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마크 롤랜즈 지음)
-늑대에게서 인간을 배우다-
덩치가 산만 한 수컷 늑대를 기르며 11년을 함께 산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철학교수. 그가 가르치는 강의실에는 항상 늑대가 있었다. 심지어 수업 중 가끔 길게 하울링을 하기도 한다. 우연히 새끼늑대를 판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호기심에 찾아갔다가 한눈에 반해 덥석 입양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11년 뒤 품 안에서 안락사할 때까지 늑대는 그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형제로 지냈다. 혼자 둘 수 없어 어디든 같이 다녔고 어느새 철학자의 인생과 세계관까지 바꿔놓았다.
<철학자와 늑대(The Philosopher and the Wolf)>는 철학자 마크 롤랜즈가 자신의 늑대 브레닌과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철학 에세이이다. 단지 늑대라는 동물에 대한 드문 관찰보다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 일반,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까지 가능하게 하는 책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철학자와 늑대>는 엄밀하게 말해 늑대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인간에 관한 책이다. 마크 롤랜즈는 늑대를 기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스스로의 주장에 대해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저자는 브레닌이 “제도 교육에서 배우지 못했고 배울 수도 없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며 “늑대는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 숨은 이면, 즉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 그 자체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
마크 롤랜즈는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해 인간에 대해 논한 기존 철학이 인간의 오만함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명제의 경우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생명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 저자는 야생늑대로 태어난 브레닌이 인간 사회에서 살면서 수명을 다 누린 것은 개나 늑대도 인간만큼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동료에 대한 공감이나 슬픔도 인간만의 고유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지 오래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계약설도 같은 맥락에서 다뤄진다. 사회계약설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
서는 보장할 수 없는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계약을 맺어 국가를 조직하고 자신의 권리를 국가에 위임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사회계약설이 자신의 권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약한 존재는 계약의 범주에 넣지 않고 따라서 도덕적 의무도 지지 않는다고 보는 인간의 야만을 드러낸다고 비판한다.
흔히 인간은 동물보다 지능이 높다고 말한다. 영장류는 몸집에 비해 큰 뇌를 가졌다. 마크 롤랜즈는 ‘마키아벨리적 지능가설(Machiavellian Intelligence)’을 인용해 영장류는 지능이 발달해 집단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단생활의 결과로 사회적 지능이 발달하고 뇌의 크기가 커졌다고 말한다.
특히 다른 동물들과 달리 번식과 쾌락의 관계가 전도되면서 인간 사회는 섹스와 폭력이 필수불가결 해졌고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약하게 만들기 위한 속임수와 계략이 사회적 지능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마크 롤랜즈는 “인간은 스스로 악의 가능성을 조작한다”고 말한다.
한편 사냥에 있어서는 늑대가 인간보다 훨씬 우월하다. 늑대는 먹이를 쫓아 30km를 달릴 수 있고 토끼의 움직임을 따라 15분까지 숨죽인 채 기다릴 수도 있다. 우월함의 종류가 다른 것뿐이다. 인간의 사회적 지능이나 이성이 늑대의 속도나 지구력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에는 근거는 없다.
< 인간은 왜 행복하지 않은가?>
브레닌과 함께 산 지 4년쯤 되었을 때 마크 롤랜즈는 앨라배마를 떠나 아일랜드 남부 해안의 외딴 지역에 정착한다. 그리고 브레닌에게 친구를 만들어줄 요량으로 말라뮤트와 셰퍼드 사이에서 태어난 강아지 니나를 입양했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된 그 시기에 저자는 브레닌과 더불어 자신들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때 행복은 감각적으로 만족스러운 감정 상태를 뜻한다. 저자는 “인류의 가장 명확하고 단순한 특징은 감정을 숭배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라며 인류를 감정에 집착하는 ‘행복중독자’라고 칭한다. 스스로 감정을 생산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점검하며 노이로제 상태로 살아간다.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행복을 위해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 나선다. 새 애인, 새 자동차, 새 집, 새 삶… 그래도 감정은 채워지지 않고 새로운 것이 익숙해지는 만큼 행복은 멀어진다.
이에 반해 동물은 감정이 아니라 실체를 쫓는다. 늑대인 브레닌이 가장 행복을 느꼈을 사냥 모습을 지켜보며 저자는 행복이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임을 이해한다.
토끼를 사냥하기 위해 브레닌은 오랫동안 온몸을 경직시킨 채 기다린다. 토끼가 눈치 챈 것을 깨닫는 순간, 전광석화 같이 몸을 날리지만, 대부분은 토끼가 빨랐다.
사냥이 늘 유쾌하거나 즐겁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브레닌은 사냥 시간이 끝나면 언제나 눈을 반짝이며 행복해했다. 저자는 그로부터 즐거움과 불편함이 하나 될 때 비로소 행복이 완성된다는 야성의 철학을 발견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래가 아니라 순간을 보고 살아라>
아일랜드에서 브레닌은 다른 개와의 사이에서 딸 테스를 얻었고 저자는 런던을 거쳐 남 프랑스 랑그도크로 거처를 옮기면서도 세 마리의 동물들과 안정된 일상을 공유했다. 특히 랑그도크에서의 여름은 이들 모두에게 ‘절대 끝나지 않는 여름’이었다. 늘 정해진 코스대로 산책을 하고 같은 메뉴를 시켜 먹고 각자가 좋아하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여름 해를 견뎠다.
그러나 이 무렵 베르닌은 이미 야생늑대의 평균 수명인 10살이 넘었고 비장에 종양이 생기고 항문샘이 감염되는 등 병치레를 시작했다. 곪아서 냄새를 풍기는 엉덩이에 두 시간에 한 번씩 소독과 주사를 거르지 않은 정성 어린 간호한 끝에 염증은 잡혔지만 1년 만에 림프육종이 재발했다.
브레닌을 스스로 떠나보낸 날, 마크 롤랜즈는 한참 떨어진 둑에서 돌덩어리들을 주워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은 그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일까?
그는 비트겐슈타인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인용해 죽음은 삶의 한계이며 “살아있는 동안 닥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에 맞이했을 때는 욕망이나 목표, 과제 같은 미래의 존재도 의미가 없으리라. 죽음이 나쁜 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서 미래를 빼앗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동물들은 늘 현재에 충실하다.
니나는 브레닌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단짝이었지만 브레닌이 죽고 나서는 냄새 한 번 맡고 돌아선다. 이제 브레닌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를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이제까지 했던 투자의 상실, 혹은 미래 기획의 박탈이 되기에 죽음을 떨치지 못한다. 마크 롤랜즈는 이를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라고 말한다.
브레닌을 보내며 괴로워했던 마크 롤랜즈는 한편 완전한 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시간을 일직선으로 보고 삶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둥근 원으로 인식하고 그 자체로 완전한 최고의 순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몇몇 순간들이야 말로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마크 롤랜즈의 말대로 브레닌은 저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계산이 실패하고 운마저 다했을 때 남는 나 자신, 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