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는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에 필적하는 선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강이식, 연개소문, 걸걸중상, 대조영 장군등과
백제의 계백, 흑치상지, 부여복신 장군
신라의 알천, 김유신, 천존, 시득, 소나장군등
한결 같이 우리들이 잘 알수 있는 기라성 같은 장군들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무력정도가 역사서에 검증된 것은
김유신 장군과 알천장군 그리고 당나라 설인귀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상대국과 전쟁시 전투를 지휘하면서 승리를 이끈 전략과 전술은
나타나 있지만 개인적인 무력은 김유신 장군 밖에 나타나질 않아서
다른 장수들의 개개인 무력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참으로 궁금 합니다.
[진평왕 51년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 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한 삼국사기 41권 열전1 김유신 조에 같은 내용이
또 나옵니다만........
홀로 고구려 진영을 3번이나 들락거리면서 고구려 장수를 베어오거나
장수기를 빼앗아 오는 정도라면 그 무술실력은 과히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보통 장수들이 일기토가 아닌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살아오는 경우가 삼국지에서 촉나라 장수 조자룡 정도라고나 할까?
김유신 장군의 무술실력도 이와 같다고 해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장수들도 아마 이런 전투를 하였음직 한데 다만 기록에
남지 않아 그 추측이 어려울 뿐이며 아마도 중도에 전사하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보면 대부분 이미 검증된 김유신 장군과 같은
무술 실력은 충분히 되었으리라는 추측을 하여 봅니다.
삼국사기를 보다 자세히 읽어보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더해보면
오히려 전투로 시작하여 전투로 끝나는 삼국지 보다도
여러가지 손자병법에서나 볼수 있는 작전 (행군)과 보급, 기습, 교란,
주술, 간계, 첩보등이 삼국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이를 잘 음미하면서 읽어보시면 우리선조들의 활약상은
장엄한 대하드라마가 되겠습니다.
전 고려시대의 척준경이나 조선 태조 이성계를 무력치로 따지면 이름난 장수들 중에서는 최고가 아닌가 합니다. 이 둘중 궁술까지 넣으면 이성계가 우위, 근접기마전을 펼치면 척준경이 우위라고 생각을 하지만 무력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요소이기에 뭐라 할 수가 없죠.
<일본서기> 에 나옵니다. 660년 기록을 보면, 冬 10월에 백제의 좌평 귀신복실鬼室福信이 귀지란 자를 (일본에) 보내 일본의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기록이 있고, 백제멸망후 많은 백제인을 일본이 흡수하여 등용하는데 백제의 달솔이었던 귀실집사란 자의 경우 그 아비가 귀실복신(鬼室福信)이었다고 나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디 부여씨인 성씨가 어느샌가 귀실씨로 바뀐 것입니다.
김유신의 경우는 그 활약상이나 전과가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합니다. 김유신 외에 '단기필마'로써의 활약상이 그려진 무장으로는 고구려 초기 부여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괴유와 관산성전투에서 부여창(위덕왕)을 구한 백제 장군 축자국조 정도가 있겠네요.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왕의 목을 벤 괴유나 강궁으로 신라 대군의 포위를 뚫어낸 축자국조의 무용담은 삼국지연의의 관우나 조운에 비할 만 합니다.^^ 관산성전투 직전에 벌어진 백합야전투에서 백제의 부여창과 무명의 고구려 장군의 일기토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ㅋㅋ
첫댓글 대단하네요. 고구려 무명 장수래도 한몫 할텐데..
부여복신이 아니라 귀실복신이 아닌가요;;
전 고려시대의 척준경이나 조선 태조 이성계를 무력치로 따지면 이름난 장수들 중에서는 최고가 아닌가 합니다. 이 둘중 궁술까지 넣으면 이성계가 우위, 근접기마전을 펼치면 척준경이 우위라고 생각을 하지만 무력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요소이기에 뭐라 할 수가 없죠.
궁술로 따지자면 고구려 시조왕 주몽께서도 ... 복신은 의자왕의 종제(從弟)이며 무왕의 조카 이니 부여씨가 맞는것으로 아는데 귀실이라는 성은 처음 듣습니다. 혹시 어느 자료에 있는지? 소개좀 부탁합니다.
<일본서기> 에 나옵니다. 660년 기록을 보면, 冬 10월에 백제의 좌평 귀신복실鬼室福信이 귀지란 자를 (일본에) 보내 일본의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기록이 있고, 백제멸망후 많은 백제인을 일본이 흡수하여 등용하는데 백제의 달솔이었던 귀실집사란 자의 경우 그 아비가 귀실복신(鬼室福信)이었다고 나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디 부여씨인 성씨가 어느샌가 귀실씨로 바뀐 것입니다.
그렇네요!. 일본서기 권 25 天萬豊日天皇 [孝德天皇]편에 안양사랑님께서 소개한 내용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막상막하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당대의 뛰어난 용맹을 지닌 무장들이니 말이죠 ^^
김유신은 무력보다 지략적으로 더뛰어난 장군인걸로 알았는데. 저에 선조라서 더 자랑스럽습니다
문무를 겸비했죠. 관우정도?ㅋㅋ아니면 졸라 쌘 장료정도 ㅋㅋ
김유신의 경우는 그 활약상이나 전과가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합니다. 김유신 외에 '단기필마'로써의 활약상이 그려진 무장으로는 고구려 초기 부여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괴유와 관산성전투에서 부여창(위덕왕)을 구한 백제 장군 축자국조 정도가 있겠네요.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왕의 목을 벤 괴유나 강궁으로 신라 대군의 포위를 뚫어낸 축자국조의 무용담은 삼국지연의의 관우나 조운에 비할 만 합니다.^^ 관산성전투 직전에 벌어진 백합야전투에서 백제의 부여창과 무명의 고구려 장군의 일기토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