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조기 (외 1편)
이 명 선
물에 스민 시간으로 유속은 빠르다
개개의 슬픔이 물의 완력으로 바다를 적시고 이미 젖은 모두를 다시 적신다
기다림이 사라진 곳으로 차오르는 바다
우리의 지레짐작에는 물의 수인이 찍혀 일조량이 쌓이지 않는다
시간의 제방을 쌓듯 일렁이던 얼굴을 꺼낼 때까지 물의 결에 새겨진 자국을 따라가면 네게 가 닿을 수 있을까
밟히고 밟히고 밟힌 흙 한 줌 쥐여 주며 길고 짧음으로 생을 갈음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영면에 들 수 있을까
언젠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좋다고 하였다
잊힘이 슬픔의 다른 이름이라면
세월에 긁힌 문장이 눈에 밟혀도 조금의 바다에 조등을 걸어 놓아도 나는 물의 나라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붉은 바다가 물갈이를 한다
결말에 다다른 이야기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잠잠해지는 바다엔 행방이 없다
오늘의 문
총소리 나는 곳에서 엎드렸는데 총소리에 끼어 있었는데
돌아보지 마
모든 주검이 따뜻할 필요는 없지
몇 개의 핏방울로 저녁 하늘은 붉어지려 해
모든 걸 벗어던진 문밖의 날씨처럼
나를 밀고 있는 것은 푸른 눈의 파편들이야 또렷이 오늘의 문을 기억하지
혼자서 빌다가 말을 바꾸다가 끌어안다가
되돌아보면 방안에는 온갖 소리로 가득 차 있어
방은 흐트러진 호흡
스스로 머리에 총구를 겨누어도 새벽에 다다르면 소용돌이치지
오늘의 문은 소리의 진원지를 꿰뚫어 보고 있었을까
빈 사람으로 와서 빈 곳을 채우려 하지 마
지금 울어줄 한 사람이면 족하지 희망은 밝힐수록 죄를 짓게 되거든
겨를 없이 영면에 들던 사람과의 직면
결로가 시작된 경로를 따라 같은 문을 밀고 나올 때
서걱거릴 우리는 탄피처럼 새어 나가는 것이 빛이라고 믿었다
이명선 : 2017년 [시현실], 201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인정신 2018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