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에 교원대의 송호정 교수가 고인돌에 대하여 강의를 하러 왔을 때,
송교수는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 축제를 보고 온 결과를 이야기하며 다소간 흥분하였다.
그 이유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고인돌 시기의 생활상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고인돌시대에 짐승가죽을 입은 지저분한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우갸우갸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고인돌 시대의 생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고인돌 시대는 석기시대가 아니라 청동기 시대이다.
청동기시대의 바위유적으로는 고인돌과 함께 암각화를 떠올릴 수 있다.
과연 고인돌과 암각화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고인돌의 주인공이 그려낸 바위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눈길을 끌 수 있다.
(그림은 문화재연구소에서 퍼온 것임)
이 그림은 안강 기계면 기계천 가에 있는 고인돌에 그려진 암각화다.
고인돌에 석검과 석촉을 묻는 대신 바위에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이 기계천 주위에는 80여 기의 고인돌이 몰려있는데 이 주위에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이 그림을 보고 제작 연대를 기원 전 5-6세기 정도로 추정을 한다.
또 다른 고인돌에 그려진 암각화는 영천 보성리 마을 입구의 것이다.
여기에는 고령 양전리 암각화와 통하는 신상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고인돌은 산비탈 아래 밭 가운데 있는 것을 밭 임자가 농사에 방해된다고 파버렸는데,
바위의 모양이 거북모양이라서 길조라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받침판을 만들어 마을 앞에 모셨다.
이 고인돌은 다듬어진 모양새로 보아 신상이 그려진 바위를 떼내어 고인돌 뚜껑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청한다. 그러므로 이 신상을 그린 다음 세대의 인간들이 고인돌 축조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내남면 안심리 밭가운데도 고인돌이 존재하는데 이 고인돌에도 매우 단순화된 신상 그림들이 있다.
임세권교수는 '종교의식의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정형화된 신상들이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풀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이미 정형화된 종교의식이 행해진 것이다.
또 그들이 입은 옷은 동물 가죽옷이 아니다. 그들은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잣고
이 실로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옷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신석기 말기부터 오랜 기간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가마니같은 직조 형태로 옷감을 짜서
입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뼈로 만든 바늘과 바늘통도 발견되었다.
(참고로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이러한 가락바퀴가 출토되었다.)
곡식을 추수할 때는 이러한 형태의 반달돌칼을 사용하였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런 것들은 50~60년대 까지도 농촌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자귀나 망치 같은 것도 만들어 썼고, 아래의 괭이는 철기시대의 것과 흡사하다.
단지 재질만 돌일뿐 청동기 시대의 생황용구는 돌낫까지도 오늘날의 것과 흡사한 것이 많다.
고인돌 시대에 무덤에 같이 부장한 것으로 여겨지는 석촉이다.
그들의 또다른 무기로 여겨지는 석창과 돌도끼이다.
돌을 다루는 기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시기에는 철기시대의 대장간처럼 사용되었던 석기 제작장도 발굴되었다.
손잡이에 장식이 들어간 이러한 석검은 아래의 사진에 보이는 청동검과 형태가 거의 흡사하다.
일본인 학자는 이 청동검을 본따서 석검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제는
그 말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 한국식 세형동검이 석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진열된 석검 중에서 가운데 석검은 안강 기계의 바위에 그려졌던 석검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세형동검도 가끔 고인돌의 부장품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금속을 다루는 기술도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형동검을 만들고 100톤이 넘는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했던 사람들을
지저분한 석기시대 원시인이라고 한다면 과연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이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인간들이 신석기 시대부터 터잡고 살아온 인간인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시대의 토기들은 동북지방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들은 이 곳에서 오랫동안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평화롭게 살아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던
고인돌 여행이었다.
******** 고인돌 답사후 남은 문제들 *********
1. 고인돌시대는 종교의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농업 기술의 발달로 어느 정도 자족할 수 있는
경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경제를 밑받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경계를 정하거나, 혹은 세력을 과시하거나, 단합을 목적으로 고인돌을 축조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고인돌을 축조하는 것을 멈추었을까?
그들은 이 시기 이후 지상의 거대한 뚜껑돌을 포기하고, 부장품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그렇게 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2. 고인돌이 떼를 지어 존재하는 곳은 경주지역에서는 대체로 나즈막한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분지 지역이라는 특징을 띄고 있었다. 이 분지 안에는 그 속의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비옥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질러 바다와 통하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곳들이 초기 철기시대의 소위 읍락국가라고 불리는 소국이 있었던 자리와 일치한다.
그러면 사로국의 파사왕 시대에 음집벌국과 경계를 다투었던 실직곡국은 어디로 추정할 수 있을까?
음집벌국(안강)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곳 중에서 분지와 들판이 있고, 강이 흐르는 위치를 갖춘 곳은
동쪽으로는 포항과 인접한 오야리이며, 서쪽으로는 영천이다. 두 곳다 고인돌이 존재하는 구역이다.
오야리는 채석장까지 갖춘 고인돌 지역이며, 영천 보성리 지역에는 암각화 고인돌이 발견되었던
곳이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치니 그 주가 무리로 더불어 스스로 항복하고 ,
실직,압독의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라는 삼국사기의 기사에 의지하여, 압독국이 있었던
경산과 인접한 영천 지역일까? 아니면 바다로 통하는 길목이 되는 오야리 지역일까?
아무튼 파사왕의 이 주위의 소국 정복이 성공한 이후 사로국은 지금의 경산에서 안강, 혹은 포항
앞 지경까지 풍부한 농산물을 산출하는 비옥한 땅을 갖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정복의 결과로
사로국은 진한의 확고한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비록 경주 부근에 500기의 고인돌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전라도 지역에 비하면 1/4에 불과할
뿐이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초기 청동기문화인 요령식 동검문화와 후기에 이르는 한국식 동검까지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삼국사기 혁거세 38년, 대략 기원 전 1세기 무렵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어 수빙하니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변 이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직공을 보내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 같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기원 전 2-3세기 경, 한국식 동검문화를 주도하였던 마한 지역의 고인돌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특히 200 t에 이르는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할 수 있었던 그는 어느 소국의 조상었을까?
그리고 그는 요령식 동검문화와 고인돌로 대표되는 고조선과 어떤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또, 경주 지역의 고인돌 시대와는 어떤 연관을 갖고 교역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
이상 세가지의 의문점을 과제로 남기면서, 카페 회원님들의 수고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다른건 몰라도 첫번째 의문점의 이유는 종교(혹은 "신")가 아닐까요? 고인돌은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권위보단 신에게 "후손이 잘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된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대체로 지배층이 바뀌거나, 종교가 바뀌었을 때 무덤형태가 변화됩니다. 종교가 바뀌었을 때는 사후세계관의 변화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에서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바뀔 때인데.... 이승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누린다는 계세사상이 큰무덤에 화려한 부장품을 넣게했었고, 법흥왕 이후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공수래공수거'같은 생각들이 부장품을 줄이고, 부장품의 성격을 바꾸어 줍니다. 또 무덤의 형태까지 바꾸게 합니다. 만약 종교가 이유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일까요? 지배자의 무덤이 권위의 상징인 것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소국 시대의 지배자급 무덤에서 발견되는 부장품들, 즉 청동거울, 무기와 공구, 청동방울 등이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종교가 바뀌었다면 '단순히 후손이 잘 되었으면...'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
50~60년대까지 우리 시골에서 사용했었다는 내용은...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농기구의 모양이 기계화 이전의 시골에서 사용하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지요? 그래서 고인돌 시대에 손으로 하는 일들은 (농업 뿐만 아니라) 거의 오늘날의 수준으로 발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 시기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임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해도 상당한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을까요? 고인돌 문화가 남방 혹은 북방에서 전래되었다면 고인돌 이외에도 상당한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춘추시대처럼 그 시대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순하게 반만년의 역사라고 자랑하지 말고 기원전 300년까지만이라도 복원할 수 있다면......
고인돌시대에 짐승가죽을 입은 지저분한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우갸우갸 하더라는 것이었다./// ㅋㅋㅋㅋㅋ 정말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