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밤 영동고속도로
(원주) 이미정
낮이 짧은 겨울 날 휴일 오후, 오랜만에 오래된 친구와 만나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차 마시고, 밥 먹고, 얘기할 곳 찾아 또 차 마시고...... 강원도의 높은 산 끝자락에 집 짓고 살고 계신 늙으신 아버지께 가겠다고 했으면서요.
너무 늦어져버린 시간, 이미 잠드실 시간인데, 잠 안 들고 기다리실 아버지. 아예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할까 망설이다가, 그래도 당일 방문과 하룻밤 자는 것의 차이가 엄청 클 것이므로 용기를 내어 출발했습니다. 눈이 내릴 수 있다는 불안감도 안고.
서울에서 출발해 용인 지역을 벗어나면서 통행 차량이 부쩍 줄어들더니, 이천을 지나니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약간의 곡선 길에선 앞에 아무 차도 안 보이고 도로 옆 절벽까지 겹치면, 깊은 터널 속을 지나는 듯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길이 반듯해지고 멀리 앞에 가는 자동차의 빨간 후미등이 보이면 구원자를 만난 듯합니다.
그 작은 빨간 불빛을 길잡이로 속도를 내 봅니다.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쫓아 갑니다. 과속해서 사라져버리지 않고 계속 앞에서 달리는 그 차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그 운전자는 무슨 일로 이 한밤중 강원도 산 속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힘들고 나쁜 일로 급히 가는 게 아니기를 빌게 됩니다.
규정 속도로 가고 있는 그 운전자가 인생의 달고 쓴 맛을 아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일 거라는 추측까지 합니다. 깜깜한 적막 속 그 빨간 두 개의 후미등은 마치 가까운 지인의 떠나는 뒷모습처럼 연민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 연민은 저의 가슴에 설명하기 어려운 따뜻함을 차오르게 합니다.
이렇게 편안해진 마음이 눈길을 옆으로 주게 합니다. 여름이나 낮에는 보이지 않던 외딴 마을과 외딴집이 시커먼 산 밑에 보여 깜짝 놀랍니다. 신기하게 멀리서도 가로등과 집안에서 나오는 불빛이 구별됩니다. 가로등은 외로우면서 의연해 보입니다.
이 늦은 밤 불빛 아래 지나는 이나 있을까? 저 불켜진 집은 이렇게 밤 늦도록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구가 있는 걸까? 아니면 늦게까지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두서없이 스치는 느낌과 생각 속에 제 마음은 현실의 복잡함이 걷히고 정화되는 아득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한 겨울 깊은 밤 영동고속도로를 달려도 따스하고 정체모를 연민을 맛보기가 힘듭니다. 국토를 종단하는 고속도로가 연이어 생겨 분기점마다 여러 개의 가로등이 낮같은 환한 밝음을 뿌리고, 터널 진출입구 부분 등에도 가로등 수를 많이 늘려 놓아 도로가 어두울 새가 없거든요.. 게다가 갓길이 만들어지고, 갓길 운행 혹은 금지 표시등이 계속 켜 있어, 앞차의 빨간 후미등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늦은 밤 영동 고속도로를 더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도, 제 마음은 소중한 것을 잃은 듯 허전하기만 합니다.
백합문인회 소속
첫댓글 깊은밤 눈내리는 산길을 차로 다니던 내 옛날생각이 나네요
원주에는 수필 잘 쓰는 작가도 많은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