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관향으로만 남은 옛 고을 이름
우리가 자신의 성씨를 말할 때, 관향까지 들어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관향이 바로 시조나 그 씨족의 세거지와 관련이 있는 고을의 옛 땅이름이다.
① 인동짱씨의 관향 인동(仁同)
인동은 인동장씨의 시조인 삼중대광공신호(三重大匡公神號) 장금용(張金用)이 나온 고장이다.
장씨는 각종 문헌에 약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30본 내외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외래 귀화씨족(歸化氏族)인 덕수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관향은 모두 안동장씨(安東張氏)를 대종으로 하는 동원 분파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 중에서는 인동장씨가 가장 많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시조 장금용의 본성은 장씨(長氏)였는데 활을 잘 쏘아 궁(弓)자를 더하여 장(張)으로 성을 삼았다는 말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인동 고을의 옛 이름은 사동화현(斯同火縣)인데, 이 이름은 학자들이 '똥벌'로 유추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의 옛 문헌들에는 인동은 고을의 행정구역 명칭이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옥산은 인동고을의 원이 사무를 본 관아가 있었던 인동의 중심지로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구미시 인의동(仁義洞)이다.
인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 인동장씨(張) 외에 인동김씨, 인동양씨(楊), 인동유씨(柳,兪), 인동강씨(姜) 등이 있다. 이를 보면 인동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② 파평윤씨의 관향 파평(坡平)
파평은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파평면의 옛 지명이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주사현이었는데 1398년 조선 태조 때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였고, 1461년 파주목으로 승격하였다가 1895년 군이 되었다.
파주 고을의 옛 이름 파평은 학자들이 '뱃벌'로 유추하고 있다.
③ 김녕김씨의 관향 김녕(金寧)
김녕은 경남 김해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다가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돠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그 후 문무왕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으나 경덕왕이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 금주(金州) 등으로 불렀으며,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금주목 (金州牧),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조선 때 와서는 태종이 다시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 군(郡)이 되었다.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김녕으로 하여 혈통을 이어 오다가 고려 말에 지명이 김해로 개칭되자 김해로 칭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되어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칭하다가 1865년(고종 2) 왕명에 의하여 김녕(金寧)으로 확정하였다.
'감녕'은 '검마을' 또는 '검나라'로 유추된다.
④ 순흥안씨의 관향 순흥(順興)
순흥 고을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일대에 있던 마을이다.
순흥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는 순흥안씨를 비롯해 순흥김씨, 순흥박씨 등이 있다.
⑤ 남평문씨의 관향 남평(南平)
남평현은 미동부리, 현웅, 오산, 영평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현재는 전남 나주시 일대로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현웅으로 고쳐 무주(광주)의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남평 또는 영평(永平)으로 고쳐서 나주에 붙이고,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는데, 공양왕 2년(1390)에 화순 감무가 겸하였다가 조선 태조 3년(1394)에 복구되고, 태종 13년(1413)에 예에 따라 현감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 일제 때인 1914년 나주군에 편입되면서 남평면으로 되었다. 남평은 현재 나주시 남평, 다도, 봉황, 금천, 산포의 5개 읍면과 광주시 광산구 본량동 일대의 지역이었다.
남평읍의 남평리는 아직도 사람들이 남평읍내라고 부른다. 남평읍 서산리 주막거리 남쪽에는 남평문씨 시조비가 있다.
⑥ 남양홍씨의 관향 남양(南陽)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한 동의 이름, 즉 남양동(南陽洞)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으나, 조선시대까지도 남향현(南陽縣)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을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남양향교가 있어 옛날에 고을 원님이 다스리던 한 고을이었음을 나타내어 주고 있다.
⑦ 문화유씨의 관향 문화(文化)
문화 고을은 고대 단군조선 때 당장경(唐藏京)이었는데 고구려 때에 이르러 궐구현(闕口縣)으로 고쳤다.
고려초기에 유주(儒州)로 고쳤더니 성종 때에 시령(始寧)으로 바뀌고 현종 9년(1018)에 풍주(豊州)에 예속시켰다가 예종 원년(1106)에 유주로 복구하여 감무를 두었다. 고종 46년 기미(1959)에 위사공신(衛社功臣) 류경(柳璥)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개칭하는 동시에 현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조선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따라 현령과 훈도(訓導)를 각 1인씩 두었다. 광해군 10년(무오.1618)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곧바로 현으로 바뀌었다.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고, 일제 침탈 이후에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고을의 주산인 당장산은 구월산(九月山)이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삼성사를 지어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3위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문화 고을 안악군, 남쪽은 신천군, 서쪽은 송화(松禾)와 은율(殷栗). 북쪽은 장연현(長連)이다. 문화 고을의 풍광을 읊은 제영 중에 조선의 문신 이초(李初)는 '인사는 기한이 있어 서로 바뀌는데, 계산(溪山)은 옛과 같이 스스로 맑도다.' 하였고 김처례(金處禮)는 '시냇가에 해가 기니 중천이 따사롭고, 하늘 끝에 구름이 열리니 월악이 기이하다.' 하였다.
⑧ 정식 지명에서 멀어진 그 밖의 성씨 관향들
성씨 관향에는 남아 있으나 이미 우리 입에서 멀어진 관향 지명들은 이 밖에도 많다.
여산송씨(礪山宋氏)의 관향 여산은 옛날에는 군(郡)이었으나 일제 때인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익산군의 한 면(面)이 되었다. 지금은 전북 익산시의 여산면이다. 지금도 여산면 여산리에 여산향교가 있다.
이처럼 군면 폐합에 따라 군이나 현(縣)이던 곳이 읍면으로 떨어지면서 그 격(格)이 낮아진 땅이름들은 무척 많다.
지금은 경북 포항시 남구로 들어간 연일(延日)도 옛날에 현이었던 곳이다. 읍이 되어 버린 이곳은 연일정씨(延日鄭氏)의 관향으로 연일향교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월도유씨라고 말하는 기계유씨(杞溪兪氏)의 관향 기계도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으로 남아 있다. 본래는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인데, 경덕왕 때 기계현으로 개명하였다.
은진송씨의 관향인 충남의 은진(恩津)도 군현이었으나 지금은 논산시 속의 은진면으로 남아 있고, 현풍곽씨의 관향인 경북의 현풍(玄風)도 군현이었으나 지금은 대구시 달성군 속의 현풍면으로 남아 있다.
반남박씨의 관향인 반남현(潘南縣)은 반남면이 되어 나주시 속으로 들어갔고, 한산이씨의 관향 한산(韓山)도 충남 서천군의 한 면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전의이씨의 관향 전의(全義)는 연기군의 한 면이 되었다.
양천(陽川)은 원래 한강 하류쪽의 한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때의 제차파의현(齋次巴衣縣)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공암현(孔岩縣)으로 고쳤다. 1310년에 양천현으로 개칭되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 내려오다가 1914년 경기도 김포군에 흡수되었다. 지금은 서울시 강서구, 양천구 일대인데, 현재 양천향교가 강서구 가양동에 남아 있다.
풍천임씨(豊川任氏)의 관향 풍천은 황해도 송화군의 한 면으로,
청풍김씨(淸風金氏)의 관향 청풍은 충북 제천시의 한 면으로,
초계정씨(草溪鄭氏)의 관향 초계는 경남 합천군의 한 면으로,
벽진이씨(碧珍李氏)의 관향 벽진은 경북 성주군의 한 면으로,
영산신씨(靈山辛氏)의 관향 영산은 경남 창녕군의 한 면으로,
진보이씨(眞寶李氏)의 관향 진보는 경북 청송군의 한 면으로,
지명 변경으로 여흥민씨의 관향인 여흥(驪興)이란 지명은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다.
여흥은 경기도 남동단에 위치한 여주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효현(黃驍縣)으로 개명하여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원주에 속하였다가 고종 때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년(충렬왕 31) 여흥군으로 승격한 후 조선 태종 때 음죽현(陰竹縣)을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예종조에 천녕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으로 하고 1501년 충주부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고 1914년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능성(綾城)은 전라도 능주(綾州)의 옛 지명으로, 백제시대에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또는 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 인부리군(仁夫里郡)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능성현이라 개칭되었고, 1913년에 능주면으로서 화순군에 편입되면서 '능성'이란 지명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여양진씨의 관향인 여양은 원래 백제시대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인데 또는 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신량현(新良縣)으로 충청도 결성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여양현으로 개칭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감무를 폐하고 홍주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명종 원년(1171)에 홍주군이 양광) 청주목에 속했다가 조선 태조 4년(1395)에 폐현되고 홍주군에 편입되었다. 홍주는 고종 32년(1895)에 홍주부가 되었다가 광무 원년(1897)에 다시 홍주군으로 되었고 일제 때인 1914년에 결성군(結城郡)과 병합하여 홍성군이 되었다. 옛 여양현은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이다.
분성배씨(盆城裵氏)의 관향 분성도 현재의 지명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분성은 경남 위치한 김해의 고려 때 지명이었다. 본래 가락국이었는데 신라에 병합되어 법흥왕 때 금관국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김해로 고쳤다. 고려 때 임해현, 금주, 김녕도호부가 되었다가 다시 김해로 고쳤다. 이렇게 되면서 '분성'이란 지명이 사라졌다.
탐진최씨(耽津崔氏)의 탐진은 전남 강진군에 속해 있던 옛 지명이었다. 본래 백제의 동음현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탐진현으로 고치고, 조선 1417년 도강현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32) 강진군이 되었다. 탐진은 현재 이 지역의 하천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상산김씨(商山金氏)의 관향 상산은 경북 상주의 옛 지명. 삼한시대에 진한의 영토였고, 신라 첨해왕 때 상주(上州)라 하였고 그 후 경덕왕이 상주(尙州)로 개칭하였다.
소위 후삼국(태봉국, 후백제, 신라) 때만 해도 상주를 배경으로 한 세력 각축 와중에서도 상주를 배경으로 하여 다른 가문(고려 말에 가문 만들어짐)은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고려 말에 관계에 진출을 한다는 것은 고려 때만 해도 상주 지역은 여전히 상산김씨의 수중에 있었고, 주도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경주의 옛 이름인 서라벌, 셔블이라는 명칭은 상주의 고대지명인 사량벌, 사벌과 연관이 있다. '사벌'이나 '서벌', '서라벌'은 모두 나라의 중심 지역을 나타내는 지명이었다.
지금 상주시에 쓴 상산초교 등 상산이란 옛 지명을 쓰는 기관이나 상점이 많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곡부공씨(曲阜孔氏)의 관향 곡부는 우리나라에 있지 않고, 중국 산뚱성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