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의 역사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온돌은 구들을 달궈 바닥을 따뜻하게 만드는 쪽구들에서 발전한 한국 고유의 전통난방 방식이다. 온돌은 불을 피우는 아궁이, 불길과 연기의 통로인 고래와 그 위에서 열을 받는 구들, 열기가 빨리 빠져 나가는 것을 막는 개자리, 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인 연도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온돌은 방바닥을 고루 덥혀주기 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화재에도 비교적 안전하다. 한번 뜨거워진 구들장은 오랫동안 방바닥을 따듯하게 해주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준다. 연기와 재 등이 방에 남지 않으며, 실내에 신을 신고 들어오지 않게 되어 위생적이고 청결한 생활이 가능하다. 또한 특별한 가구가 필요 없기 때문에 실내 공간 활용에도 장점이 있다. 열효율도 높은 편이라, 매우 과학적 난방방식이다.
우리겨레는 언제부터 온돌을 사용했던 것일까? 온돌의 조상인 쪽구들은 B.C 4〜1C경 연해주 남부 크로우노프카 문화(옥저문화)에서 가장 먼저 사용했다. 쪽구들은 방의 일부에만 一자 또는 ㄱ자 모양의 구들을 놓는 부분난방 시설이다. 따라서 방 전체에 구들을 놓은 온돌에 비해 실내가 춥다. 따라서 쪽구들을 사용한 고구려인들은 실내에 화로를 사용하고, 휘장을 쳐서 찬바람을 막았다. 또 창문을 작게 내고, 벽체를 두껍게 집을 지었다. 쪽구들이 방안 일부에만 있기 때문에, 실내에 신발을 신고 들어와 의자, 평상, 좌상, 장방 등에 앉아 입식생활을 했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인들의 실내 생활 장면은 이처럼 입식 생활하는 모습들이다. 쪽구들은 파주 주월리, 부여 쌍북리, 여수 고락산성 등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고, 경남 사천 늑도유적 등에서도 발견되어 백제, 신라들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와 고려로 계승된 쪽구들은, 여러 줄의 고래가 있는 형태로 발전하다가, 고려 말에 완벽한 형태의 온돌로 발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자주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구들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도 온돌은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양반집에도 병자나 노약자를 위해 한 두 개 방만 온돌을 놓았을 뿐이었다. 1563년 2월 명종 임금의 침실에서 화재가 난 적이 있다. 임금의 침상은 침상 아래에 숯을 담은 화로를 넣어 덥히는 형태였는데, 불기운이 침상 판자에 닿아 불이 난 것이다. 이처럼 당시 궁궐 안에는 온돌방에 거의 없었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의 학생들이 거주하는 동재와 서재도 본래 마루방이었다가, 전체가 온돌방으로 바뀐 것은 1528년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 살았던 정도전, 한명회 등이 등장하는 사극에 온돌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온돌 보급이 쉽지 않았던 것은 방 전체에 열기가 고루 전달되도록 고래를 놓고 구들장을 만드는 것이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온돌이 보편적인 난방 방식으로 정착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이때는 현재 기온보다 연평균 기온이 2℃ 정도가 낮았던 시대였다. 기온이 낮아지자 사람들은 따뜻한 온돌방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실학자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온돌 보급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은 김자점(1623년 계해정변 1등 공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 때 도성의 네 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서 임금이 근심하자, 김자점이 이에 한성부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며, 숲이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온돌이 널리 보급되자,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온돌로 인한 땔감소비가 급증한 것이다. 그래서 궁궐 안네 땔나무와 숯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바빠져, 이를 맡은 사람들의 괴로움이 임금에게까지 전달되기도 했다. 온돌은 취사를 하지 않을 때에도 난방을 위해 불을 피워야 했고, 방 전체를 난방하기 때문에 쪽구들에 비해 연료 소비가 많았다. 온돌이 보급될수록 땔감 수요가 늘어 조선의 산림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연료의 대부분을 나무에서 얻었다. 중국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지만, 조선은 불이 잘 붙지 않는 무연탄이 많고, 그 나마 대부분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되어 있어 19세기 말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땔감으로 나무를 마구 베다 보니, 산림이 황폐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온돌 보급과 함께 나무를 적극적으로 심는 식목정책이 실행되었더라면 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인데,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온돌 보급은 산림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조선을 변화시켰다. 온돌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안방 남쪽에 부엌이 붙게 되자, 남쪽 창문이 없어져 실내가 어두워졌다. 아울러 아궁이를 이용해 취사를 하기 위해 부엌을 설계하다 보니 부엌이 방보다 낮아져 여성들의 작업환경도 나빠졌고, 부엌일도 고단해졌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쓰이던 의자, 침상, 휘장 등이 퇴출되고, 대신 온돌 바닥에 앉아 생활하기 쉽도록 문갑, 탁자 등 가구의 높이가 낮아졌다. 온돌방에 앉아서 겨울 내내 새끼를 꼬거나, 책을 읽는 것이 조선의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그 이전에는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돌 보급이 우리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크게 바꾸어 버린 셈이다. 따뜻한 아랫목은 고향과 집을 생각하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온돌은 한국 주거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많은 전통문화가 사라졌지만, 장점이 많은 온돌만큼은 꾸준히 개량되어왔다. 온수 파이프를 통해 바닥을 덥히는 온돌방 아파트는 우리나라 주택의 대표적 특징이 되고 있다. 또한 온돌은 실내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시켜 주며, 온열효과로 사람 몸에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피로 회복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온돌의 건강효과 때문에 최근에는 온돌침대의 보급도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온돌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며, 꾸준히 발전해온 대표적인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사진 - 경복궁 수라간 아궁이 - 조선에서 온돌방이 보편화된 17세기 이후였다.
양주 회암사 온돌 -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최대 구들시설
조선후기 사랑방 풍경 - 사대부들은 서안을 놓고 아랫목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이었다.
고구려 초기 수도인 오녀산성에서 발견된 쪽구들 - 온돌은 부분난방인 쪽구들에서 발전한 것이다.
고구려 각저총 부부도 - 남편은 의자에 앉아 있고, 부인은 쪽구들 위에 앉아있다. 실내에 휘장이 쳐진 모습이 조선과 다른 모습이다.