)이 진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어려서 문사(文思)가 남달라 10세 무렵 십구사(十九史), 소학, 대학 등의 책을 읽었으며 글도 제법 지을 줄 알아 마을의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공부를 하다가 막히는 것이 있으면 당대 석학들을 찾아가 질문을 했는데,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뛰어난 학자가 있으면 가서 물었다 한다. 특히 면우와 회봉 선생에게 나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성리설 등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질정을 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면우와 회봉 선생은 일찍이 남명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실천하고 계승 했으며, 이로 인해 남명학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학자들인 만큼 회와는 남다른 마음으로 가서 배웠을 것이다. 당시 남명 10세손인 복암(復菴) 조원순(曺垣淳)의 주도로 ‘남명집’을 교정하고 있다. 복암은 성재 허전(許傳)으로부터 학행과 예법을 배웠으며, 한주 이진상(李震相)에게 수학하며 특히 주리론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전수한 강우지역의 선비다. 복암은 남명선생의 ‘신명사도(神命舍圖)’를 교정하며 남명에게 누가 될 것 같은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의 글자를 빼는 등 상당 부분 수정했는데, 회와도 복암을 도와 참여를 하게 된다. 당시 회와의 나이는 어렸지만 식견이 뛰어나 복암의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명집을 교정할 때 많은 선비들이 덕산을 왕래했는데, 특히 심재 조긍섭은 회와의 재주를 아끼며 학문의 깊이를 인정했다. 회봉과 심재는 당시 강우와 강좌의 학문과 문장을 주도하던 선비로 이들이 회와의 학문을 인정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당대 석학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온 회와는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세태의 어지러움을 매우 근심하며 안타깝게 생각했다. 세상 풍조가 변하자 옛 것을 고수하던 선비들도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신학문에 뛰어들자 회와는 이를 개탄해 하며 “나의 학문이 옛 선인들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하며 유학의 부지를 위해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회와는 세상은 변해도 주자대전을 더욱 열심히 읽는 등 성리학 탐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회와는 고향에서 학문 정진에 힘쓰다가 1925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평생 남명 후손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당대 석학들에게 학문을 전수 받으며 유학에 정진해 온 한말 강우 선비 회와는 46세란 짧은 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양속지’ 유행조에 회와의 이름이 올라 있다. “자는 회중(晦仲)이요, 호는 회와(晦窩)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남명(南冥) 선생의 후손이다. 학업을 면우 곽종석(郭鍾錫)·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에게 배워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문집(文集)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