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련의 먹구름으로 캄캄할 때
인생길은 평탄하지 않고 울퉁불퉁합니다. 가끔씩 고통과 시련의 먹구름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세력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립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첫째 서간의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정신을 차라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8)
이렇게 성경은 악의 세력이 집요하게 우리를 노린다고 경고하면서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도 알려 줍니다.
우선 창세기 3장을 보면 낙원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 살게 하시면서 거기에 있는 모든 과실은 다 먹어도 좋지만 지선악과(知善惡果)만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이 말을 왜곡합니다. 하와에게 은근히 다가가서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라고 묻습니다. 하와가 가련하고 딱한 처지에 놓인 것처럼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뱀의 말처럼, 먹음직한 열매가 주위에 널려 있는데도 하나도 따 먹지 못한다면 정말 가련한 신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뱀은 하와가 처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하와를 염려해 주는 척 관심을 끌며 접근하고, 결국 잘못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렇게 악은 항상 진실을 왜곡하면서 사람들이 주목하도록 만듭니다. 사람을 생각해 주는 척 다가오면서 교묘한 거짓을 이용하여 인간을 잘못된 길로 유도합니다.
탈출기 1장에 보면 악의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납니다. 이집트의 임금 파라오는 자기 나라에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불어나자 안보의 위협을 느껴 그들에 대해 억압 정책을 씁니다. 그들을 강제 노역에 내몰아 혹사시켜서 인구가 서서히 줄어들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산파들을 불러다가 은밀히 명합니다.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주다가 사내아이면 그 자리에서 죽여 사산(死産)이라고 둘러 대고, 여자아이면 살려 두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파라오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의 계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는 공개적인 탄압 정책으로 돌아섭니다. 이스라엘인의 사내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을 온 백성에게 내린 것입니다. 은밀한 술수가 통하지 않자, ‘어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조치가 시행된 것입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처음에는 숨어서 은밀히 움직이다가 여의치 않으면 본색을 드러내어 폭력적으로 행동하면서 사람을 해칩니다.
악의 세력은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악마가 등장하여 유혹하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악마가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유혹합니다.(요한 6,15; 7,3-4)
악의 세력은 예수님 수난의 시간에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여 가르치신 열두 사도들 가운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악의 유혹에 넘어가서 스승을 반대자들에게 팔아넘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집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기에 자신들을 통치하는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인들을 극도로 증오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대자들의 힘을 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하자, 유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폭도인 바라빠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떼쓰게 합니다. 빌라도는 흥분한 군중의 떼쓰기에 밀려서 결국 예수님을 죽이라고 내어 줍니다.(마르 15,6-15) 이렇게 악은 군중 심리를 이용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악은 익명의 집단이나 무리 속에서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살라지 못하는구나! 어디 이스라엘의 임금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가 있겠어?”(마르 15,31-32)
평소에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하고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가 죽을 지경에 이르면 더 이상 비난하지 않는 것이 예의고, 그에 대해 한 가닥 동정심을 갖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열성에 가득 차서 경건하게 산다고 자부하는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고소하게 여기면서 마지막까지 모욕과 조롱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악은 사상과 신념을 빌미로 다른 이에게, 설사 그가 비참한 처지에 있더라도, 비난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작은 연민의 마음도 없이 증오심을 갖고 무자비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요한묵시록에는 미카엘 대천사와 사탄과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탄이 미카엘 대천사에게 패배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자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그자가 내쫓겼다.”(묵시 12,10)
여기서 악의 세력은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헐뜯고 비방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탄은 파멸로 이르게 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악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치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고,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주목하게 하면서 끊임없이 비방하고 욕하게 만듭니다. 욥기에서도 사탄은 밤낮없이 인간을 헐뜯는 고발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제자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할지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악의 세력은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그들이 살인과 폭행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과거 교회 역사에 있었던 십자군 운동이나 마녀 사냥이 이런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이런 일은 요즘에도 일어납니다. 우상을 타파한다는 미명하에 타 종교인들을 모독하는 행동을 하거나 종교적 상징물을 훼손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도록 현혹시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2코린 11,15)라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악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교묘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악이 즐겨 활동하는 장소 중의 하나가 인터넷입니다. 물론 인터넷에는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특히 악성 댓글, 이른바 ‘악플’은 무고한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어서 심하면 자살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악플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거기서 악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확대 전파하고, 익명으로 숨어서 활동하며, 집단적으로 움직입니다.
게다가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고통을 당할 경우에는 동정심을 갖기는커녕 증오심을 갖고 계속해서 폭력적인 언어로 인신공격, 조롱과 비난, 거짓 소문을 퍼뜨립니다. 적지 않은 경우 무리를 지어서 행동합니다. 이른바 ‘카더라’ 통신(~하더라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나온 말로 정확한 근거가 부족한 소문을 사실처럼 전달하거나 의도적으로 퍼트리기 위한 행위를 의미)을 매개로 해서 말입니다. 확인도 안 된 소문을 트위터, 페이스북, 메신저 등으로 여기저기 뿌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을 해치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점입니다. ‘건전한 비판’, ‘알 권리’, ‘언론의 자유’를 위해 그렇개 한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사람을 현혹시켜서 불의를 정의라고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교활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식별이 요구됩니다.
악의 세력이 다른 사람들 안에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돌아와서 은밀하게 뿌리를 내리면서도 눈치를 못 채게 할 만큼 교묘하게 자신을 숨깁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느님의 빛 안에 우리 자신을 내어 놓는 시간을 자주 가질 때 비로소 악은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먼지가 잘 보이지 않지만, 햇살이 비치면 그 먼지가 잘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악이 하느님의 빛 안에서 드러나게 되면서 악의 극복이 시작됩니다. 마치 음지에서 자라는 곰팡이가 햇볕에 드러나면 소멸하듯이 말입니다. 신앙인들이 꾸준히 기도하면서 하느님 앞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악의 손길은 생각보다 교묘합니다. 기도를 통해 늘 그분의 빛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다음과 같은 청원이 들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예수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하느님 믿음이 힘들고 어려울때
신부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시 먹고 믿음의 힘을 얻고 있습니다
아멘
찬미예수님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아멘.~~
"악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악의 손길은 생각보다 교묘합니다.
기도를 통해 늘 그분의 빛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라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8)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