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葬
고려시대에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 두고 오던 풍습이 있었다는 설화.
해당 설화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해당 설화와 결합한 것은 19세기 말~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이며, 이에 따라 일본제국의 역사 왜곡설이나 단순한 루머가 확산된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돌고 있다. 학계에서 주류로 여겨지는 문헌학적 접근에 따른 설은 대체로 불경에 나오는 일화와 중국의 효자전에 나오는 일화가 조선에 들어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현지화 되어 전국에 퍼졌다는 것이다.
고려장과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우바스테야마(姥捨山)'라고 해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설화가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이외에도 유럽,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에서도 이런 설화들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런 노인 유기 설화는 아프로-유라시아 전역에 퍼진 공통 설화로 볼 수 있다. 현재에는 고고학적 탐구조사와 문헌 조사 등을 통해 해당 이야기들을 고려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경우 실존하지 않은 풍습을 다룬, 아동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라고 보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고대 문헌을 뒤져봐도 기근이나 전쟁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닌 평시에 이러한 행위를 풍습처럼 일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 관련 연구자들은 해당 풍습이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실존하지 않는 풍습을 다룬 설화에 불과하다는 게 현대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다.[1]
때문에 설화로 존재하던 이야기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에서 조선 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작한 조선의 동화를 다룬 동화집에도 실렸고, 이렇게 설화로 여겨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민중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설화이자 동화가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로 둔갑해 민중의 인식 속에 자리를 잡아버린 경우이다.
물론, 생존이 위험한 극한의 상황에서 부모를 버리는 일은 있었으나 풍습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에도 경신대기근 시기에 노모를 버리고 달아난 남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단발적 사건이며 풍습은 아니었다. 조선 조정은 부모나 조부모를 버리거나 학대한 자에 대해 강상죄를 물어 극형에 처하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을 비롯한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지방관들을 엄히 징계하고 지역의 행정 등급을 강등시키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는 했다.
고려시대 평균수명이 42.3세이며 자연사 확률이 극히 낮고 인구피라미드가 삼각형이였으며[2] 질병이나 사고사 확률이 매우 높아 풍습으로 남을정도로 고령인구가 유지되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장 설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노인 유기 설화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 이야기에서는 수레만 지게로 바꾼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를 버리려고 한 아버지가 아들의 재치로 뉘우친 '할아버지의 지게'라는 이야기로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에서도 '귀중한 지게'라는 제목으로 나오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로 치환된 것만 빼면 내용은 전부 동일하다. 거기에서는 임금이 이 광경을 우연히 보고 고려장을 전면 금지시키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고려장 자체가 실제로는 잘못 전해진 풍습임을 강조한다. 은비 까비에서는 시베리아나 몽골의 못된 풍습이 전해졌다는 뉘앙스로 전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칠순이 되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로 업고 가서 버렸다.
그 곳에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지게를 두고 가세요?”
“할아버지 고려장 다 지냈다. 지게는 버리고 가야지.”
“아버지, 제가 지게 가져갈게요.”
“지게는 가져가 무얼 하려고?”
“할아버지 져다버린 지게인데 뒀다가 아버지도 여기에 져다 드려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크게 깨닫고 반성하며 할아버지를 다시 모셔와 잘 봉양했다.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에 실려 있는 '기로국' 이야기가 있으며 위기에 빠졌던 기로국이 노인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면서 효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한 나라에서 나이가 든 노인들에게 밥벌이가 안 된다고 산속으로 내쫓았는데 근처에 있던 강대국이 이 나라를 침략하기위해 재로 새끼줄을 꼬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결국 노인들이 버려진 산속으로 들어가 지혜를 구했으며, 노인들은 새끼줄에 소금물을 적신 후 불로 태우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 뒤 그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기로국 이야기를 원형으로 한 한국의 전설이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과서에는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문제가 두께를 똑같이 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구분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듯. 여기서의 정답은 물에 담그면 뿌리 부분이 더 잠기니 물에 띄워보는 거다.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신하가 살았다. 이 당시에는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의 어머니도 60이 거의 다 되어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할 처지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자신을 산 속에 버려달라고 했지만 효자 신하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효자 신하는 어머니를 뒤채에 숨겨놓고는 일부러 어머니를 고려장 보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뒤, 중국에서 사신이 찾아와 지혜겨룸을 하잡시고 굉장히 어려운 3가지 문제를 냈다.
구멍이 구불구불한 구슬에 명주실 꿰기
똑같이 생긴 어미말과 새끼말을 손 안 대고 구분하기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효자 신하가 뒤채에서 어머니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뭐라뭐라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날, 효자 신하가 그 해법대로 중국 사신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였다.
개미 허리에 명주실을 맨다. 그리고 한쪽 구멍 근처에 꿀을 바르고 반대쪽 구멍에 개미를 넣는다. 개미가 꿀을 향해 기어가면 반대쪽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명주실이 구슬에 꿰어진다.[4]
마른 풀더미를 놓고 두 말에게 동시에 먹으라고 해서, 먼저 먹는 말이 새끼말이고 나중에 먹는 말이 어미말이다.
그냥 가지를 하얗게 깎은 다음 나물로 무친다. 백(白)가지 나물 완성.
그러자 중국 사신이 포기하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효자 신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려장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노모의 지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할 일이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고려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 이설로 말의 새끼와 어미를 구분하는 것 대신에 호리병 안쪽에 종이를 바르는 문제가 있으며 닥나무 풀을 개어 호리병 안을 적신 뒤 남은 물을 비우고 말리는 해법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