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오인되는 일본말들
남편이 입고 나갈 옷을 찾는데, 집안에서 이런 대화가 부부 사이에 이어진다.
"여보, 단스(장농)에 있던 내 우와기(웃옷) 어디 있어?"
"오시레(장 시렁)에 있을 거유. 에리(깃)도 크고 구식이라---"
"쓰봉(바지)도 그래. 거기다 가브라(덧깃)까지---"
"이젠 가다(몸체)까지 완전히 달라져서 안 맞아요."
"오늘은 머리 고데(손질)도 해 놔야 할 텐데---"
문에다 장치를 하면서 공사하는 사람과의 대화 좀 보자.
"이 문 와꾸엔 요비링(초인종-부름단추) 달 거죠?"
"네. 그리고, 문 위에 다마(전구) 끼울 자리도 해 놔요."
"너무 높아요. 달려면 하꼬짝(궤짝)이라도 가져와야겠는데요."
온통 일본말 투성이다. 이러한 사항은 집밖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어느 가족이 나들이를 했다가 음식점에 들어갔다.
"엄마, 나 우동(가락국수) 먹을래."
"난 덴뿌라(튀김) 넣은 오뎅(꼬치)으로 먹을 거야."
"난 이따가 나가서 젠사이(단팥죽)도 먹을래."
"여기 다꾸앙(단무지)이나 다마네기(양파)도 없어?"
"시보리(물수건) 하고 와리바시(소독저-젓가락)도 가져 와."
어린이까지 일본말을 자연스럽게 잘 쓰는 것을 보면 이런 가정은 외국어(특히 일본어) 교육이 잘 됐다고 해야 할는지?
일본말의 잔재는 우리가 늘 이용하는 택시 안에서도 이어진다.
"행선지(갈 곳)가 어딥니까?"
"종로통(종로)으로 가 주시죠."
"노면(길 상태)이 고르지 않아서 빠꾸(후진)해서 이면도로(뒷길)로 가겠습니다."
"그 쪽엔 데꾸보꾸(길턱)가 많을 텐데요."
"대로(큰길)로 가죠. 급하시면 오이꼬시(앞따르기) 좀 하고--"
"엔진 조시(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요."
"보도-낫도(볼트-낫트)도 헐겁고 기아(톱니)가 이상해 손 좀 볼랬더니 도라이바(나사돌리개)도 없고--"
"잘못 만지면 기계에 기스(흠)만 나죠, 뭐."
"어젠 바퀴가 빵꾸(구멍-펑크)까지 났었어요. 이젠 차를 개비할(바꿀) 때가 됐죠."
"가도(모퉁이)를 돌아서 가이당(층계) 있는 데서 내려 주십시오."
□ 일제 35년이 3천5백년이나 되듯
과거 일제 통치 35년은 광복 후 지금까지의 기간인 50년에 비하면 분명히 짧은 기간이다.
350년도 아니고 35년밖에 안 되는 그 짧은 기간에 그들은 엄청난 양의 '그들의 것'을 이 땅에 남겨 놓은 채 돌아갔고, 우리는 그보다 더 긴 기간에 '그들의 것'을 깨끗이 빨아 놓질 못했다. 그런 데다가 그것도 부족해 지금도 계속 일본말을 들여다 쓰고 있다. 35년의 세월은 우리 겨레에겐 3천5백년 만큼이나 긴 기간처럼 너무도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
모든 기관이나 업체들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아직도 일본말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가 하면 학술-출판-문화-과학-기술 같은 모든 분야에서도 일본말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은 이제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음식 이름 중에는 일본말이 그대로 쓰고 있는데도 어린이들까지 그것을 모르고 쓰고 있으며, 도구(道具) 이름들 중에도 일본말이 그대로 쓰이고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또, 일본 사람도 아닌 우리가 '숙자-영자-화자-춘자'와 같은 일본식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이고, 흔한 일은 아니나 그러한 이름짓기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은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젊은이들 중에선 일본식 문화 풍조에 젖어 머리 모습에서부터 옷-신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고, 기성인 중에도 그러한 취향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한 일본화(日本化)의 부추김은 이 땅 안에 몇천 년을 면면이 이어 온 우리의 '얼'을 짓눌러 맥을 빼는 큰 우를 범하고 있다.
그 어떤 분야보다 우리가 늘 쓰는 말 속에 일제 잔재가 너무 많다는 것은 더욱 큰 걱정이다. 더우기 일본말이 일본말처럼 느껴지지 않고 우리말인지 일본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걱정된다. 언어는 사람의 정신을 다스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국어학계에서는 일본식 한자말의 무분별한 사용이나 유입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의 7할 정도가 한자어(漢字語)이다. 이러한 한자말 중에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일본식으로 배워 온 지식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였거나 만들어 낸 신조어(新調語)인 것이 무척 많다. 그런 데다가 이를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해 온 기성인들에 의해 우리말은 일본식으로 '대책없이' 흘러 버렸다. 그로 인해 광복을 맞은 후에도 많은 이들은 '소풍(消風)'을 '원족(遠足)'이라 했고, '일목요연(一目瞭然)'이나 '단도직입(單刀直入)' 같은 일본식 한자말을 아주 유식한 체하며 입 밖으로 흘렸다.
□ 교과서까지 온통 일본식 용어라니
'반도(半島)'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 '반도'라는 말은 '반쪽 섬'의 뜻으로, 일본인들이 자기네 땅은 '온섬(全島)'이고, 우리는 그것의 반쪽밖에 안 된 '반쪽 섬'에 살고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이 예부터 써 온 우리말인 것처럼 착가하고 '한반도'니 '조선반도'니 하면서 교과서에까지 쓰고 있질 않은가.
'산맥(山脈)'이란 말도 우리 조상이 썼던 말이 아니고, 일본인이 쓰는 말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 쓴 용어이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 중에 이처럼 일본어의 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특히, 지리 교과서에 그 잔재가 많다.
우리는 '산맥'을 '산줄기'라 했고, 지도에서는 '지맥(地脈)'이란 말을 많이 썼다. 또 이름난 산줄기는 '대간(大幹)'이나 '정간(正幹)' 또는 '정맥(正脈)'이란 말을 써 왔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옛 지도를 보더라도 '백두대간(白頭大幹)'이나 '호남정맥(湖南正脈)' 들로 산줄기 이름이 들어가 있다.
물론, 산줄기의 개념도 일본과 우리는 달랐다.
일본은 지질(地質) 개념의 산줄기를 지도에 이름으로 나타냈지만, 우리는 지형(地形) 개념으로 산줄기를 지도에 나타냈다. 그래서, 일본식의 지도에서는 산줄기가 강-하천을 그냥 지나는 것으로 지도상에 나타내고 있으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땅모양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옛 지도에서는 절대로 산줄기가 하천을 지나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일본식 지도에서는 광주산맥이 금강산 북쪽에서부터 뻗어 내려 한강 줄기를 넘어 아산만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 옛 지도에서는 한북정맥(漢北正脈)이 한강 줄기와 임진강 줄기 사이로 뻗어 내려 절대로 하천을 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한반도의 큰 동맥이라 할 수 있는 백두대간은 개마고원을 따라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해안을 따라 동남족으로 뻗어 내리고, 태백산 부근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꺾여 멀리 남해안 끝까지 닿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전남 해안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계속 북족으로 가면 어느 하천도 건너지 않고도 백두산에 이르게 된다.
학자들은 우리 조상의 지형 개념의 산줄기 개념이 보다 과학적이고, 산줄기 이름이나 모든 지리 용어가 일본식으로 된 점을 지적하고, 지금부터라도 교과서를 우리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